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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2:37~43 2020-10-18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오늘 내용은 한 단락 속에서 OT성경을 가장 많이 인용하시는 말씀으로 그것도 메시아 예언을 주로 하였던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는 데 그것이 소망적이거나 은혜로운 내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내용이다.

이미 이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선택된 백성들의 불신앙을 한탄한 바 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거나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11)라고 요한을 통하여 성령께서 안타까워하신 바 있다. 오늘 다루게 되는 전체적인 내용은 불신에 대한 안타까움과 경계이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이집트을 나와 가나안을 향해 가는 약속을 믿지 못하여 끝없이 원망하고 불평하던 건국이전부터 계속해 왔던 사실이다. 광야의 그 수많은 이적과 사람이 살 수 없었던 광야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끄시고 먹이시고 인도 받았음에도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불신의 투정은 계속되었고 결국 그들은 모두 젖과 꿀이 흐는 약속의 땅을 들어가지 못하고 죽고 만다.

이런 조상들의 모습을 끝없는 경계로 들었음에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나서도 달라진 것은 없었고 다윗과 솔로몬 초기에 그리고 히스기야나 요시아를 제외하면 왕들조차도 다윗을 본받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것 때문에 앗수르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나라가 망하고 하나님의 긍휼로 다시 돌아왔음에도 역시 다를 것이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에도 그들은 약속의 메시아를 볼 눈을 뜨지 못하였고 끊임없이 배척하고 죽이려고만 애써 왔다.

그러면 그들만 그러고 우리는 어떠한 가 살펴보면 우리들 역시 그들을 비판할 만한 충직하고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역시 그렇다고 자신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사실 칭찬은 좋아하면서도 이런 이야기는 별로 행복하지 못하다.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실생활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처럼 오히려 자신들의 바램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까봐 불편해하는 안타까운 모습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안될 더 무서운 불신이다.

오히려 침례자 요한처럼 자신을 따르고 존경하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상황에서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하는 것처럼 모든 범사에 있어서 나의 형편과 처지 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나에게 어떤 불이익이 와도 기뻐할 수 있는 자세가 될 때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이다. 이럴 수 있는가!



Ⅰ. 소망적인 예언뿐만 아니라 안타까운 예언도 반드시 이루어진다(37~38)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또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을 다룰 때마다 인용했던 말씀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는 내용이었다.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한 마가복음도, 그리고 오직 생명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한 7가지 표적을 정선해서 기록한 이 요한복음도 오직 목적은 하나 밖에 없다. 믿고 생명을 풍성히 얻게 하려는 목적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오늘 서두에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37)라는 불신을 탄식하고 있다.

오늘 날 사람들에게 유명한 마술사들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이 입을 벌리며 놀라게 하려는 표적을 보여주기 위해 즉, 표적과 기적으로 유명세를 얻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특히 이 요한이 선정한 7가지의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처럼 기다리던 약속된 메시아로 알아보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저들이 전해 들은 것도 아니고 직접 본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럼에도 그들은 오히려 더 많은 표적을 요구할 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증거하고도 남음이 있는 표적들과 치료들을 직접 보고도 도무지 믿지 못하는 딱한 사람들이었다고 요한은 탄식하듯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오시기 전부터 오실 메시아를 예언했던 선지자 이사야가 이미 예언한 사실이라고 증거한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38f) 예언은 듣기에 좋은 것은 이루어지고 그렇지 않은 것은 차라리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사람들의 바램이지만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위하여 선포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예언이다.

예언은 언제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듣기 좋은 것은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귀하게 듣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이루어지고, 듣기에 힘겨운 것은 반대로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원하는 것을 행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응하기 때문에 서로 상관관계를 가지는 것도 사실이다.

