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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3:12~20 2020-11-08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제자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최고의 이벤트이면서 오늘날의 이벤트와는 너무나 수준이 다른 기적을 보는 것보다도 더욱 놀랍고 분명한 섬김의 사건을 실행하시고 제자들에게 이 사건의 의미를 아는가 물으신다. 서로가 섬김을 받으려고만 애썼지 섬기려는 생각은 조금도 못했던 제자들은 사실 입이 닫힌 상황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으신 후에 하신 일의 의미를 아느냐고 묻고 계신다.

지난 주에도 말씀을 나누었지만 참으로 이 주님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겉으로 나타나는 겁대기만 흉내 내고 따라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섬김의 깊은 의미를 깨달어야만 한다. v17에 말씀하시는 것처럼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는 가르침이 중요한 이유는 많은 신앙의 행동을 너무나 맹목적으로 흉내내기 때문이다.

교회의 전통이기 때문에 강대상에서 선포된 말씀이기 때문에 행하노라고 말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명령하신 것들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따라 행하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참으로 치명적인 것이요 나중에 탄식할 일일 수도 있다. 그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행한 일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제자들에게 물으시고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묻고 계신다.

사람이나 지도자나 어떤 정치적, 철학적 종교적 이념을 따르는 것도 맹목적이기 쉽다. 때로는 어째서 모였는지도 모르고 소리지르고 난리를 피울 때도 있는 것이 성경에 까지도 나타나고 있으니 참 흔한 일인 것 같다. 사도행전19:23~ 에베소의 아데미 신상을 만드는 은장색들은 2시간 동안을 온 도시가 시끄럽도록 떠들고 난리를 치고 났지만 v32에 보면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는 기록을 봐도 그렇다.

우리 주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행하신 일들이나 말씀하신 비유들을 바른 의미를 모르면 지나치게 신비적으로 가거나 우리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당시의 제자들에게 물으신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는 질문은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도 반드시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하셨기 때문에 신앙의 부분부분들을 바로 이해하고 순종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믿음의 과제이다. 적어도 말씀과 진리를 회복하고 순종한다고 하는 우리들이 여기에도 솔선수범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가진다.



Ⅰ.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12~1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번 실습을 보이신 후에는 다시 스승의 자리로 돌아오셔서 사실적으로 가르치신 교훈을 확인하신다. 당시의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잔뜩 놀라고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조용히 다음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실습의 교육효과를 확인하시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문화를 막론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도록 가르치는 교훈은 너무나 당연하고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장 일반적인 이론을 깨고 스승으로서 제자들을 섬기는 일은 그것을 수용할 수 없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서는 금기시되어 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12) 모든 제자들의 발을 차별없이 씻고 닦으신 후에 당시의 제자들이 이해될 수 없는 자신이 행하신 가르침을 풀어 증거하시는 친절하심을 나타내셨다.

깊은 신앙의 사람들이라면 이 때 제자들이 이해될 수 없었던 주님의 헌신을 나중에 이해하였던 것처럼(7-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오늘 우리 역시 그것이 인위적이고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이 아니었다면 반드시 나중에는 진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12b) 심리학에서도 초기교육은 모방이라고 지난 시간에도 말했었다. 우리 시대의 논리를 따르자면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공경심에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사실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이는 모습조차 따라했다는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봐서 주님의 행동을 따라 해보려는 시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입장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12b) 물으시는 질문에 감히 답하지 못하고 묵묵히 다음 말씀을 기다리고 있는 제자들을 생각하게 한다. 거기에 연이어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13)라는 사실을 인정하시고 다음의 가르침으로 나아가신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14f)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속에서는 자신보다 우러러봐야 하는 높은 대상을 “주(κύριος)”라고 표현하고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대상을 역시 주(主)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예가 다메섹에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려고 가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울이 눈이 어두워진 체로 “주여 누구시니이까!(Τίς εἶ, κύριε?)” (9:5, 26:15)라고 부르는 모습 속에서 보는 것과 같다.

