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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골 1:13~19 2023-02-05
만물이 다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지난 3번으로 다룬 내용이 안부와 축복의 내용이었다면 여기서부터 이 그리스도론을 중심 한 골로새서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앞에서 다뤘던 히브리서가 1:1~3:13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다루는 내용이었다. 천사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아들의 지위와 모세보다도 그의 온 집에서 충성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찬양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책들 만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다룬 것은 아니다. 4복음서 중에 요한복음이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잘 나타낸 서신이었다. 이 골로새서와 요한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다룸에 있어서 비슷한 부분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순서에 있어서는 다른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요한복음이 그리스도의 창세전부터 먼저 계셨던 선재(先在)와 창조를 선포(요1:1~3)하고 있는데 반하여 이 골로새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먼저 다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물론 이런 차이는 각 서신을 기록한 이유와 배경의 차이 때문이라고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오늘 두번째 제목에서 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먼저 계심과 창조주로서 위치를 소개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먼저 다루는 것은 침투한 이단사상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이다.

이 부분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 세상의 어떤 다른 종교에도 신이 사람을 위해서 희생했다는 구속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이 희생의 은혜에 감격하고 찬송하게 되는데 구속론은 다른 종교에는 없는 그리스도교만의 독특한 신앙의 핵심이다.

오늘도 모든 존재하는 것들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의 창조자이시지만 그런 모든 초월적인 능력보다 소중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사랑의 은혜와 역사로 우리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충만을 우리 삶 속에 사용하도록 허락받은 은혜에 다시 한 번 감격하고 찬양하는 … 오늘은 뒤에서 결론을 맺지 않을 것이다.



Ⅰ. 구속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13~14)

아브라함을 통해서 언약백성이 된 이스라엘과 다르게 이방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본래는 언약백성이 아니었지만 감격하고 자긍심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 그리스도를 통한 희생의 피 흘림 덕택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이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을 제외한 이방인 만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더욱 감격하고 감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유 에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13f) 여기 우리 과거의 상태를 묘사하고 마치 삶의 자리를 옮긴 귀중한 이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기에 흑암은 단순한 어두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흑암의 권세에서 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어두운 영의 지배아래 있었던 과거를 지적하는 것이다. 같은 옥중서신 인 에베소서에 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엡5:8) 같은 증거를 주고 있다.

본래 어둠의 세력 아래 있는 상태에서는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는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지만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칠흑 같은 어두운 우리 마음에 빛을 주셔서 눈을 뜨게 하시고 우리 스스로의 상태를 보게 하신 것이다.

바울은 이 상태를 좀더 자세히 해설해 주고 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행26:18f) 특히 건져내사(ῥύομαι, 구출하다, 구하다)는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날 수 없는 상태에서 외부로부터의 힘으로 구출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구출된 상태로 둔다면 스스로의 힘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다시 빠질 가능성이 있는 불완전한 상태에서 끝낸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3b) 완전히 안전한 상태로 옮겨진 것을 확인하고 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당연히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는 빛의 나라요 사랑의 나라요 소망의 나라요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옮기셨으니(μεθίστημι, 바꾸어 놓다, 옮기다)는 거꾸로 이해하면 과거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옮겨진 것과 같이 삶의 터전이 완전히 바뀐 것을 의미하고 ‘건져내사’나 ‘옮김’이 과거 완료형으로 과거에 이루어지고 그 상태가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형태로 쓰여 있다.

내용이 도치되어서 강조적이다. v13이 결과라면 v14은 결과를 가져온 원인이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ἀπολύτρωσις, 구조, 해방)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1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속죄를 받은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앞에서 말했던 대로 속량이나 죄 사함 같은 표현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단어들이다. 이 모든 일이 결국 ‘그 아들 안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고 이것은 지금도 그의 몸인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 가는 은혜와 사랑의 역사이다.

또 하나 주목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를”(13)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라는 구조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로 하나된 거듭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옮김이나 속량, 또는 죄사함은 사실 “내”가 포함되지 않는다면 직접적인 “우리”의 기쁨이나 감격이 될 수 없을 것인데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나)”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Ⅱ. 만물의 창조자(15~17)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대개의 경우 창조주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성경은 아버지와 같은 창조주로 함께 하신 창조주로 증거하는 것을 성경의 도처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요1:2~3).

또 이 그리스도의 창조는 단순히 보이는 세계에 그치지 않음도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다. 영적인 세계는 물론이고 왕이나 통치자 그리고 모든 주권을 주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사실과 함께 이 우주안에 존재하는 유, 무형의 모든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나왔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15f)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시기 때문에 형상을 갖고 계시지 않을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을 눈으로 뵙는 자는 죽게 될 것이라는 경계가 선지자들을 통해서 선언된 바 있다.

최초의 선지자요 율법의 중보자인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 한 것에 대해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고 친히 선언하셨고,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였다고 했지만 그 대상은 하나님이 아닌 천사였다(호12:3~4).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부터 형상들을 보았지만 그 형상이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증거도 없었다.

