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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골 1:9~14 2023-01-29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에바브라를 통하여 골로새 교회의 문제성을 들은 바울은 이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거기에 이어서 그리스도의 위상을 증거하여 거짓교사들의 옳지 못한 가르침의 바르지 못함을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신앙적 논리를 전개한다.

신앙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앞서야 하는 것은 바울이 모범으로 보이고 있는 기도의 모습이다. 어떤 일이든지 교회이건 그리스도인 이건 그 문제를 먼저 하나님께 맡기고 진행해야 하는 것은 믿음의 A, B, C, 즉 알파벳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영적인 일이냐 육적인 일이냐 따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믿음의 사람들의 모든 것이 바로 영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고 할 때 믿음의 조상들의 모습을 봐도 분명히 그렇다.

우리의 교회가 모든 지체들이 이렇게 일들을 진행한다면 거기에는 적어도 잘못된 이변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실제적인 가르침이 우리 모든 주님의 백성들의 삶이 되시기를…



Ⅰ.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 달라고 기도(9~10)

바울은 자신이 골로새 교회의 안타까운 사연을 에바브라로부터 전해 들은 때부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그 기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거짓 교사들을 물리쳐 달라는 등의 부정적인 내용은 전혀 없고 오로지 바른 신앙적인 요소들로 저들을 충만하게 채워 줄 것을 간구하고 있다.

사실 진리와 신령한 것으로 충만해 있다면 아무리 거짓과 어두움의 유혹이 있다고 할지라도 넉넉히 이기고 견고히 설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라는 말씀은 이러한 원리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9f) 이 기도는 바울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마음을 모을 수 있는 사람들이 더불어 나누고 있음도 나타난다. “이로써 우리도” 아무리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라도 두세사람의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도 분명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일회적인 기도회가 아니라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계속 기도한다는 것도 역시 고백하고 있다.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어찌 보면 바울에게 분명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더러 있겠지만 주님의 몸인 한 교회는 그 만큼 귀중함을 깨닫게 한다.

여기에도 기도(προσεύχομαι, 기도하다, 간청하다)하고 구하(αἰτέω, 구하다, 요구하다)는 이중적인 기도의 낱말들이 쓰여서 강조적이다. 특히 여기 [구하다, αἰτέω]는 ‘어떤 것을 원하다, 자신의 몫으로 어떤 것을 요구하다’라는 의미까지 있어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기도를 자신의 일로 하나님 앞에 구하고 있다는 의미로까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도 자유로운 몸도 아니지만 자신의 몸이 자유로워져서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고 교회들을 세울 수 있겠지만 그런 것들 보다 세워진 교회가 바로 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더불어 구하고 있고 이런 편지내용이 골로새에 진리편에 남아서 힘겹게 싸우고 있었던 일꾼들에게는 얼마나 힘이 되었을 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이어지는 내용이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께 바라고 기대하는 기도의 내용으로 교회의 구성원들이 무엇으로 채워져야만 하는가에 귀중한 교훈이다.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9b)

이부분도 두가지로 나눠 생각할 필요가 있다. 먼저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이어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한 것인데 앞에 것은 도구이고 뒤의 것이 가장 그리고 최종적으로 성도들에게 꼭,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사실 지혜(σοφία)와 총명(σύνεσις, 함께 놓다, 모으다, 이해하다-이해력, 통찰력)은 그리스시대부터 그레코로만 시대까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덕목이다. 즉 누구나 다 갖고 싶어하는 덕목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별 유용하지 못함을 늘 말하고 있다.

분명히 지혜와 총명이지만 육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을 수식하는 한가지가 바로 “신령한”[πνευματικός, 영적인, 영에 속하는] 것이어야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지혜와 총명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이것이 어두움에 이용당하는 일이 에덴에서 하와에게 있어졌고 사실적인 상황이 지금 골로새 교회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혜가 어두움의 도구로 간악한 지혜로 쓰일 수 있기 때문에 신령한 지혜를 늘 구하고 사용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이나 그럴싸한 것도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순화되지 못하면 영적으로는 별로 유용하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이 v9의 뒷부분을 공동번역을 참고로 하면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지혜와 판단력으로 하느님의 뜻을 충분히 깨닫게 되기를 빌어 왔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럼에도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채워지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이 도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져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한가지 경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반드시 지혜와 총명만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지혜와 총명을 순화한 성령, 하나님이신 성령의 지혜로만 가능하다.

교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진다면 잘못될 이유도 없고 게으르거나 잠잘 수도 없을 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인 구원을 사람들에게 펼쳐가는 기관이다.

안타깝게도 교회가 이 사실을 잊어버리는 데서 엉뚱한 짓을 하고 변질되어가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은 골로새 교회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교회와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일을 하나님께 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렇게 되었을 때 따라 나타날 수 있는 결과가 바로 다음 v10이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10f)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뜻을 충만이 알아야 범사에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할 것이고 그것은 당연히 행하는 일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 교회가 위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영광이다.

과거 이스라엘이 왜, 망하고 흩어지게 됐는가 하면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자신들의 원하는 것들을 이루려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타까워 호세아를 통하여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v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탄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결과가 하나님만 기쁘시게 해 드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첫째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두번째 결과는 옆으로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임도 기록하고 있다.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10m) 선한 일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만 주변의 이웃을 유익하게 하는 일들일 것이다.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말씀하신 바 있다.

또 다른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충만한 사람들의 열매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10b) 호세아 선지자를 그렇게 안타까워했던 과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이다. 육신의 사람도 기형적인 성장이 문제이지만 신앙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가지 않으면 그것은 엄밀히 성장이라고 할 수 없다.

성장은 스스로 하는 것이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10b) 주님께서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요15:5b)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충만한 것이다.



