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골 1:1~2 2023-01-15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  
오늘은 본문의 내용보다도 주변의 상황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메시지를 나누고자 한다.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기록한 서신들이라는 데서 당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의 상황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살피려 한다.

옥중서신이라고 할 때 NT에는 7개의 편지가 있다. [엡, 빌, 골, 몬, 딤전, 딤후, 딛] 그러나 교회의 사역적인 내용으로 [딤전, 딤후, 딛] 목회서신이라고 분리되고 있기 때문에 나머지 4편지인[엡, 빌, 골, 몬]을 옥중서신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다.



Ⅰ. 편지를 보내는 바울(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바울 사도는 천하를 다니며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아직 알지 못하는 로마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면서 당시 ‘모든 길은 로마로’ 라고 하는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어했다.

마침내 그 소원과 기도는 이루어지고 로마로 가게 되는데 그것은 사도나 전도자의 이름이 아닌 명목상으로는 죄수의 몸으로 가게 되는데 뒤에 가서 좀더 거론하도록 하겠다.

그런데도 사도행전의 말미에 기록되고 있는 것처럼 어떤 때는 전혀 제한받지 않고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고, 또 어떤 때는 로마의 감옥에 갇혀 군인들의 손에 묶여 육신은 자유롭지 못했지만 자신을 묶고 있던 그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로마의 교회는 바울이 세우지 않았다. 누가 세웠다는 기록이 성경에 나타나지 않지만 이 땅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오순절에 절기를 지키려고 왔던 15개국의 사람들 중에 “우리는 바대인과 (9) …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행2:10) 라는 기록으로 볼 때 그 때 복음을 듣고 로마로 돌아가 교회를 시작한 것으로 이해된다.

어쨌거나 이렇게 시작된 바울의 로마에서의 사역은 가이사의 근위병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자신이 세운 교회들에 문제가 생긴 것들을 들었을 때는 신앙의 권면을 담아 쓴 편지들이 주옥 같은 성경으로 남아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생명의 교훈을 주고 있다.

특히 다른 감옥도 아닌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일반적으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로마의 시위대나 근위병들에게까지 오히려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바울은 오히려 감격하며 오늘 본문 시작처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라는 고백을 듣는다.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까지,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1:12~14)고 하나님의 신비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옥중서신이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감옥에서 기록한 편지라는 의미이고 신기한 것은 실제로 죄도 없는 상태에서 감옥에 죄수로 들어가 불편한 삶을 살고 있다면 보통사람 같으면 억울해서도 견디기 힘들 것임에도 이 서신들에서는 조금의 어두운 그림자는 읽어 볼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빌립보서 같은 경우는 기쁨을 격려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서 믿음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 바울과 실라가 유럽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모함을 받고 감옥 갇혀서 빌립보교회가 서게 된 사실은 사도행전에서 읽는 사실이다.

율법시대에는 어떻게 찬양했는가 가 OT에 자주 나타나지만 복음 시대에는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도 많은 NT의 성경들 중에 다른 성경이 아니라 에베소서(5:19)와 골로새서(3:16) 즉, 옥중에서 기록한 내용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없이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다.

감옥속에서 이럴 수 있다면 복음은 사실적으로 검증된 행복의 에너지임이 검증된 사실이다. 모두가 세상이 힘들고 살기 어렵다고 투정한다. 그러나 어째도 감옥 보다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안락하고 편하다. 이런 이유에서 복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감사할 수밖에 없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

찬양은 기쁨에서 나오고 감사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바울은 과거 이집트를 탈출시켜 약속의 땅을 향해 가던 자들의 안타까움을 두고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10)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혈육의 형제였던 유다는 경건하지 못하여 심판으로 가는 사람들을 두고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유1:16f) 증거하고 있다.

성경 속에서 이 역사에 놀라운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함을 받고 죄인으로 감옥에 갇히는 것은 물론이고 팔려간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인 사람들을 보면 OT의 사람들 중에는 누구보다도 요셉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막내임에도 은 20에 형들에게 이집트로 팔려가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바로의 관원 두사람이 함께 갇히게 하여 그 한사람에 의해 위기를 만난 이집트의 왕 바로 앞에 세우셔서 당시에 7년 기근으로 죽게 된 이집트를 비롯한 약속의 가족인 야곱의 집안까지 구원하시는 역사를 이룬다.