첫번째로 인용되는 말씀은 난외주에 기록된 대로 이사야53:1을 그대로 인용하시는 내용이다.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38m)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수난과 고통을 당하는 메시아를 생각지 못하고 오로지 영광과 위엄으로 자신들을 외부의 억압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메시아만을 상상하고 있었고 이것은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성령을 받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38b) 이런 불신의 마음을 바꿀 하나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고 되물을 만하다. 고난 받는 메시아를 성경에는 이렇게 분명히 기록되고 있지만 罪性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깨달음을 주시기 전에는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진리를 사모하고 순종하는 소수들 만이 불신의 두꺼운 장벽을 깨뜨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었고 오늘 이 세상을 보더라도 비율로 따지면 참으로 소수의 사람들 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감격하는 감사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많은 불신 가운데서 오늘 나(우리) 자신이 주님을 섬기는 순종자가 된 것만으로도 큰 감사를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부정적인 예언의 이루어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완악한 마음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백성에 된 것에 충분한 감사로 응답하는 …



Ⅱ. 그들이 믿지 못한 이유(39~41)

인용된 이사야서6:10의 내용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위엄스런 보좌를 보고 제단 숫불로 자신의 입을 깨끗케 하여 죄사함을 받고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8m) 탄식하시는 하나님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b) 라는 헌신을 고백한 후에 이제 가서 백성들에게 전하겠지만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가르치시면서 주신 말씀이다.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39) 이사야서 1장부터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지만 마음 없이 드리는 것들을 차라리 가져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탄식하셨다(사1:12~14).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려는 사람들은 마치 포도원의 망대 같이, 여름 참외밭을 지키는 원두막처럼 상징적으로만 남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탄식하신 바 있으시다.

여기에 이어지는 이사야가 본 그 죄악으로 가득 찬 백성들과는 너무나 다른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이 처한 죄악의 환경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라고 탄식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주님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오셨을 때도 다르지 않은 선택된 백성들의 안타까움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이 비극의 예언을 그대로 인용하고 계신 내용이고 안타깝지만 이 모습은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믿는 사람들 속에 다르지 않은 모습일 뿐이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40)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주시는 말씀은 대부분 아니, 모든 예언은 백성들을 살게 하기 위하여 주시는 경계의 교훈이지 망하게 하고 멸망시키려는 의도에서 주시는 교훈은 없다.

우리가 읽은 말씀은(개역 개정) 과거의 개역한글판 성경보다 의역(意譯)한 것으로 보이는데 좀더 가까이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서 과거의 한글을 인용하면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로 되어 있다.

원문에는 분명히 3가지 기관이 언급되고 있다. “마음(לֵב)→(שָׁמַן) 기름지다; 귀(אֹזֶן)→(כָּבַד) 무겁다, 무감각; 눈(עַיִן→שָׁעַע) 기쁘게 하다, 감다, 닫다” 이런 세가지 중요 기관은 사실 나이가 들면 육체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지만 이것은 육신의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상태에 대한 비유의 교훈이다.

여기서는 중요한 감각기관이 마비되어서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하라는 예언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랑이 충만하신 분일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백성들의 “마음을 둔하게, 귀가 막히게 눈이 감기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참으로 이런 분이시라면 우리가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확신이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서 라도 죄에서 돌이키면 용서하시려고 기다리시는 주님이시다.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18:31~32)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33:11)

이것은 사실 말씀을 듣는 백성들의 상태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백성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나타낸 것인데 세속의 무사안일에 빠진 사람들이 행여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자신의 현재의 육신적인 삶이 ‘너무 영적으로 변화되어 버리지 않을까!’ 우려하는 내용을 반어법(反語法- 참뜻과는 반대되는 말을 하여 문장의 의미를 강화하는 수사법.)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아무리 타일러도 깨닫지 못하는 무감각한 백성들의 안타까운 상태를 그대로 버려 두셨다는 바울사도를 통한 말씀과 같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롬1:24)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26)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28)

또,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41)는 말씀으로도 같은 이해를 할 수 있다. 위엄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모습과 거기에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백성들을 비교해 보고 탄식하는 말씀이라는 교훈이다.

