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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3:1~11 2020-11-01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지금까지도 몸소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실천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지만 오늘 본문의 내용이야 말로 더욱 모범 된 가르침인 것은 이스라엘 속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겸손으로 다른 사람들을 그것도 수하 사람들이라고 하는 제자들에게 섬기는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지내시는 마지막 유월절 그것도 온 인류를 위하여 스스로 유월절 양으로 죽으셔야 할 마지막 순간에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셔서 제자들을 섬기는 모습이야 말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의 극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성경을 해석하는 주경학자는 같은 마지막 유월절의 만찬자리에서 있었던 누가복음22:24~ 있었던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는 기록과 함께 나타난 교만의 합당하지 않음을 친히 몸으로 보여주신 가르침이라는 이해를 하기도 하는데 충분히 일리가 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만찬이 끝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마지막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드리고 잡혀서 십자가를 지셔야 할 기막힌 입장에 계셨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제자들은 마치 이번 유월절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올라서서 자신들이 각료들의 자리라도 나눠 받을 것으로 착각하고 이런 다툼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그것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기가 막힐 모습이지만 그 답답한 심정을 억누르시고 섬김이 무엇인가를 친히 보이셨던 것이다.

또 역사 속에 길이 남을 이 아름다운 모습을 여러 사람들이 재현하여 [세족 식]이라는 event를 특별히 하기도 하지만 모습이 같을지라도 그것은 이러한 심정의 주님께서 행하셨던 것과 같을 수는 없기 때문에 외형적인 모습을 흉내내는 것보다는 그 깊은 심정과 의도를 본받아야만 할 것이다.

이 말씀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룰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를 씻기시지 않으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다는 교훈으로 오늘 메시지의 제목으로 잡은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나의 고백이다. 왜냐하면 나(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씻김을 받은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발을 씻기시는 표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으로서는 영원히 어떤 방법으로도 씻을 수 없는 저주의 원인이 되는 죄를 자신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씻어 주셨다는 사실이 오늘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역사를 감격하게 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관련을 새롭게 맺게 된 감격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마지막 유월절 만찬의 내용은 공관복음에서 모두 다루고 있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이 귀중한 이야기는 역시 요한만이 다루고 있는 사랑의 실천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우리가 올 한 해는 특히 COVID-19라는 단절의 상황으로 지내다가 겨우 두 달 남겨준 시점에서 이 복된 말씀을 다루게 되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뜻이 계시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모두가 높아지려고 애쓰고 방법을 찾는 이 교만이 극에 달하는 시대에 우리 주님의 이러한 섬김의 모습을 실천해야 할 당연성을 배우게 된다.



Ⅰ.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심(1~3)

유월절을 함께 먹으려고 둘러앉은 자리에서 이제 구속사역의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이 장엄한 섬김의 본을 보이시는데 그 이유들이 먼저 거론되고 있다. 여기에 부정적인 역할을 할 가룟 유다의 역할이 삽입구처럼 거론되어 있는 것도 독특하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1f) 가룟 유다의 역할 하려는 내용인 v2을 사이에 두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이유를 모두 세가지로 거론하고 있다. 그 첫번째가 바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시하시는 때와 시기까지도 완벽하게 인식하시고 거기에 따라 움직이시는 것은 이미 익숙한 내용이다. 우리 사람들은 항상 시기를 놓치고 후회하는 일들이 너무나 흔하지만 예수님은 이 부분에서도 전혀 잃는 일이 없으심을 본다. 시작할 때와 끝낼 때를 아는 것이야 말로 일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러나 세상에 오셨다가 돌아가실 때가 되었음을 아셨다는 것은 이 세상 사역의 절정을 두고 계신 것이지만 그것이 어쩌면 무엇보도 힘겹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임은 바로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v2에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마치 삽입구(揷入句)처럼 기록되고 있는데 언제나 어두움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 평화롭고 만감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팔 계산을 할 수 있는 가가 신기할 정도이다.

