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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3:21~30 2020-11-15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주님 자신이 행하신 일의 의미를 물으시고 어쩔 줄 몰라 하고 민망해하는 제자들에게 당시의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일이 서로를 섬겨야 하는 모범이라고 가르치시는 희생과 사랑이 가득한 이 자리에 가장 착잡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오늘 읽은 한 마당에서 읽게 된다.

주님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기심이 인류구원을 위한 피 흘림의 제물로서 헌신이며 그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잃어지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이면서 특히 선택받아 함께 있었음에도 결국 버림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연민을 이 말씀에서 또한 강하게 느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22장의 임금님의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인류가 십자가아래 청함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잃어지는 영혼이 더 많음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긍휼의 부족함이 아니라 사람들의 죄성 때문이다.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후에 그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을 팔리라는 가득이나 주님의 충격적인 선언에 성미 급한 베드로는 요한으로 하여금 과연 그 엄청난 일을 행할 제자가 누구인가를 묻게 한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우리들처럼 가룟 유다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간접적으로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회계장부를 맡고 있는 가룟 유다에게 그것이 유월절 명절과 관련된 물건을 사거나 구제를 위한 지시로 오해하고 만다.

비록 제자에 의해 팔리시지만 그것 또한 구원을 위하여 어쩔 수 없는 말씀의 성취라는 이해에서 오히려 돈을 사랑하여 이런 일을 행하고 마는 가룟 유다에 대한 연민으로 그를 대하시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셨고, 이것은 단순히 당시의 가룟 유다 한 사람에 대한 연민만이 아니라 가룟 유다와 같은 상태로 가고 마는 많은 인류와 복음을 맛보고도 잃어지는 자들에게 안타까움 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Ⅰ. 예수 그리스도의 연민(21~22)

자신의 안위보다는 생명과 진리의 택함을 받았지만 택함을 거절하고 어두움의 하수인이 되어버리는 가룟 유다에 대한 안타까움이며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에도 그 초청을 헛되게 만드는 버려지는 자들에 대한 동일한 연민이다. 이것은 구원의 방법을 마련했음에도 이 귀한 기회를 잃어버리고 여전히 멸망으로 가는 긍휼에 풍성하신 인류를 향한 연민 즉, 불쌍히 여기심이다.

더러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면 왜, 가룟 유다에 의해 팔리도록 버려 두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뻔히 따먹을 줄 아시면서 선악과를 에덴에 두셨느냐?’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중 겟세마네 동산에 가룟 유다가 데리고 온 칼과 몽둥이로 무장한 군인들 중 한 종의 귀를 칼로 베어 버리는 베드로에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26:53~54) 말씀하시면서 그 귀를 붙여 낫게 하신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인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거스를 수 없고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야 말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첫째 목적이기 때문이며 두번째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동일하게 가지고 난 사람들의 인격을 존중하시고 다만 그들의 성향을 따라 사용하시는 것일 뿐이다.

이는 절대로 강제적이거나 억지로 구원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선택이 어떠하든지 그들의 의지를 용납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짐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16:4) 이런 내용들이 어떤 고정관념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한다면 생각해 볼 여지가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주님께도 이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21f) 자신의 제자들에게 알게 할 시간이 되기는 하였지만 심령의 괴로움은 전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룟 유다를 두고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21b)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제자들에게는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말씀이었을 것이다.

아직은 인간적인 제자들은 이 유월절을 함께 먹기 전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12:23) 라고 하신 말씀이나 유월절을 먹을 곳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도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마26:18) 라고 하셨기 때문에 어느때 보다도 그들의 마음이 부풀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는데 진실로 진실로를 강조하시면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21b)는 말씀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미 이런 일을 마음에 두고 있던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들은 그야말로 혼비백산(魂飛魄散), 놀라서 넋을 잃을 지경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22)는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우리 주님의 마음의 순수성을 여기서도 본다. 우리 같으면 이런 사실을 말한다면 별 생각없이 터뜨리듯 말하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령에 괴로워”하셨다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이 귀한 주님의 자세가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난한 심령이다.



