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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2:28b~36 2020-10-1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난 주에 나눈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자신의 상태와 의탁과 사명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을 봤다. 오늘 읽은 내용은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응답으로 시작하여 자신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있게 될 영계(靈界)의 변화를 말씀하신다.

보이는 면에서 이 세상은 진리와 법을 지키는 것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분명히 빛의 편의 사람이기보다는 어두움의 힘과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힘을 얻고 재산을 모으고 잘되는 것처럼 보이고 그런 이유 때문에 의롭게 살려고 각오하던 사람들조차 ‘정의롭게 살아야 나만 손해보는 것이다.’라는 생각 때문에 의롭게 살기를 포기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계명과 뜻을 따라 진리를 순종하며 살 것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때로는 이러한 하나님께 항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렘12:1b)

악의 세력이 힘이 있어 보이고 세력은 여전한 것처럼 보여 의롭게 살아 보려는 자들을 낙심시키고 안타깝게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는 이러한 영적인 세계의 악한 세력을 자신의 희생으로 물리치시고 반드시 정의가 승리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신다.

그 중요한 선언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세상은 반드시 그의 행한대로 응분의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임을 선언하시는 말씀이 오늘 메시지의 핵심이다.

OT 성경의 나타난 부분만을 가지고 그리스도가 죽을 수 없다는 질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빛을 선택할 수 있는 시기에 빛을 믿으라는 사뭇 진지한 말씀을 주시고 그럴지라도 자신의 때에 맞추기 위하여 잠시 숨으시는 내용으로 이어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십자가에서 감당하셨어도 보이는 세상에서의 변화는 역시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엄청날 것임을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이전의 어두움의 세력은 십자가 사건 이후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으로 한 마디로 그 날뛰는 세력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귀 사탄의 머리는 상하였고 더 이상 자신의 맘대로 날뛰지 못하는 묶이는 신세가 되었음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우리와 함께 하게하신 성령과만 행한다면 이제부터는 우리가 무서워할 것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Ⅰ. 이 소리가 난 것은(28b~30)

하늘의 소리는 모두가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구속의 역사를 위해서 오시고 활동하실 때 몇 번은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말씀과 역사로 응답하셨던 사실은 공관복음에서도 기록되고 있는 사실이다.

세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막1:11; 눅3:22) 하였고 변화산에서도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 막9:7; 눅9:35)는 내용을 본다.

이 다급하고 안타까운 주님의 기도에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응답하심을 요한은 확인해 주고 있다.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28b)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은 자신보다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데 최선을 다하셨지만 이제도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를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뜻을 이루어 영화롭게 할 것이라는 화답이다.

우리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산다면 역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비록 예수님을 믿고 섬기기는 하지만 어떻게 주님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까지 하겠는가?’ 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렇게 우리와는 관련이 없는 먼 이야기이거나 어려운 것은 아니다. 어떤 조건과 형편에 서든지 자신의 입장보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찾고 따르려 고만 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하늘로부터 있었던 이 하나님 아버지의 응답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다.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29) 앞에서 하늘의 음성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이미 앞의 3:3에서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속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신 것인데 이 말씀은 단순히 눈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교훈이기 때문에 역시 들을 수 없다는 내용도 포함하는 말씀이다.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말씀하는 중에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고전14:10)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뿐이지 뜻을 지니지 않은 소리는 없다는 것이고 더욱이 하늘에서 주시는 소리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나 요한 사도는 알아들은 하늘의 소리를 다른 사람들은 “천둥이 울었다”거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이러한 표현은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도 비슷한 주변의 반응은 있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행9:7)

사실 이 두 유형의 표현은 의미에 있어서 다르지 않고 다만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고백이다. 그럼에도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라는 표현은 분명 악의적인 평가는 아니었음을 본다.

우리가 어떤 소리 보다도 성령과 더불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소리를 가려들을 수 있는 신령한 귀를 가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30) 늘 하나님 아버지와 변함없이 교통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결심하신 주님께는 이런 응답조차 구태여 필요치 않았을 것이지만 비록 그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형편일지라도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거기에 하늘이 응답하는 사실을 보는 것 만으로도 저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 분명히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의 언어로 기록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혀 사람들을 위한 것임이 사실이다. 신비한 언어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타국어가 아니라 각국의 모든 민족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지금도 먼저 불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에 의해 번역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하여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는 하나님의 공평하신 사랑이 증거되고 있다. 오늘도 모든 하늘의 소식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모든 인류를 위한 소리이다.



Ⅱ. 내가 땅에서 들리면(31~33)

여기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 결과되는 영적 세계의 지각변동을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실패하시는 것으로 오해될 여지가 없지 않다. 메시아로 보내셨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대의 정치세력의 간악한 협력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이해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다만 발꿈치를 상하셨을 뿐이고 머리를 상해 죽은 것은 마귀 사탄임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31)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 마귀 사탄은 온 갓 간교한 방법으로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였고 그의 보내시는 일꾼들마다 넘어뜨리고 실족케 하였지만 이 모든 날 마지막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이 혼란한 영계를 평정하심에 대한 선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은 옳고 의로운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하고 간교하게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사이를 이간시키고 갈라놓으려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2:2) 곧, “이 세상의 임금”을 심판하실 것에 대한 선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저주의 죽음을 대신 죽으실 때에 이 세상의 임금은 거드름을 피우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32) 주님께서는 이미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라고 선언하신 바 있다. 이것은 두 말할 것 없는 십자가에서의 구속을 위한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죄의 형벌을 모두 대신 지신 후에는 이제 이 복음으로 순종 된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집인 교회로 불러내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 하신 것처럼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비유의 실체이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33) 제자들조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등극하셔서 로마의 압제를 몰아내고 영광의 왕으로 다윗과 솔로몬처럼 천하를 통일하실 것을 기대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죽어야 모두가 산다는 귀중한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하여 증거하시는 것이다.