우리 죄인 된 사람들의 정상적인 상태는 죄를 말갛게 씻어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를 원하는 것이 바람이지만 너무 어두움에 익숙해지다 보면 자신이 행여라도 빛의 백성이 될까 봐 오히려 잘못된 염려를 하는 상태에까지 가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더 이상 구제의 방법이 없다. 오늘 행여라도 자신이 하늘나라에 더 익숙한 사람이 될까 봐 걱정하는 사람은 없기를 …



Ⅲ.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결과(42~43)

대개의 경우 영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것은 두려워하고 사랑하면서 능력과 사랑을 받아 누리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보다 사람을 의식하여 발생하는 문제들이고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지 못하고 세상과 더 가까이 지내다 보면 신앙생활 하는 것조차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쪽으로 가기 때문에 이 어두운 마지막 역사 속에서의 많은 교회 들에서 보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42) 앞에서 불신의 안타까움을 말한 후에 “그러나”라는 반대적인 의미를 이끄는 말로 그래도 그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많음을 증거하고 있다. 여기 [관리, ἄρχων]라는 표현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보통의 관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는 물론 종교 까지를 총괄적으로 지도하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의미한다.

공개적으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실명이 거론되는 사람으로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3:1) 그리고 예수님이 죽은 후에 빌라도에게 시체를 요구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막15:43)과 같은 사람들이 이 둘 뿐이 아니었던 것은 요한은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성경적인 깨달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고 인정하면서도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자신들의 그런 확신을 나타내고 있지 못한 것이 더 안타깝다. 역시 성령의 역사 없이는 그런 용기는 당시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42m) 하나님의 진리의 확신을 가지고 성령을 힘입지 못하면 역시 하나님 경외보다는 사람을 더 두려워하게 되는 대표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전체 때문이라기 보다는 “바리새인들 때문에” 라고 하기 때문이다. 더 가까이 말하면 자신의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 동료들임에도 이들을 의식하여 자신들의 소신을 나타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고 증거한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감이 없다면 우리는 곧잘 이런 약함을 가질 수 있는데 체포되어 심문받으시는 주님 앞에 있던 베드로와 같은 모습이다.

베드로 사도에게 당황하여 부인하게 한 사람은 군인도 아니고 종교지도자도 아닌 “여종[παιδίσκη, 하녀]”라고 기록되고 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마26:69; 막14:69; 눅22:56; 요18:17)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바른 경외감을 잃어버리면 어린아이까지도 무서워할 수 있다. ‘설마 그럴까!’하겠지만 이것이 역사에 나타난 사실이다.

더 구체적인 내용이 붙여지고 있는데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42b)는 것이다. 이 요한복음을 나누면서 보아온 내용이다. 특히 9장에서 나면서 시각장애자였다가 예수님의 기적으로 눈을 뜬 사람의 부모에게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19~20f) 물었지만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20~21f)라고 애써 예수님의 역사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를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22)는 기록을 보는 것과 같다.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을 신앙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보호나 인정을 받지 못할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늘 우리 각자의 마음에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 각자가 섰을 때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10:33; 눅12:9)

우리는 때로 두 사이에서 어려워할 때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있는 나인지, 사람들과 세상 앞에 있는 나를 생각하고 늘 “하나님 앞에”를 의식하는 삶이 가까울수록 하늘나라에 합당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요한은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43) 여기에 두가지의 영광이 나타난다. 하나는 잠시 있을 세상의 영광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하나님과의 영광이다.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후자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하나님과의 영원한 영광은 보이지 않고 세상의 영광이 현실적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앙한다는 사람들조차 세상의 영광을 쉽게 선택하고 그런 모습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부끄럽고 초라하게 만든다.

아니 어쩌면 영원한 하늘의 영광을 팔아 현실의 영광을 더 누리려고 하는 안타까운 모습들도 있다. 우리가 참으로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영광을 바라고 사모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의 모습이나 교회의 모습은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많이 대범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또한 주님께서 경계하셨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 마7:13~14)는 경계의 교훈이기도 하다. 어느 것을 선택하라고 권면할 필요가 없는 것은 누구나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역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는 경계로 사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