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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3:31~38 2020-11-22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많은 군중들을 향한 가르침은 마무리되고 이제 주님의 일을 앞으로 감당해야할 제자들에게 좀더 깊은 진리와 자신의 자리를 바꿔 오실 성령님의 역할과 함께 하실 귀중한 교훈을 16장에까지 제자들과 좀 더 가까이에서 가르치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제자들을 준비시킨 후에 자신은 인류 구원을 위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실 것을 거듭 말씀하시기도 하신다.

당장의 영광을 기대하고 있던 제자들에게는 이해되지 못하고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일들이지만 때를 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찬찬히 그들을 이해시키심을 본다.

이제 가룟 유다는 자기 갈 길을 떠나고 나머지 열한 제자들과 더불어 자신이 떠나실 것과 그 빈자리를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가르치실 것 등등의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차근차근 말씀하시기 시작하신다.

무엇보다도 오늘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지 못할 형편에서의 제자들의 사역과 섬김의 중심을 제시하시는 내용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이 제자들을 떠나시는 과정에서 주시는 새 계명이라고까지 말씀하시고 그것이 실행이 될 때 비로소 사람들이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인정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자신이 가는 곳에 제자들이 올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의 또 한번 성미급한 고백이 나오고 마는데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가시는 곳에 가겠노라고 말씀드리지만 그 장담이 얼마나 연약한 것임을 말씀하시기를 오늘 날이 완전히 세기 전에 세 번씩이나 부인할 것이라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아직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떠나신다는 말이 마치 어린아이에게서 부모를 떠나보내는 것과 일반이었다. 제자들 대부분이 다른 직업을 갖어 보지 못한 갈릴리의 어부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주님없이 산다는 것 자체가 사실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는 죽는 한이 있어도 주님 가시는 곳에 함께 가겠노라고 떼써보지만 그러한 인간적인 열정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경계로 그 밤이 새기전에 세 번씩이나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안타까워하신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은 사람의 각오가 믿음에 있어서는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가를 가르치시는 것이다.



Ⅰ. 독생자의 영광(31~32)

가룟 유다가 나간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일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이미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2) 라고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은 무엇 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구체적인 시작인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이 일을 두고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31) 라고 선언하신다. 우리는 행복하고 존귀를 취하는 일이 영광 받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 물론 그런 일들이 영광을 받는 것은 맞지만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은 적어도 하나님의 인류 구원을 이룸을 영광으로 이해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의 영광이 세상의 영광과 가장 다른 부분이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사람들 앞에 잘되고 우러러볼 수 있는 일들이 영광이라고 만 생각하였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고난 당하는 것까지 영광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자신의 대속의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31) 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자신에게 만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영광을 받고 계시다고 말씀하심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역사 속에 순교하면서까지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선포했던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이와 같은 판단과 이해에서 기꺼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처음 교회에 나타나는 대로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는 모습이 그것이다.

나중 사도의 반열에 함께 한 바울도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고 세상의 논리와는 전혀 다른 이치를 자랑하고 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31) 이것을 단순히 설명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창세 이후 타락한 인류 구원의 회복을 위해 준비해 오시고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선포해 오신 사실이 이루어져서 사람들의 멸망이 하나님의 실수인양 오해되었던 것들이 회복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는 우리의 생각을 세상의 이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논리로 바꿀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당연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받는 고난은 부끄러움이나 수치가 아니라 영광임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덧붙여 주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32) 이 말씀은 자주 다루어 왔던 말씀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반사되는 영광을 입을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이 비로소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영광이라고 증거했었다.

사실, 오늘날의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영광의 모습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영광이 아니라 영광 비슷한 것 즉, 세상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착각하고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나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반드시 따르고 본받아야 할 자세는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광의 보좌를 버리면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희생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릴 때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입혀 주셨던 그런 영광의 모습을 회복해야만 한다.

영광은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분명히 다르다. 베드로 사도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4~25) 하였다.

그런가 하면 바울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롬8:18) 고백하는데 조금이라도 하들의 영광을 맛본 사람이라야 베드로와 같이 바울과 같이 자신 있게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하는 천국의 백성들이라면 풀과 같이 말라버릴 순간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세토록 있을 영광을 구하는데 생명을 다 바쳐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순종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드릴 때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교회와 사람들에게 영광을 입혀 주실 것이다. 믿으시기를 …



Ⅱ. 서로 사랑하라! (33~35)

잠시동안의 이별과 그 떨어져 있는 기간 동안 제자들의 힘써야 할 자세를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구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야 하겠지만 그 귀중한 뜻을 성취하신 후에는 하나님 우편의 영광에 오르실 것을 v32에 연이어 말씀하신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33ff) 십자가를 지시기까지는 물론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에 대한 약속이지만 그 기간은 그리 오래지는 못할 것임은 이 일 후에 진행되는 사건들을 볼 때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33) 예수께서 장막절에 이미 유대인들에게 선언하셨던 사실을 다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요7:33~34, 36)

이 말씀 때문에 물론 유대인들조차도 오해를 한 바 있었다.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35) 이제 같은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시는 것은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제자들이 주님을 찾는 것보다 중요한 것을 당부하시는 내용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34f) 하신 말씀이다. 중요한 것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하신 것으로 이것은 이미 주어진 옛 계명을 전제로 하는 말씀이다.