Ⅱ. 두 제자의 질문(23~26)

잃어질 영혼마져 긍휼로 대하시는 주님의 자세와는 다른 모습을 제자들에게서 본다. 말을 내는 것 자체를 힘 겨워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급한 베드로였지만 자신이 직접 묻지 못하고 요한을 머리 짓으로 부추기는 모습도 그렇고 지극히 평범한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로 표현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23) 이 요한복음을 끝내면서 다시 한번 베드로와의 주님께 대한 질문과 함께 이 모습을 묘사한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요21:20)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중요한 자리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같이 데리고 다니셨지만 항상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는 요한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성경에 나타나는 상황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주님 가장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뜻이나 의향을 가장 분명하게 빨리 알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런 이유에서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24)라는 묘사를 하고 있다.

‘왜, 성미 급한 베드로가 직접 묻지 못하고 요한으로 하여금 예수님께 말씀 하시도록 머리 짓을 했을까?’ 그것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빨리 알고 싶은 베드로는 주님 가까이에 있는 요한으로 하여금 말씀하시게 하려는 시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 지나치게 유추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이 아니라도 머리 속에 그려진다.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25) 베드로의 머리 짓을 알아차린 요한은 머뭇거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묻고 있는데 그 모양이 좀더 진지하다.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유대인들의 식사하는 모습과 더불어 상상해 볼 수 있겠지만 요한(여호와는 은혜롭게 주는 분) 자신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달리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가장 아픈 사실을 말씀하시게 하기 때문에 더욱 가까이 그것도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묻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모든 인류의 죄인을 품고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지실 주님의 마음에 기대어 이 안타까운 역할을 할 제자가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요한의 질문에 조용히 요한만 듣도록 말씀을 하신 것 같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26f) 만약에 이 말씀을 모든 제자들이 다 들었다면 마지막 부분의 오해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가룟 유다의 역할을 알고 계셨고 가끔 제자들에게도 이름은 거론하지 않으셨지만 말씀하신 바 있다. 베세다의 언덕위에서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굶주린 군중들을 먹이신 후에도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6:70~71)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26b) 이스라엘 속에서 잔치를 하는 주인이 떡을 포도즙에 찍어 손님에게 주는 일은 그 손님을 접대하는 표시였다고 하고,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이삭을 주워 시어머니를 모시며 공경하던 룻에게 비록 추수하는 밭에서 이긴 하지만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룻2:14f) 모습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가룟 유다는 입맞춤으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팔았지만[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눅22:4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배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최고의 대우로 유다를 예우(禮遇)하며 회개를 기다렸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베드로의 머리 짓으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팔 사람이 가룟 유다였음을 알게 되었지만 제자들 속에서는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조용히 이 일이 묻혀지는 모습을 본다. 이것은 주님은 어떤 사람이건 하나님께는 응분의 대가를 받을 수밖에 없겠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그 인격이 어려움 당하지 않도록 하신 배려로 역시 오늘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모범이다.

다윗은 시편86:15에서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바울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엡2:4) 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 그대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모습을 닮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살기를…



Ⅲ.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가룟 유다(27~30)

이 제목은 쉽게 생각하는 것 보다는 안타까움을 가지는 내용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빛과 함께 빛 속에 있던 사람이 다시 어두움으로 들어가는 모습의 상징이 되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빛을 버리고 어두움으로 가게 되는가! 그것은 항상 보이는 세상의 이권을 위해서임을 이 가룟 유다에게서 볼 수 있다.

이미 앞에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하지 않았던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하셨고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12:35b~36f) 말씀하심으로 생명의 빛에 거할 것을 당부하시고 어둠에 붙잡히면 갈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빛을 믿으라 즉, 빛에 거하라 증거하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가룟 유다는 주님의 말씀과는 반대의 모습으로 가고 있는 것이고 빛 속에 있다가 어둠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당시의 가룟 유다 뿐만 아니라 이 역사 속에 계속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도 히브리서의 권면을 들을 필요가 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4~6) 이 말씀의 대표적인 모형이 바로 가룟 유다였고 어둠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운명 역시 가룟 유다와 같은 전철(前轍)을 밟을 것이다.