만약에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형들이라는 사람들이 막내동생을 외국에 팔아, 두고 보자!’ 했겠지만 오히려 나중 형들이 자신들이 판 요셉이 살아있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어 있음을 알고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형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창45:5, 7)라고 격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고후5:21)이시지만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부추김과 거기에 선동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화로 말미암아 죄인으로 이방인인 빌라도에게 넘겨지고 죽을 죄가 없다는 빌라도의 판단에도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마27:22b) “…그들이 더욱 소리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마27:23b)라고 사형 판결을 결정하게 한다.

죽으실 수 없는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이시면서도 단순한 육신의 감옥이 아니라 아담 이후부터 저주받은 인류가 죄의 값으로 죽어 음부의 감옥에 갇혀 있음을 사흘 간의 무덤 속에서 경험하셨다.

결국 사람들의 사악한 죄성은 그대로이지만 하나님의 그 더럽고 무서운 죄성도 그 쓰임에 적절하게 하신 것이다. 안타깝게도 성경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넘쳐나고 있다. 생명과 진리를 주제로 구원을 알게 하려고 쓴 성경에 그와 반대되는 내용들이 더 많은 것이다.

세번째로 모함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된 사람이 오늘 우리가 다루고 있는 사울 즉, 바울이다. 이 사람이 한 일들은 이스라엘이 거부하는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한 것이고 이것은 바울이 나기전부터 이미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역할이었을 바울의 고백에서 듣는다.

다메섹에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어가려고 다메섹에 들어오던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눈이 멀어버리고 먹고 마시는 것을 중단한 체로 기도하고 있을 때 다메섹에 경건한 사람으로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있던 아나니아 라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이 예언대로 예루살렘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던 다메섹에서부터 아시아와 유럽에 복음을 전하고 기근으로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이방 교회에서 물질을 모아 가져가서 자신의 육신의 혈육인 사람들을 구제하려고 예루살렘에 들어왔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를 모함하여 천하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법을 어기라고 부추겼으며 예루살렘 시내에서 헬라인 디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갔다고 단정하고, 이방인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을 더럽혔다고 고발한다.

아무리 변명을 해봐도 그의 동족들은 듣지 않았고 결국 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40명이나 나타나자 이를 알게 된 로마의 천부장은 바울을 가이사랴로 보낸다.

유대 지도자들은 수시로 변호사를 데리고 나타나 고발하는 까닭에 바울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게 되고 마침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의 감옥으로 가게 된다.

창세기의 요셉이 그랬겠지만 바울 역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해서 살지 못할 대우를 동족으로부터 당했고 전도하러 다니면서도 로마에 편지를 보내면서 로마를 거쳐 땅끝이라고 생각하는 스페인까지 가고 싶다는 고백을 한 바 있다(롬15:28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그러나 그 응답이 죄수의 몸으로 가게 되는 신비는 자신도 깨닫지 못했었지만 그것이 정신적으로 무장된 로마의 군인들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뜻이었음을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고백하고 있는 내용(빌1:12~14)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다음에도 본문들을 다루면서 좀더 자세히 다루게 되겠지만 여기서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이유를 고백하는 내용을 이 옥중서신이라고 하는 다른 서신들에서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자신이 세계의 중심인 로마의 감옥에 죄인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갇히게 된 이유나 목적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몬1:8) 첫번째로 바울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감옥에 들어간 이유가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를 좀 더 분명히 하여 그것은 곧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몬1:13)라고 표현한다.

이미 바울은 실라와 함께 빌립보에서도 귀신들린 여인에게서 귀신을 좇아내 준 것 때문에 자신들이 이익이 끊겨버린 이 여인의 주인들로부터 고발을 당하여 채찍에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고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 밤중에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역사는 돌아볼수록 가치 있는 고난이었음을 회고하곤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베드로 사도 역시 같은 격려를 주고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5~16)

바울의 감옥에 갇힌 첫째의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또는 “복음을 위하여” 즉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뜻을 위하여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오늘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려 하면서도,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는 너무나 인색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기까지 하다. 여기에 또 다른 표현은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딤후1:8) 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다른 바울의 갇힌 이유는 그의 사명과 관련되는 표현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엡3:1)

이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물론 바울은 전도의 초창기에는 그래도 유대인들을 찾아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이 복음을 거절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13:46) 증거한 바 있다.

