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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13:14~19 2023-01-01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지난 주에 이어 교회 안에서 신앙의 실제적인 삶에 교훈을 주고 있는 것으로 저자의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마지막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OT에서는 수 없는 제사가 짐승을 제물로 드려졌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로 모든 제사는 완료되었다.

이제 더 이상의 제물은 없고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한 것처럼 이제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영광이 되어야 함을 바울은 당부한 바 있다. 오늘 본문의 제사도 다르지 않음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바람직한 신앙적 삶이 되기 위해서는 바른 진리로 인도하는 믿음의 지도자들을 잘 순종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왜, 그런 사람들에게 복종이라도 해야 하는가를 지적하는 이유도 가르침을 주고 있다.

신앙에 있어서 기도는 언제나 강조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기도의 대상도 거론하고 있다. 선한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선한 양심을 지켜갈 것은 물론이고 믿음의 지도를 위하여 움직임까지도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함을 듣는다.

이러한 교훈들은 모두 일꾼과 지체 상호간의 좀더 긴밀한 관계를 위한 당부인 것으로도 들린다.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제사 드리는 자세는 물론이고 서로의 유익을 위하고 기도를 요청하는 것들이 일상이 되어야 함을 기대하는 모습으로 역시 신앙의 성숙을 목표로 하는 실제적 믿음의 삶을 위한 것이다.



Ⅰ. 그리스도인들의 제사(14~16)

맨 첫 부분은 지난 시간에 연결되어지는 내용이다.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서”(12~13) 라고 권면한 것에 붙여지는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들린다.

사실 이 세상 어디에도 또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이걸 모든 사람은 다 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가장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 사실을 또한 너무나 자주 잊어버린다. 한 해를 보내고 맞으면서 특히 이러한 부분에 민감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신앙인들이 이 1월달에는 대부분 가장 경건한 것 같다. 올해는 이것도 시작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믿음생활의 도전을 많이 계획하고 [성경읽기, 매일 암송 등등] 시도하다가도 불과 몇 달이 되지 못하여 이러한 것들에 너무 둔감 해져 버린다.

그래서 첫 달에는 가장 순결하고 열심 있는 신앙을 하다가 10월쯤 되면 죄책감에 낙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 역시 나는 안되!’ 라고 절망하면서 그렇게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음 해에는 어김없이 새로운 각오와 결단을 하게 된다.

이런 입장에서 모두가 1월달 같은 신앙을 했으면 좋겠다. 또 그것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비록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결심을 무뎌진다 할지라도 다시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가능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14) 세상의 부요하고 권력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있는 도성 안에도 혹은 그들로 부터 버려지고 공평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는 성밖에도 이 세상에는 결코 영구한 도성은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따라 나간다면 이 영원한 것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장차 이렇게 산 사람들을 위하여 창세전부터 하늘에 준비해 두신 영원한 영광이 장차 주어지게 될 것이다.

이왕에 여기 어두움과 죄가 지배하는 이세상에 영구한 거주지나 마음 둘 데가 없는 것을 안다면 거쳐갈 이 세상에 너무 많은 것을 쌓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께서 오시거나 부르시면 홀가분하게 가볍게 떠날 수 있도록 장차 올 영원한 것을 찾자.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14) 이것이 모두 믿음생활 하는 이유이다. 장차 올 영원한 것을 찾는다면 이렇게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들을 위해서 애쓰는 것보다 믿음생활이 못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떤 사원이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다가 만약에 경영주가 보게 된다면 대단히 행복할 것이다. 하물며 우리가 주님을 위해 진실하게 섬기는 것을 주님께서 보고 계심을 의식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다.

장차 올 영원한 것을 찾는 사람이라면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당연히 기다리는 삶이 될 것이다. 만약에 주님께서 지금 재림하신다면 ‘마라나타!’로 맞을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은 안됩니다!’라고 준비되지 못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야만 할 것이다.

누가복음12장에는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36~37)는 기록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사모하는 준비된 신앙의 사람들은 이 말씀처럼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는 엄청난 약속을 누릴 것이다. 이 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15f) 바로 앞의 v12에서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인류를 위한 영원한 속죄제로 제사를 완성하셨다면 그 은혜로 죄사함 받은 성도들이 제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제사의 제물은 항상 찬송의 제사를 드리게 되는데 은혜도 영광도 찬양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통로는 역시 ‘예수로 말미암아’이다. 같은 가르침은 에베소서5:19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당부하고 있다.

역시 바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b)라고 세상과 다른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을 권면하였다.

성전에서 주로 찬양을 드렸던 아삽도 같은 당부를 주고 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시50:14f)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시50:23)라는 귀중한 우리의 삶의 자세와 거기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5b) 사실적 신앙적 고백 그대로이다. OT의 선지자이지만 호세아는 이미 짐승의 제사가 폐해질 것을 마음에 두고 이르기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호14:2)라는 증거를 주고 있다.

OT에서도 흔하지는 않지만 이런 고백을 드리는 부분들이 있다. 다윗이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시34:1) 63:5b에는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라고 찬양을 드린다. 하나님은 항상 이렇게 찬양의 제사를 기뻐 받으심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5b)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그 이름을 귀하게 다룰 것을 당부하셨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3:15b)

그리고 적어도 모든 계명의 기본인 10계명에서부터 이를 명령하셨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20:7)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역시 귀하신 이름, 나를 구원하신 존귀한 이름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하는 것은 모든 영화로운 자리에서 나의 나 됨이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 덕택이요, 때문이라고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OT의 모든 동물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에서 완성되고 OT의 제사장들이 아닌 오직 우리의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입술로 드려지는 제사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입술의 찬양의 제사는 당연히 옆으로 사람들에게 베풂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16f) 복음 속의 성도들이 드리는 제사의 연장은 사람에 대한 선행과 나눠줌이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는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우선되는 모습이다.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16b) 하나님께서는 격식에 따라 순서대로만 드려지는 예배를 원하지 않으신다. 예배와 삶이 다르지 않은 영적인 삶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나의 삶이 변화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감격과 고백으로 생활에 와서도 그 제사가 삶으로 연결되는 살아 있는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 받으신다.