두번째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3f)을 아셨다고 말하는데 이것 역시 자신이 감당해야할 십자가의 대속의 희생을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닌 자신이 감당하셔야만 할 것을 아셨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어쩌면 주님으로서 십자가에서 당하실 수치는 사람이 아니라는 데서 우리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고 마지막까지 사탄의 조롱과 회유를 감당해야하는 처절한 감정을 앞두고 마음이 너무나 무거우셨을 것이다.

세번째로는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3b)라는 내용으로 그런 힘겹고 안타까운 상황을 바로 앞에 두고 있음에도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께로”라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없는 무개감을 함께 느끼신 것으로 이해된다.

어쨌거나 이 세가지의 사실을 이제는 보다 분명히 아시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b)는 감정의 표현이 더욱 귀중함을 깨닫는다. 물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세 제자에게 기도의 요청까지 하셨지만 저들은 그마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조는 것으로 끝내 버리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모습을 뒤에 가서도 볼 수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逮捕)되시면서도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요18:8b)고 공포에 있는 제자들을 가게 한 것이거나 십자가에 달려서도 아래에 울고 있는 마리아를 자신의 제자에게 부탁하셨던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7)는 인간의 도리(道理)로 할 일까지도 하나도 외면치 않으시는 주님이셨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이 극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사랑한다는 자기 사람들을 책임질 수도 없고 사랑하지도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역시 이런 입장에서도 우리와 다른 모범이셨음을 다시 한번 감사하게 된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한 하늘의 처소를 예비하시겠다는 약속(14:2)과 함께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b) 하심을 보면서 역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마28:20b) 역시 분명한 약속으로 끝까지 자신의 사람들을 책임지시고 사랑하심을 확신할 수 있다.



Ⅱ. 제자들의 발을 씻으심과 베드로의 거절(4~7)

그 자리에는 앞에서 거론한대로 자신을 팔 가룟 유다 조차도 함께 앉아 있었고 이 밤에 주님의 슬프고 안타까운 감정을 알아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음에도 예수께서는 홀연히 이 섬김의 일을 시작하셨는데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4f) 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이미 서론에서 누가복음22:24~의 자리다툼을 들으시자 그것을 행동으로 가르치시려고 이 일을 시작하셨을 수도 있지만 역시 그 중심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b)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대인들의 식사하는 모습은 비스듬히 누운 형태로 앉아서 식사를 하는 모습일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저들은 편한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 있는 가운데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4b)라는 모습이 좀 더 분명한 대조가 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이러한 형태의 모습은 어떤 집이든지 가장 말단 종이 감당하는 형태라고 한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거나 밖에 갔다가 집에 들어오는 가족들이나 손님들의 발을 씻기는 모습으로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하는데 2장 서두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는 바로 이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자신을 씻기시는 것을 만류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5) 주님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데 대야에 한 사람의 발을 담궈 씻은 다음에 허리에 두르신 그 수건으로 닦는 것으로 제자들을 거쳐 계속하심이 그림을 보는 듯하다. 허리에 두르신 수건을 끌러서 닦는 것은 어쩌면 상징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너희들은 적어도 내 중심에 있다!’라는 말없는 표현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6f) 이것 역시 ‘누가 크냐’는 다툼을 하는 제자들에게 말없는 가르침이셨을 것이다. 세상적으로 한다면 여기에서도 베드로가 먼저일 것이고 보이지 않는 서열을 따랐겠지만 전혀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6)라는 순서를 보기 때문이다.

누구로부터 시작하였는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도 특징이다. 이것은 당연히 일상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교훈 그대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20:26, 23:11; 막9:35,10:43)는 실천이셨을 것이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6b) 말단의 종이 해야 할 일을 자신들은 편히 앉혀 두고 주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모습을 보는 베드로는 자신에게 오시기까지도 안절부절하였을 것 같다. 특히 어디에서나 성미가 급하게 나타나는 베드로였기에 자신에게 오시기까지도 참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약간은 감정이 실린 말투로 이렇게 말했을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7)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겸손과 섬김뿐만 아니라 영적인 이치를 수없이 가르치셨지만 아직은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했던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주님 자신의 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물론 이 자리에서 성령의 오심과 역할을 가르치시게 되겠지만 그 성령의 인도와 가르치심을 받고 서야 알지 못하고 미쳐 깨닫지 못했던 일들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에는 알리라”신 말씀은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에야 깨닫게 될 것을 “지금은 알지 못하나”라는 단서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 원리는 우리 일상에서도 더러 경험하는 일들이다. 신앙을 열심히 하라고 다구치듯 재촉하는 부모님의 권함이 당시에는 이해되지 않고 밉기까지도 하지만 다중에 어느 시기에 자신이 깨닫게 될 때 오히려 감사하게 될 것이지만 마지막 주님 앞에 설 때까지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Ⅲ.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8~11)

