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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13:20~25 2023-01-08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선택된 언약의 이스라엘 백성으로 난 성도들에게 그 선택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구원이라는 사실을 때로는 강하게 또 그리고 잔잔하게 OT과 복음을 대조하며 질책하고 타이르던 저자는 이제 주변적인 당부까지 한 후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축복한다.

이 히브리서를 시작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의 주권과 영광을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지만 마치 신앙고백처럼 기도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를 소개하고 찬양한다. 그 놀라운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죄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신 죄의 사람과 화평을 이루심으로 마침내는 모든 창조세계와 더불어 하나님께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N, OT 성경을 비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와 효력을 증거하는 대단히 논리적인 신앙의 선언을 펼쳤음에도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고 고백하는 요한의 표현처럼 이것은 간단히 쓴 것이라는 말과 함께 사사로운 디모데의 이야기까지 나타나고 있다.

비록 저자가 자신을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바울의 서신들과 너무나 비슷한 형식으로 마지막에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문안을 나누는 것도 다르지 않다. 특히 디모데의 개인적인 관계와 이런 형식 때문에 이 히브리서를 바울이 기록했다고 보는 주경학자들이 많은 것 같다.

바울 서신이 아니면서 신구약을 꿰뚫는 이런 신앙적 체계를 다루고 있는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도 분명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임에 틀림이 없다. 이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더욱 그런 확신으로 감사 찬양을 드리게 된다. 오늘은 결론을 주지 않겠다.



Ⅰ. 평강의 하나님께 영원함 영광을(20~21)

구원의 역사를 인한 어떤 사건이건 글이건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한다. 바울 사도 역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이방인을 복음 속에 접붙이신 신기하고 놀라운 역사를 증거한 다음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이러고 감격으로 찬양한다.

지금까지 논했던 OT과 NT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로 모든 언약이 이루어 진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 계속되어 왔지만 신앙의 체계에 있어서는 바울의 서신들처럼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지는 못했다.

또 이 히브리서가 비교적 OT을 많이 다루고 있지만 오늘의 내용은 OT에 나타나지 않은 표현들도 더러 등장하고 있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의 완성으로 이해가 가능한 부분들이다.

그러함에도 여기 기도와 같은 내용 속에 신앙의 체계가 정리되고 있는 내용을 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 부분을 다시 정리해 보는 것도 이 히브리서를 마무리하는 입장에서 뜻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평강의 하나님이(신앙의 대상) → 양들의 큰 목자 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론) → 영원한 언약의 피로(속죄론) →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죽음과 부활) →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성도의 성결과 영광)”으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20) 이 구절의 배경은 “백성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 이르되 백성과 양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어디 계시냐 그들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사63:11)는 말씀이다.

홍해에서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올라오게 한 사실을 회상하면서 온 인류를 역시 죄악의 홍수 같은 세상에서 이끌어 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이사야의 증거를 확인하는 것으로 들린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20f) 어쩌면 우리와 가장 가까운 감정을 가지게 하면서도 OT의 다른 대제사장들과 비교 불가능한 표현이다. 이미 4:14f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10:21) 라는 표현을 본 바 있다.

사실 대제사장이라는 직분 자체가 큰 직책인데 여기다가 [큰]이라는 형용사를 더 함으로서 OT의 많은 대제사장들과 차별화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육신으로 계실 때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라고 선언되고 신앙적 고백은 물론 베드로 사도의 글에도 나타나고 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2:25)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친히 우리를 위하여 언약의 피를 흘리심으로 양들의 큰 목자 되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영원한 언약의 피로…”(20m)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에서 “영원한 언약”은 하나님께서 홍수로 악한 세상을 멸하신 후에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창9:16)신 말씀에서 최초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는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영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겔37:26)라고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둘 이었던 이스라엘과 유다가 메시야 왕국으로 하나가 되리라는 예언과 함께 OT에 “영원한 언약”은 모두 16회 나타난다.