그 후에 고린도에서는 거절하는 유대인들에게 옷을 털면서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18:6b) 선언한다. 그런 이유에서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롬11:13)라고까지 확신한다.

비록 동족에게는 소외를 당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사명임을 확인한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2:8) 고백한다.

어떤 입장에서도 불만이 없이 자신의 소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명의 확신이야 말로 하나님의 백성이나 일꾼들에게는 첫째로 중요한 확신이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역할이 주어졌던 감격하고 확신하는 사람이야 말로 바울처럼 확실히 쓰임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엡3:1)이라는 표현은 앞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이라는 바울의 정체성에 의미들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갇히고 매를 맞았어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과 부르심의 이유를 확신하며 감당하고 있다면 그 상황이나 고통조차도 믿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오늘 우리 중에는 ‘내가 왜, 예수를 믿으며 사는가!’에 대한 확신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바울의 모범은 그런 사람들에게 사명을 찾아 줌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이라는 첫 고백은 감옥에 갇힌 것도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였음을 고백하는 동시에 믿음의 아들이지만 항상 자신의 심복처럼 움직이는 디모데도 복음을 위해 함께 일꾼 된 형제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Ⅱ. 이 편지의 수신자(2f)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골로새는 소아시아의 아래부분 브루기아 지방 라오디게아의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이다. 참고로 요한이 편지를 보냈던 아시아의 7교회는 아시아의 서남쪽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항구도시인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3도시와 다시 오를 쪽 시계방향으로 내륙도시인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로 위치해 있다.

물론 골로새는 7교회에 든 교회는 아니지만 주님으로부터 가장 신랄한 책망을 박았던 라오디게아교회의 바로 아래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주의적인 믿음을 가진 라오디게아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다.

1세기에 복음의 확산이 큰 만큼 건전치 못한 교리가 성도들을 혼란케 했고 그 차이는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론이 주 내용이었다. 바울 자신이 세운 교회는 아니지만 바울로부터 영향을 받은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진 골로새 교회 역시 거짓 교훈이 들어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이 편지를 쓴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이 골로새서도 차례로 돌려가며 읽는 편지형식으로 이웃의 교회들에게도 읽게 하였을 뿐 아니라 오늘 우리 교회가 또한 함께 나누고 있다. 그럼에도 4:16에 보는 것처럼 라오디게아교회에게 보내졌던 바울의 편지는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역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다.

바울은 이 편지를 받고 있는 대상을 표현하기를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주된 대상을 두 가지로 표현한다. “성도”(ἅγιος, 거룩한, 하나님께 바쳐진)와 “신실한(πιστός, 믿을 만한, 신실한, 신뢰하는, 신임하는) 형제들”이다.

사실 교회의 구성원들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구별된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또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호소력이 있고 귀중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이 두 표현은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나 믿음이 가는 같은 믿음의 지체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Ⅲ. 축복(2b)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의 모든 서신들은 축복으로 가득 차 있다. 바울의 편지의 앞뒤에 축복이 없는 편지는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결코 유쾌할 수 없는 억울하게 감옥에 있으면서도 이 귀한 권한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특권이기 때문이었다. 저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 사탄의 전유물이다(계12:10).

죄로 인하여 저주로 어두운 이 세상에서 생명의 빛을 누리고 산다는 것 자체가 복이고, 세상적으로는 너무 쉽게 남들을 저주하는 세상에서 복을 빌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구원받은 것 못지 않게 귀중한 특권이다. 바울은 이 특권을 감옥에 갇혀서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육신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도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8) 당부하신 바 있다. 바울도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 하였다.

모두가 저주하는 가운데서도 비록 저주를 받을지라도 그 상대를 축복할 수 있는 것 역시 하나님의 자녀들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