어린아이 일지라도, 아니 애완 동물들 조차도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알아 차리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물며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야 우리의 예배와 삶을 얼마나 잘 아시겠는가!

자신의 생명의 제사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나를 나 되게 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뻐하시는 찬미와 삶의 제사를 올 한 해는 물론이고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각자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드리는…



Ⅱ. 지도자에 대한 자세(17)

앞의 v7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고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의 삶을 본받으라 당부한 저자는 이제 현재의 삶에서도 진리를 따라 신앙을 지도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섬기는 것에 감사를 갖게 하라고 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f) 앞에서 진리를 떠나는 배교에 경계를 준 바 있지만(10:26~31, 12:25~29) 결국 진리에 헌신하는 지도자들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흔들리고 그릇 갈 수 있기 때문에 인도하는 자들에게도 확신을 가지고 따를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 당부는 사뭇 지나칠 정도로 들린다. “순종하고 복종하라” 마치 하나님께 대한 자세와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는 기쁘게 순종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순종이 안되면 복종이라도 해야 구원 얻을 수 있기 때문인 것과 같다.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fm) 이것은 적어도 순종하고 복종해야 할 이유이다. 지체들의 아픔이나 허물을 마치 자신의 것과 같이 아파하고 회개하는 것이 참된 영혼의 인도자들이다.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bm) 신앙을 인도하는 자의 즐거움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그 가르침에 순종하고 순종이 안될 때는 복종 즉, 억지로라도 따름으로 그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적인 변화를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도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6:6) 모든 좋은 것이란 결코 물질이나 삶의 환경에 국한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물질이 넉넉하고 편해도 가르침을 받는 지체들의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면 그것보다 더한 안타까움은 없을 것이다.

결국 그렇게 되지 못할 때 지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식하며 최선을 다했다면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b) 인도를 받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없을 것이라는 것으로도 사실 진실된 하나님의 일꾼들은 안타까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하는데 유익을 끼치지 못한다면 절망감을 가질 수도 있다.



Ⅲ. 서로가 기도의 대상(18~19)

영적인 관계속에 마지막 부탁은 항상 기도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복음 속에서의 교제이다. 얼굴을 서로 볼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기도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만나고 협력하는 것은 역시 복음 속에서만 가능한 신령한 교제이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18f) 이 세상에 기도가 필요 없는 사람은 적어도 역사 속에 없었다.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의 십자가 사역을 앞두고 힘없이 흔들리는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들 자신들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당부하시는 것을 본다(마26:36~44 공관복음).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18m) 이것은 바울의 서신들에서 자주 보는 내용과 같다. 대표적인 내용이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6:18~19)라는 요청이다.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살전5:25; 살후3:1) 이렇게 기도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다른 교회와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고백함을 듣는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골1:3, 9; 롬15:30; 빌1:9)

신앙 속에 기도만이 자신과 상대와 하나님을 튼튼히 연결하는 삼겹줄이다. 지혜의 사람 솔로몬은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2)는 증거를 듣는다. 이것은 기도의 교제이서도 진리이다.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18b) 이것이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자신감이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행23:1) 했는데 헬라어 본문으로 이해하기는 같은 단어(καλός)가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ἀγαθός) 본문과 같은 “선한 양심”이다.

NT에 “양심”은 여러 곳에 사용되지만 우리 개역개정으로 “선한 양심”(딤전1:5; 벧전3:21)에도 나타나고 “착한 양심”(딤전1:19) “청결한 양심”(딤후1:3) “깨끗한 양심”(딤전3:9)이 나타나고 디모데전서4:2에는 “화인 맞은 양심”이 거론되고 이 히브리서10:22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제사로 말미암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난다고 증거한바 있다.

결국 이 모든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동물과 다르게 사람에게 주신 양심의 잘 못된 사용과 바른 역할의 회복이 복음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서신을 기록하고 있는 저자도 히브리 출신의 신앙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의 피 흘리심의 희생과 그것을 받아 드리고 순종하여 회복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당하게 요청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베드로 사도도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6) 하여 상대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욕하고 비방하더라도 선한 양심을 가졌다면 오히려 그들 자신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격려하고 있다.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19) 마지막으로 좀더 직접적인 기도의 요청을 하고 있다. 이 저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역시 히브리 출신의 그리스도인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믿음의 끈끈한 삼각관계(당사자와 상대와 하나님)는 비록 떨어져 있어도 기도로 만나고 편지뿐만 아니라 육신으로도 그리워하는 관계여야 하는 것을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이1:12; 요삼1:14)는 요한 사도의 바램에서도 볼 수 있다.

바울 역시 디모데에게 개인적으로도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딤전3:14)이라는 표현으로도 확인한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은 새것도 영원한 것도 없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존재로 창조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과 도성을 약속하시고 아들의 십자가의 희생의 제단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러나 그 제사는 더 이상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한번으로 드려진 영원한 제사이며 이러한 희생을 고백하고 찬양하며 옆으로는 선을 행하고 나눠주는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린다.

이러한 제사를 계속하며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과 복종을 드리듯 신앙의 인도자들에게도 순종과 복종과 즐거움으로 이 일을 감당하게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선한 양심을 회복한 신앙의 가족들은 서로 기도하며 늘 만남을 소망하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며 기대하는 관계를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는 것처럼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