그럼에도, “영원한 언약의 피”는 N, OT 성경 가운데 오늘 읽은 본문 외에는 볼 수가 없지만 “영원한 언약의 피”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영원한”이란 수식어는 사실 길어야 백 년을 살고 가는 사람들의 언어가 아니다. 헤아릴 수 없는 역사를 거치는 상황도 모든 시간을 현재로 보시는 창조주 이신 하나님께나 사용이 가능한 표현일 뿐이다.

“언약의 피” 수없이 사람들의 죄를 해결 받기 위해 뿌려진 짐승 피가 명령되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방법을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데서 “언약의 피”(출24:8; 슥9:11)이지만 영원한 언약의 피는 될 수 없었다.

결국 “언약의 피”가 영원으로 수식되게 된 것은 영원을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영원한 언약의 피”라는 비로소 새로운 은혜의 역사와 제한 없는 계속 속죄가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언약의 관계이다. 국가와 국민과의 약속이 있고 가까이는 부모와 자식관계나 부부의 관계도 언약의 관계로 평생의 언약이다. 또 이 언약의 관계는 반드시 서로가 약속을 지키는 것으로 유지되고. 어느 한편이라도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언약을 지키는 쪽이 피해자가 되는 것도 일반적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지만 결국 그 언약을 하나님께서 지키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므로 진정한 언약의 피해자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 이셨음을 이해할 수 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20b) 바울이 기록한 서신들에 는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당히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특징중의 하나는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서신에서 유일하게 그것도 간접적인 표현으로 부활에 대해 거론하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이라는 이 표현이라는 데 무게가 있다. 그리고 이 역사를 이룬 하나님은 역시 “평강의 하나님”시라는 것이다.

세상의 여기 저기에 사람들이 위하는 신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들은 생명도 없고 아무 역할도 못할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룻의 이야기가 나오는 모압에서 몰렉(몰록)에게는 어린아이를 불에 태워 바치게 하는 악한 신들도 있다.

선교여행 중에 인도의 테레사(Teresa)가 있었다는 콜카타(Kolkata, 켈커타)를 거쳐가게 되었는데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검은 피부에 혀를 길게 내밀고 손에는 칼을 쥔 여인 ‘칼리’는 죽음과 파괴의 여신이다. 그 신전에도 향을 피우려고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어 주신 하나님은 그렇게 무자비한 분이 아니라 “평강의 하나님”시라는 사실이 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이러한 역사의 결과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21f) 하셨는데 어둠과 죄에 붙잡혀 살던 우리들을 그 저주에서 이끌어 내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온전하게 하시고 이제는 영원 속에서 사람 구원을 계획하신 자기(하나님) 뜻을 행하게 하시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뜻을 행하신 것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일들이 선하신 일이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기 때문에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21m)고 하여 이 역사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를 이 히브리서 기자는 기도하고 있음을 듣는다.

여기서도 역시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의 이루어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이고 그 뜻이 이루어짐의 장소요 대상은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한 것이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하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일에 참여하는 하늘의 백성들의 감격이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21b)

인류의 어느 목자와도 비교될 수 없는 자신의 피를 지불하고 자신의 양들을 죄와 사망에서 부활하게 하여 평강의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의지를 온전히 이루게 하셔서 우주의 기쁨과 평화를 완성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혜택을 입은 자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세토록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렐루야!



Ⅱ.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22~23)

자신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마련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신 이 엄청난 구원의 선포를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면 저들의 삶에 큰 신앙적 유익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용납할 것과 이 복음의 일꾼 중에서도 경건한 디모데의 역할도 알아줄 것을 당부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22) “형제들아!” 사뭇 다정하고 애정 어린 말투로 상대를 다독거리는 자세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앞에서 진리를 떠나 배교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한 과격한 표현과는 다르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은 꼭 같은 낱말이 동사와 명사 형태로 사용되었다. 앞에서 신앙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강한 말투로 꾸짖기도 했지만 그것은 주님의 위치에서 책망한 것이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권면의 말이었다는 표현이다.