“선생(διδάσκαλος)”도 ‘박사, 주인, 선생’의 뜻으로 앞의 주와 동격의 개념이다. 이 내용은 거꾸로 표현하면 바울이 “가말리엘의 문하에서”(행22:3)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원문적인 의미를 이해하면 “가말리엘의 발밑에서(παρὰ τοὺς πόδας Γαμαλιήλ)”라는 내용을 보면 이해가 가능한 표현이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4b)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었다면 제자들끼리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너무나 쉬운 것이지만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먼지 묻은 발을 씻어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가려주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의미가 더 깊게 깔려 있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러한 내용을 마음에 두고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1~2)고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 평생의 허물과 죄를 자신의 피로 씻으셔서 깨끗케 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의 약함과 허물을 씻도록 도와주고 함께 감당하여 그리스도의 이 사랑의 법을 성취하라 시는 당부는 세월이 지났 어도 바뀌지 않았다.



Ⅱ.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5~17)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물으신 주님께서는 그런 세상과 다른 주님의 섬김의 법칙을 알고 행한다면 더욱 복이 된다고 가르치신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신앙의 논리조차도 일반적이고 사회적인 원리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소화되지 않고 행할 수 없는 것이 문제다. 남는 것은 언제나 “왜, 꼭 그래야 하느냐!”라고 되묻지만 사실 거기에 대한 답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이고 행하셨다는 단순한 이유가 있을 뿐이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5) 주님의 가르침이나 뜻을 이해할 수 없고 먼 교훈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 몸소 행하시고 가르치셨던 그대로만 따라 순종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핑계가 많고 이유가 많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것을 본받아 행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에,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과 명령이 현실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변명일 뿐이다.

오늘도 여전히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5)라는 모범은 바뀌지 않았다. 이 명령은 결코 관념적이지 않다. 주님께서 “행한 것”과 다만 그것이 우리에게 “행하게 하려” 보이신 “본”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16) 이 내용은 우리가 변명없이 순종해야 할 이유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제자가 훌륭하다고 해도 가르친 스승만 못하지만 이 주님의 명령을 행한다면 주님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중요한 말씀이다.

비슷한 표현을 마태복음10:24~25f에서 예수께서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라고 말씀하셨고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눅6:40)고 가르치신 바 있다.

섬김을 받아야 할 대상이 오히려 섬기는 것은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이기 때문에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7) 말씀하신다. 이 한 마디 속에 참된 복이 담겨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일반적인 종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알지 못하고 행하는 것이 샐 수 없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세상의 사람들이 만들고 신이라고 이름 붙인 말 못하고,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우상과 분명히 다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무지한 것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신다. 신앙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대로의 뜻을 이해하고 행한다면 참으로 기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선지자를 향하여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사56:10) 라고 탄식하신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기를 기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f) 라고 호세아는 격려하고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늘날도 믿음생활 한다고 하면서 어떤 신앙행위라고 하는 것들을 “왜, 그렇게 하느냐?” 물으면 ‘마음이 편해서, 누군가 신앙을 지도하는 사람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시고 말씀하신 것인가를 확인하지 않고 막연히 행하는 것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7) 말씀하신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것이 먼저이지만 ‘누가 성경에서 다 확인할 수 있겠는가, 또 전문적으로 신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우리)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라고 변명하지만 이것을 바로 분별하고 행하게 하시려고 오늘 우리 각자의 손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셨는데 그 성경을 읽는 것 조차도 잘 하지 않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본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7)는 말씀의 이해는 단순히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신 모습과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으로 승천하신 삶 전체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메시아 로서의 삶이 오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베들레헴 구유에 나신 후 기간이 되어 성결의식을 행하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 가셨을 때 시므온이라는 선지자가 이를 예언하였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눅2:34b)