잠시 그 차이를 생각해보면 옛 언약은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십계명만 봐도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외는 모두 “~말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의 죄성에 근거한 언약으로 복음이 주어지기 전의 임시 법이지만 새언약은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언약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7:18~19) 결국 예전에 주어졌던 계명은 폐하여 질 것이고 더 좋은 소망이 생겨서 그것으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증거한다.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가를 다시 한번 증거하는데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히8:7~8) 이 말씀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첫 언약은 사람에 기초된 흠이 많은 것이었고 때가 되면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새 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미 예언한 바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거기에 보충하기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8:13) 하나님께 속한 것은 절대로 낡아지고 쇠할 수 없는 영원한 것인 반면에 사람에 속한 땅에 속한 것만이 낡아지고 썩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34f) 하신 것인데 이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법이요 마귀 사탄은 물론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조차 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는 바울의 고백을 봐도 그렇다.

이런 이유에서의 약속하시는 사랑의 모범은 춘향전도 심청전도 아니요 홍길동전도 아닌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b)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사랑으로 라는 것이다.

결국 그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고 이것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으로 이 요한복음의 핵심이 되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의 백성들은 당연히 빛에 거하기 때문에 나타난 이 사랑을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과거 어두움에 속했을 때의 습관이 어두움을 향한 부정적인 과거의 언약을 가지고 판단하고 생각하는 안타까움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완성된 새언약의 복음속에서도 너무나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 약속은 세상 속에도 놀라운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5) 세상적인 기준이 아닌 하늘의 가치와 기준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그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세상의 기준에서 신앙하고 종교생활을 하는 오늘의 시대에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도전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고 복음을 증거할 때 사람들은 자연히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임을 자연적으로 알게 될 것이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Ⅲ. 홀로 가셔야만 하는 고독한 길(36~38)

유월절 만찬을 하시는 중에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으시고 난 후에 잠시 헤어져야 한다면서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33)는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던 베드로는 그의 성격상 그냥 있을 사람이 아니다.

주님을 팔자가 누구인지는 요한을 통해서 여쭈었지만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에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36f)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는 영화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임을 본다.

여기에 대해 주님께서는 분명한 답변을 주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36b) 주님께서 가시는 이 길을 지금은 함께 갈 수 없지만 나중에는 따라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의 길은 오로지 주님만이 가실 수 있는 길이지만 나중 주님께서 이루어 놓은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오셨을 때 주님과 같은 희생을 할 것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셨고 이 예언 역시 이루어진 것으로 역사가들은 전한다.

그러나 지금은 올 수 없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만류에도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37f)라고 항의하듯 여기에서도 과거의 v7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원리를 다시 말씀하시는 것을 본다.

이런 이치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베드로는 다시 한번 어설픈 장담을 하고 만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37b) 실제로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완성하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께서 오셨을 때와 그러기 전의 인간적인 제자들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베드로의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사실 요즘은 믿음에 있어서 이런 용기를 가진 사람도 드물지만 아무리 감정이 격하고 열정에 불타고 의지가 앞서도 영적인 일은 위에서부터 허락하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사람의 판단에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앞서서 장담하는 것은 이래서 옳지 못하다.

신앙의 사람들도 더러 ‘까짓 것 목숨 버리(순교하)면 안될 일이 있겠어!’라고 결심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영적인 시간은 사람의 열심이나 충성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대해 주님께서는 또 다시 경계를 주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38f) 아직 성령에 의하여 움직여지지 못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베드로의 용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아셨기 때문에 이렇게 물으신 것이다.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진실한 예언을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8b) 안타깝게도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를 사용하셨다.

이 말씀은 보다 분명히 이해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다고, 오늘 이 밤이 새기전에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오늘 우리도 나 자신의 용기에 기초하여 무엇을 해 보겠다고 큰소리 친다면 주님께서는 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다. 그것도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러실 것이다.

인류 구원을 위한 구속의 십자가는 죄를 진 사람은 누구도 불가능하고 오로지 죄 없이 흠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능하고 또 어느 누구도 함께할 수 없고 도울 수도 없는 하나님의 보내신 독생자 홀로 감당해야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이었다.

이제 완성된 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役事)에는 누구든지 성령과 더불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사람 스스로의 각오와 결심으로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지만 또 다른 보혜사로 오신 성령의 능력과 의지를 힘입어 감당할 수 있게 하셨다. 그렇게 초청된 사람들이 바로 우리며 이제 베드로처럼 목숨을 버리고 따르겠다는 각오만 가진다면 성령께서 친히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세상 속에서 영광되는 것만이 아니라 고난을 받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려고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세상의 보이는 영광은 쉬이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세세토록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별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음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 된 것을 알게 될 것이라 하셨다. 이 계명은 새 계명이며 영원까지 연결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덕목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나 일은 우리 사람의 감정이나 의지, 그리고 용기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적으로 장담하고 큰소리 치며 설칠 때 주님으로부터 책망받을 수 있다. 때로는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가 앞설 때 따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묵묵히 순종하려 한다면 위에서부터 허락하실 때 더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