사실 권하는 권면의 말은 듣는 상대의 반응과 결단에 관련된 당부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입장이나 말씀에는 선택에 따른 결과가 전혀 다를 수 있다. 구원의 부름을 거절한다면 거기에는 다른 기대나 소망이 없이 멸망이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권면이기 보다는 생명에 관한 명령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또 이런 입장에서 전하는 사람의 권위는 사람이기 보다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권면이라도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이와 비슷한 표현이 이방인 교회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볼 수 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행13:15)

그럼에도 이 권면의 말이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22b) 실제적으로 이 히브리서는 그렇게 간단한 편지는 아님에도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이 좀 의아하기는 하지만 이 편지를 통해서 히브리 출신의 신앙인들에게 권하고자 했던 말씀은 길거나 복잡하지 않았다. 양이 많고 복잡한 OT의 율법이 아니라 모든 내용은 새언약의 대제사장이요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23) 베드로에게 마가가 믿음의 아들인 것처럼(벧전5:13) 바울의 신앙으로 낳은 아들인 디모데(딤전1:18)는 경건한 청년으로 이미 여러 교회의 문제를 위해 보냄을 받기도 한 것으로 이미 당시의 교회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었던 것 같다.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23f) 수신자들과 함께 “우리 형제”라는 표현을 볼 때 분명이 익숙한 지체요 일꾼이었던 것으로 이해가 된다. 다만 “놓인(ἀπολύω, 석방하다, 풀어 놓다, 가게하다, 내쫓다)”이란 표현을 볼 때 감옥이나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다가 석방된 것이라는 이해가 가능하다.

앞에서 10:34f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13:3f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란 표현과 같은 실제적인 인물이었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복음을 위하여 갇히기까지 하는 1세기의 신앙인들을 보는 오늘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내용들이다.



Ⅲ.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넘치게(24~25)

마지막 부분은 앞의 v7, 17에 거론한 바 있는 신앙의 인도자들과 그 지도를 받는 성도들에게뿐만 아니라 당시에 믿음 때문에 로마에서 쫓겨났을 수도 있는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하나님의 은혜를 축복하는 편지의 일반적인 마무리 형식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24f) 신앙을 지도하는 사람들에게 불순종하지 말고 좋은 관계를 만들어 그들에게 순종할 것을 당부한 바 있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복종이라도 해야 한다고 권면(17)한 바 있다.

이제는 그들에게 문안을 당부하고 함께 같은 믿음으로 고군분투하는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격려의 안부를 당부하고 있다. 핍박 속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는 어떤 위로나 격려도 들을 수 없지만 같은 신앙의 사람들의 격려는 큰 힘이 된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나와 같이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큰 위로와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1세기에 이런 문안을 당부하는 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진리가 외면당하는 척박한 죄악의 세상에서 함께 같은 진리를 받들어 섬기고 있노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히 격려가 될 수 있다. ‘그래 이 진리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구나!’는 위로와 힘이 될 수 있다.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24b) 사도행전18: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라는 기록을 보는데 당시 세상의 중심이었던 로마의 수도로부터 온 자들이란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아무래도 신앙 때문에 로마로부터 떠나 왔을 것이라는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다면 세상의 많은 곳으로부터 온 사람들을 제외하고 이달리야에서 사람들만을 특별히 거론할 이유가 없다는 데서 그렇게 이해를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25) 이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편지형식의 마무리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라도 당시에는 서신의 말미에는 반드시 자신들이 믿는 신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끝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형태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복음을 믿고 순종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의 축복은 일반적이지 않다. 먼저 하나님은 복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고 언약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죄의 저주를 물리치신 하나님의 새 언약 속에서는 이제 특별한 사람만이 축복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난 모든 사람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로써 축복권을 동일하게 가진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다(벧전2:9).

본래 제사장이라는 지위 자체가 하나님과 사람을 중보 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자신이 책임진 사람들의 죄의 문제를 비롯한 어려움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는 역할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모든 그리스도께 붙은 사람들은 아브라함보다도 더 확실한 축복의 사람들이다.

베드로 사도가 이를 잘 가르쳐 주고 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

믿음의 사람들의 문안은 단순한 안부에 지나지 않는다. 문안을 통하여 동료 된 자신이 있음을 확인하고 격려함으로써 신앙을 확신시키는 데까지 문안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25) 죄를 지으며 살 수밖에 없는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치 않은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바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은총이기 때문에 이것이 되도록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교회나 성도는 이것을 위한 도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