예언 그대로 패하고 흥하는 표적은 다름이 아니라 주님의 그 희생의 삶이 오늘 나를 영원히 흥하게 할 수도 있고 패하게 할 수도 있는 바로 “이것을 알고 행하는”것과 그렇지 않는 이유에서의 차이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지구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표적인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적어도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7)는 신앙의 바른 이해는 오늘 나의 복과 저주의 간격이 된다는 대서 주님의 삶이 나의 삶의 이유와 원인으로 알고 살아서 천국과 영생을 누리는 …



Ⅲ.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도 믿음을 갖어라(18~20)

이제 앞의 v2에서 짧게 삽입되었던 가룟 유다의 그 안타까운 역할로 인하여 또 한번 제자들이 놀라는 일이 있겠지만 그 때도 믿음을 잃지 않게 하려고 미리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일러주신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18f) 하시는 데 이 말씀을 일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에 적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친히 택하신 사도들을 아신다는 말씀으로 6:70에서 이미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마10:1; 막3:13; 눅6:13)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18b) 이 말씀은 삭막한 세상의 삶에서 자신에게 악담하고 거짓을 말하고 수근거리는 비정한 가운데 있던 다윗의 형편에서 결국은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41:9) 라는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시는 것이다.

죄악 된 세상은 다 그렇다 치지만 자신이 신뢰하고 돌보아 주던 사람이 자신을 걷어차는 악행은 사실 더 비통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국 그런 일까지 당하셔야 했음은 결국 나(우리)의 죄 때문임을 더욱 황송하게 생각하게 된다.

더욱이 이런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제자들에게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19) 하심으로서 제자들의 믿음을 미리 단속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제자들은 적어도 메시아에게 이런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믿음을 지킬 것을 당부하시는 것이다.

사실 이 교훈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가르침이다. 한번 역사 속에 오셔서 구속(救贖)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평가는 당시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천차만별(千差萬別)이고 과학으로 분석해보니 어떻고, 시대적으로 판단해보니 어떻고,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을 실추시키는 이론은 문화가 발달할수록 더욱 공격적임을 본다.

그럴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나 이루신 죄인 구원의 역사는 의심할 필요가 없고 바뀔 수 없음을 확신해야만 한다. 심지어는 그를 섬기고 예배한다고 하는 교회들이 잘못되는 한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나 주님의 구원하심에 의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면서 다시 중요한 우리의 신앙적 자세를 도전해 주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20)

이 말씀을 사실 건전치 못한 신앙의 세계에서 악용되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을 거역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이 말씀을 빌어서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 것으로 악용하고 있는 모습들을 먼 곳이 아닌 우리 대한민국 안에서도 상당히 자주 보는 모습들이다.

물론 건전한 신앙적 가르침을 가지고 교훈 하는 사람의 이론이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믿음을 키우지 못하겠지만 이미 앞에서도 나눈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7:18)는 기준으로 본다면 구분은 가능할 것이다.

물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20)는 말씀은 부정적으로는 가룟 유다를 마음에 두고 하시는 말씀임이 일차적인 의미일 것이다. 자신을 파는 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파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파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두려운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들은 마태복음18:5의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막9:37; 눅9:48)라는 말씀과 더불어 이해할 수 있다. 그 사람보다는 그를 세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인정하고 대우한다면 그르지 않을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평생의 허물과 죄를 자신의 피로 씻으셔서 깨끗케 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의 약함과 허물을 씻도록 도와주고 함께 감당하여 그리스도의 이 사랑의 법을 성취하라 시는 당부는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주님의 십자가와 그의 전체 삶이 오늘 나를 영원히 흥하게 할 수도 있고 패하게 할 수도 있다는 바른 이해로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나의 삶의 이유와 원인으로 고백 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길 바란다.

앞으로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또 인생에 어떤 변화가 오더라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불변하는 나의 구세주임을 늘 확신하고 각오하는 삶이 되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