역시 요한 사도만이 주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이지만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말씀하시고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라는 v26의 말씀에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지는 내용이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27f)는 독특한 표현을 본다.

이미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의 성품을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12:6)고 말한 바 있으므로 착하고 선한 사람이었는데 주님으로부터 떡조각을 받고 사탄이 그 속에 들어 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최고의 예우를 받으면서도 그 예수님을 팔 생각을 보다 구체적으로 실행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제 완전히 사탄의 도구가 되어 있는 가룟 유다에게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27b)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 역시 악을 격려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의 순간이 되겠지만 이루어질 일이기 때문에 순리대로 진행하라는 사탄을 향한 허락이다.

그러나 문제는 가룟 유다나 또는 이 일을 이미 알고 있는 사도 요한이 문제가 아니라 조용한 침묵 속에 겉으로 나타나는 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도들이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신 주님의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팔려고 하는 참담한 일이었음에도 전혀 본래의 의미를 알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28)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룟 유다에게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라!’시는 명령은 분명한데 그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예수님을 팔 자가 누구인지 요한에게 물어보라고 했던 베드로 조차도 알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상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자들은 이제부터는 자신들의 짐작을 나타내고 있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29f) 제자들 중에 재정을 맡고 있는 가룟 유다였기 때문에 이 유월절에 무엇을 사라고 하셨을 것이라고 가정(假定)하고 그 살 것을 재촉하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부류들이었다.

또 다른 한 부류는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29b)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돈이 모으는 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돕고 있었던 것들을 짐작해 볼 수 있는데 특히 명절에 소외된 사람들에게 필요를 주었던 것을 시행하라고 미리 가룟 유다에게 명령하신 것을 재촉하시는 것으로 오해하는 제자들이다.

이 제자들의 생각은 사실과는 너무나 다른 가정들임을 볼 수 있는데 우리도 사실을 알지 못하면 나올 수 있는 생각들이 이렇고 그것은 언제 누구에게나 옳지 못한 것으로 특히,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함으로 나름대로 상상하고 가정(假定)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럼으로 이 제자들처럼 상상하고 가정하는 대신에 그것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영적인 일에서뿐만 아라 우리 일상에서도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을 바로 알지 못하고 상상하는 일은 하지 않을수록 더 좋은 것이다. 어떤 것이든지 사실을 알지 못하고 상상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마지막 말씀은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30)는 표현인데 이것은 또 하나의 중요한 상징이다. 사실 가룟 유다는 저녁 먹던 자리에서 나갔으니 밤인 것은 당연하지만 앞에서 이미 말했던 대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등지고 나갔으니 어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 속에는 아름다운 믿음의 본을 보이는 사람들이 샛별처럼 빛나고 있는가 하면 이렇게 가룟 유다처럼 비극의 모델도 상당히 많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는 비극적인 모습에서 하나님을 향해 돌이킴으로 빛으로 돌아오는 아름다운 주인공들 또한 있다.

이런 입장에서 성경은 오늘 신앙하는 우리 모두의 거울이고(고전10:6, 11) 그 거울을 우리는 항상 바르게 비쳐보도록 맑게 닦을 필요가 있다. 성경에 맑게 자신을 비쳐 보기 위해서 거울을 깨끗이 한다는 의미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영혼을 깨끗이 보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깨끗하지만 나 자신의 죄성(罪性)이 그것을 밝게 볼 수 없게 만들 수 있다는 데서 그렇다.

오늘 이러한 경계를 받는 우리들은 한사람도 가룟 유다의 전철을 밟는 사람은 없기를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담하게 하고 마음 아프시게 해 드려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긍휼이 풍성하시지만 그를 등지고 어둠으로 나가는 사람은 은혜를 지속적으로 누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