어쩌면 오늘 이 마지막 부분이 메시지의 절정(絶頂)이며 깨달아야 할 귀중한 교훈이다. 주님께서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7) 말씀하심에도 베드로는 막무가내로 거절한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8f) 어쩌면 베드로 다운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b)시는 말씀에 베드로는 굴복하고 마는데 이 말씀은 인류의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 귀중한 생명의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단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계시지만 이 교훈은 육신의 발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원리를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히브리9:22의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시는 주님의 선언은 내 피에 씻음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와 아무런 관련을 갖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인류 한사람 한사람을 오로지 십자가의 피로 회복하시기 때문에 십자가 아래서 만나 주시는 것과 같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180℃ 돌변하여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9)라고 적극적으로 변한다. 좋게 표현하면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삶만은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 귀중한 논리는 다르지 않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보면 이 육신을 씻는 것이 영생의 보장인양 잘못 오해해서 욕심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10) 이 말씀을 좀더 이해하기 쉽게 옮기면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라는 표현이다.

이 내용을 주님의 십자가의 사죄를 누리는 사람들은 이미 모든 죄를 사함 받았기 때문에 깨끗하지만 매일 범하는 죄를 발을 씻듯이 용서를 구하는 의미로 요한일서1:9의 신앙 자세로 이해하기도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의 이 말씀은 아직 신앙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불신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권면이기 때문이다. 특히 v8, 10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고 이미 사죄함을 받았지만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미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죄를 용서받은 의인이며 그럼에도 세상 속에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은 있기 때문에 목욕한 사람이 먼지나는 길을 걸으면 발을 씻어야 되는 것처럼 죄가 범람하는 세상 속을 살면서 범할 수 있는 죄의 용서를 수시로 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 붙여지는 말씀이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10) 하심으로서 사탄의 도구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삼십에 팔 생각을 하고 있는(2) 가룟 유다를 제외시키고 계시다.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11)

우리는 ‘이자리에서 예수께서 가룟 유다의 발은 씻기지 않으셨을까?’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씻기셨을 것이라고 판단되고 어쩌면 가룟 유다부터 먼저 씻기셨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솔로몬은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 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잠23:7)는 교훈을 쓰고 있다. 이렇게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결국 욕심과 죄악에 사로잡힌 가룟 유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끝까지의 사랑도 효력을 보지 못함을 본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의 역사를 바로 앞에 두고도 땅에 아직 성령께서 오시지 않아 영적인 사리분별이 되지 않는 두고 가셔야만 할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책임 지셨다. 그때 사도들에게 그러셨던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다르지 않으시다.

주님을 순종하려고 애쓰는 자기 사람 즉, 그리스도인들을 시대나 상황의 변화에 관계없이 세상 끝날까지 사랑하시고 지켜 주실 것이다.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행하셨던 일을 당시에는 사도들조차 알지 못하였지만 이 요한복음을 쓰고 있는 요한이나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사도들이 당시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7) 하셨던 대로 알게 되었고 오늘 우리가 당하는 어떤 삶이나 신앙의 과제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베드로처럼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에서 거절하는 것보다 수용하고 받아들인다면 반드시 후에는 감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을 받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의 명령대로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여 침례를 받아 죄 씻음을 받고 세상에서는 나그네일지라도 주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꼭 관련을 가지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주님의 피로 평생의 죄를 씻김 받았다고 할지라도 죄악 된 세상속에 살면서 수시로 범할 수 있는 죄를 자백함으로 늘 정결하고 깨끗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와 신앙의 사람들로 살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