Ⅱ.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해 주실 것을 기도(11~12)

앞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정당한 삶을 위하여 기도했다면 여기에는 그런 신앙적 삶이 더욱 강건해질 것을 기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는 고백을 부러워만 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만 그런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말씀을 두번째 내용에서 본다.

또 오늘 여기에 약속대로라면 우리가 스트레스로 인하여 병이 날 이유도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스트레스나 억눌림을 힘겹게 짜증내며 견디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감당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바울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된 것 자체가 엄청난 스트레스일 수 있지만 그것을 기쁘게 감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중에서도 골로새 교회나 오늘 우리 교회에까지 큰 은혜를 끼치고 있으니 이런 가르침이 절대로 허풍이 아님을 본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11f) 여기 “힘(κράτος, 권능, 세력 NT에 12회)”은 신약성경에서는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를 이 옥중서신 중에서 한 곳을 인용하면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9)

오늘 다루고 있는 골로새서의 형태와 거의 비슷하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11f)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그의 영광의 힘”이다. 힘에 무슨 영광의 힘이 따로 있겠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그분의 속성과 함께 나타난다. 전능, 전지, 편재, 거룩, 진리, 영원, 생명, 사랑 등과 같이 사람이 모두 가질 수 없는 속성들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영광(δόξα, 광채, 영화, 명성)”이고 거기서 나오는 힘이기 때문에 권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광의 힘”을 따라서 역사 하시기 때문에 그 능력에는 대항할 힘이 없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그 힘을 따라 그의 백성들에게도 능력을 주실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여기 같은 낱말이 겹쳐서 쓰였다. “능력(δύναμις)으로, 능하게 하시며 (δυναμόω, 강하게 하다, 강화하다)” 앞에는 명사이고 뒤에는 동사가 쓰였는데 뒤의 동사도 수동형으로 쓰여서 하나님께 받는 것이 확실하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11f)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능력은 그냥 어떤 데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신다. 구체적인 예가 뒤따라 나타나는 약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약속은 지금 문제가 발생한 골로새 교회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는 물론 이 역사와 우주 속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한결같은 약속이다. 믿지 않으면 엄청나게 손해보는 언약이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은 어떻게 쓰여지는 가가 두 부분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첫째가 이 v11b이다.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11b)

견딤(ὑπομονή, 인내)은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다. 어떤 감당하기 어려운 억누름 밑에 깔려서 견디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던 것 같다. 운동선수가 경기 날을 앞두고 힘겨운 훈련을 견디는 것이나 군대에서 얼차려를 견디는 것이나 회사에서 상사의 압력이나 업무의 과중함도 모두 견딤이다.

그런데 여기에 다른 것은 그 모든 스트레스를 기쁨으로 감당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앞에서 확인한 대로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인내의 모범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로 한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3:5)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슨 인내가 필요하셨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께는 시공간에 제약 받는 사람으로 오심 자체가 스트레스이셨다.

구속을 위하여 십자가까지 가셔서 죽으실 때까지 자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조롱당하심은 물론이고 고통을 모르시던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셔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힘을 당하신 모두가 우리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스트레스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것을 참으로 기쁘게 견디신 것은 이 우주의 죄를 해결하실 방법이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후서3:5의 바울의 기대는 바로 이런 주님의 인내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모든 견딤(스트레스)을 기쁨으로 역시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는 사랑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이유의 다른 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 믿음으로 견뎠다면 거기에도 상 주시리라는 소망 때문이다. 소망만이 인내를 가능하게 하고 기쁘게 감당케 한다.

그럼에도 기쁨으로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하였기 때문이다.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라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 대부분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이 오래 참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가르침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 중에 가장 오래 참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농부들 즉, 농사짓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5:7) 여기 농부의 오래 참음을 주님의 재림에 비유함을 본다.

이 “오래 참음” 역시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심”의 결과이다.

이제 v10의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10)라는 성도의 삶의 자세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적극적인 삶이다. 바울은 비록 로마의 감옥 속에 억울하게 갇혀 있지만 이런 감사를 가졌고 골로새 교회와 우리 교회가 또한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2)

앞에서 바울이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하였던 것과 다르지 않게 여기서는 “빛 가운데서” 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빛이심은 요한 사도가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1:5)라는 확인과 같이 죄로 인하여 칠흑같이 어두워진 죄악의 세상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고 불가능한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신 것은 당연한 성도의 자세이다.

그럼에도 골로새 교회에 거짓 교훈을 가지고 들어온 교사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에바브라에게 불만을 터뜨리고 감사를 잊어버린 모습이 되었던 것 같다.

사실 은혜를 제대로 맛본 성도라면 늘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어떤 형편이나 상황에서 이든지 ‘이만한 것도 나에게는 감사하지, 이것도 내게는 감지덕지(感之德之)이지!’라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사실 성경에 감사하라는 말도 죄로 인하여 불평과 불만에 가득한 사람들에게 계속 당부하고 있는 증거이다. 바울은 먼저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5:20) 라고 모범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2)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골로새 교회를 향한 감사의 당부도 계속 주고 있다.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사실 항상 감사를 찾는 신앙이라면 그래도 성숙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진리에 선 교회가 옳지 못한 교리로 인하여 무너져 가는 것은 꼭 그 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런 악역향은 언제나 우리에게도 영향이 미칠 수 있으므로 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우리 교회를 단속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교회에, 또는 그러한 악영향을 받을 수 있는 우리 교회를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 주시도록 기도하며, 모든 것을 사람이 좋아하는 것보다는 주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힘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한다. 그럴 때 모든 신앙적 선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가게 될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주시는 진리의 능력(말씀과 성령)으로 지켜 감으로 그러한 거짓에 대한 영적 싸움을 기쁘게 견디고 오래 참음으로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로 맡기고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영광에 들어가는 교회와 성도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