특히 여기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하심으로서 십자가의 힘겹고 부끄러운 죽음을 감당 하셔야 할 것을 전혀 어려워 아니하시고 기꺼이 진실되게 나타내시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런 수치스러운 죽음을 기쁘게 감당하셨다면 우리 또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라면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 임금을 쫓아내고 그의 사람들을 자신에게 이끄시는 창세전부터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신비요 마귀 사탄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요 뜻이며 역사이다.



Ⅲ.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34~36)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상상해 왔던 그리스도의 영광과는 다르게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되는 증거에 이를 듣는 무리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하는 내용이 오늘 마지막 부분인데 동문서답 같지만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두움에 잡히지 않게 빛을 순종하라고 당부하신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바르게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앞의 v33에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34)는 주님의 말씀에 반문이다.

이렇게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라고 묻는 것을 보면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에 의구심을 가지는 무리들은 OT에 나타난 특히, 시편110에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르는 메시아의 영구한 영광에 관한 것만 생각하고 이사야53장 같은 고난의 종으로서 오실 메시아의 사실은 마음에 두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 “들려야 한다는 인자는 누구냐?”고 따지고 든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직접 답하기 보다는 마치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전혀 다르게 들리지만, 진정으로 그들이 알아야 하고 행해야 할 내용을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35f) 이 주님의 말씀을 간단하게 이해하면 “빛을 붙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라!” 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사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더 중요하다.

당시로 본다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의 당부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무리들은 이러한 귀중한 주님의 교훈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교훈은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다.

우리는 누구나 기회는 항상 주어지고 이번 기회를 버려도 다음 기회를 잡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귀중한 기회를 지나가게 두고 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사회생활과 가정도 그렇지만 영적으로 더욱 그렇다.

지금은 세상에 해야 할 과제가 많기 때문에 이것을 해 놓은 다음에 신앙에 매진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학생 때나 청년의 때 믿음생활에 등한해지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그들이 세상 속에 자기를 충분히 세운 후에 다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갖는 것은 거의 보기 힘들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믿음을 잃어버리는 일이 더 많은 것을 본다. 이런 말이 당사자들에게는 결코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사실 믿음생활 등한히 하며 세상 공부나 스펙을 충분히 쌓은 후에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거의 보기 어렵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 그 무리에게 지금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경계해 주고 계신 것이다. ‘이 COVID-19 때문에 세상 살기 힘드니 일단 삶의 든든한 터를 만들어 놓고 안전한 상태에서 신앙에 열심을 가지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러한 생각은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정 반대의 생각이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은 단절되고 닫혔으니 이런 때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모시는 반대의 생각이 신앙하는 인생에 더 유리할 수 있음도 생각해야만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35f) 여기 “아직 잠시 동안, 빛이 있을 동안”이란 말씀을 연거푸 하신다. 잠시 기회가 있을 때는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즉, 잘못된 생각이나 판단을 하지 말라는 당부이다.

언제나 기회는 변함없이 지금 뿐이다. 다음 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 빛을 즉, 영원을 선택하는 것이 언제나 우선이 되어야 한다. 또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것이 0순위가 될 때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신다.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35b) 어둠에 다닌다는 것은 이미 빛을 잃어버린 모습이고 그런 상태에서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떻게 가고 있는 지도 알지 못하는 영적인 무지가 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이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고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가 우리가 이런 상태가 되는 것을 가장 기뻐한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계속해서 빛이 강조되고 있다. 빛은 분명히 어두움의 반대편이며 여기 빛은 무엇보다도 인류의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이 말씀 역시 생명의 기회를 잃지 말라는 당부이다.

요한은 이미 1:4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했는데 이것은 물리적인 빛이라기 보다는 영적인 빛이고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뵐 수 있는 유일한 빛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세상의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는 길이나 방법이 없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어리석은 군중들에게 진리를 증거하신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36)는 안타까움을 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셨다.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눅4:29b~30)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요8:59)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요10:39)

이것은 늘 말해왔듯이 죽음이 겁 나서가 아니라 “때가 차매”(갈4:4)라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때에 맞추시기 위한 주님의 행동이셨고 바로 위해서 말씀하신 시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오늘 인간구원의 신비한 역사가 기록된 성경이 우리(나)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 신비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기 위한 나의 언어로 이해하게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감사한 일인가! 그러므로 복음의 소리는 나를 위한 생명의 소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높이 들리심은 과거의 어두움속에서 나를 지배하던 잘 못된 나의 지배자를 쫓아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였다. 그 은혜의 역사로 인하여 당연히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로 이끌림을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는 검사드릴 수밖에 없는 사랑의 실제성이다.

매일 주어지는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하늘의 백성으로서의 과제는 지금 이 순간이 빛을 붙잡을 수 있는 기회임을 알고 어둠에 붙잡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한번 어둠에 붙잡히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어떻게 가고 있는지도 판단할 수 없게 되는 영적 무감각의 비극에 처하게 됨을 경계해야만 한다.

이 세상은 이미 심판을 위해 정죄되었다. 이 어둠의 세상과 함께 심판 받지 않기 위해서 항상 빛을 붙잡고 빛을 따르는 삶이 되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