이렇게 죄진 사람이 도저히 뵐 수 없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OT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 보다도 감사해야 할 커다란 은혜요 사랑이다. 바울은 같은 옥중서신 인 빌립보서에서 이를 감격하며 선포하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6~7)

물론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15f)할 때 하나님께서 보이는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과 같다는 것은 분명히 아니지만 주님의 범사의 사시고 행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자연이나 특별 계시인 성경보다도 더욱 분명히 하나님을 나타내셨다는 증거이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15b)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17) 모든 보이고 보이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보다 먼저 계신 이를 신앙적으로 선재(先在)하신 분이라고 표현하지만 이것 역시 우리 사람들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한 것뿐이다.

어떤 종파에서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15b)라는 말씀을 인간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최초로 지음을 받은 존재’라고까지 이해하여 그를 천사들의 우두머리라고 이해하지만 히브리서 1:5f, 13에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하신 적이 없으시다고 분명히 선언한다.

그러므로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17)라는 표현이 더욱 이해하기 좋은 말씀이다. 이 우주에 어떤 것도 생겨나기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셔서 모든 창조사역에 함께 하셨음을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말씀들은 성경의 도처에 창조주로 표현하는 내용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다. 가장 대표적인 내용이 아무래도 요한복음일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다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재하는 만물의 창조자 되심을 증언하고 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16) “…만물이 그 안에 함게 섰느니라”(17b)

마치 미국의 링컨이 민주주의 권력이론을 이 말씀 속에서 인용한 것과 같다.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다만 여기 하나님을 사람들로 바꿔서 사용한 것으로 보이고 교회의 바른 통치자세를 표현한다면 여기 ‘사람들(people)’을 권력을 창조하신 “하나님(God)”로 바꾸면 크게 그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신앙적 논리는 이방인을 복음 속에 접붙이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표현하면서 로마서에서 바울이 이미 증거한 내용과 다르지 않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

짐짓 하나님의 창조를 보이는 것에 한정하는 위험성도 오늘 본문은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17)

먼저는 “하늘과 땅에서”는 창조의 범위를 한정하고 있다. “하늘과 땅에서”는 달리 말하면 ‘우주와 시간 안에서’ 라고 표현해도 그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다른 행성들에 위성을 띄우고 있는 최고의 우주의 지성이라고 하는 사람의 이해는 아직도 우주의 끝을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이해의 한계는 물질적인 도구와 지식의 한계를 단정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피조세계를 이해하려는 사람의 머리는 역시 창조주 이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먼저 두가지로 구분되는 것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한 것이다. 사실 우리 사람의 한계는 보이는 것들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우리의 눈에 감추어진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로 어렵다는 것 보다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두번째는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하는 권력 역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 증거한다. 이런 가르침 역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13:1)는 바울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물질적인 이론은 권력이 사람으로부터 나온다고 이해하고 있지만 결국 사람으로 나오는 유물론적 권력은 사람을 결코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결국 권력을 창조하시고 주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삶에 바르게 적용할 때 바른 정의가 되고 권력에 종노릇 하지 않는 사람다운 삶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한정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세계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바르게 이해하 고 순복할 때 모든 것이 질서를 잡게 되고 정의와 평화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사람으로부터, 유물론적인 이념에서 나온 모든 이론이 사람의 가치를 권력의 시종으로 전락시키고 계속 법을 만들기는 하지만 정치적 안녕은 영원히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섬기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라도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17) 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실을 인정하고 순종할 때 냉정한 법이 아닌 사랑으로 다스림을 받는 사람다운 삶이 될 것이다.



Ⅲ. 근본이요 으뜸이신 그리스도(18~19)

창조의 근본이시고 모든 유 무형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근원(원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어떤 피조물보다도 위에 계시고 다스리는 자리에 계심은 너무나 분명한 이치이다. 결국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 외에는 어떤 것의 다스림도 거절하시는 것은 당연한 이유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구속의 계획과 예정을 친히 성취하신 주님은 자신의 희생으로 세워진 교회의 통치자 되심도 역시 거절할 수 없는 이치이다. 특히 교회의 머리시고 만물의 으뜸이 되심의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중심이 되어 있다.

어찌 보면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계획속에 있긴 하였지만 최초의 창조에 속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류가 타락한 이후에 새로운 창조에 속한 특별한 기관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고 이 교회 역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모임인 교회의 으뜸이요 머리가 되심도 당연한 수순이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18f) 이 역사의 새로운 피조세계의 머리 이신 것은 친히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희생의 은혜를 감당하셨기 때문이다.

아담이후로 모든 피조 세계가 어둠의 세상주관자들의 아래로 떨어지고 이를 본래의 창조의 질서로 회복하기 위하여 모든 피조물의 절망을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감당하 셨다.

교회의 머리 되심은 창세전의 교회의 예정에서 이미 선언된 내용이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2~23)

그런 이유에서 이어지는 “…죽은 자들 가운에서 먼저 나신 이시니…”(18m) 즉, 십자가의 희생과 3일만의 부활이 여기에 짧게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본래 모든 피조물의 으뜸이요 머리이셨지만 반란을 일으킨 영적인 세계의 죄악을 진압하는 데는 사탄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대속의 피를 흘리신 것이다.

이제 죄악을 평정하신 새로운 피조 세계에서도 먼저 죄의 결과인 죽음을 정복하여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고 마귀 사탄이 방해할 수 없는 완전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여 친히 그 교회의 머리로 다스리시는 것이다.

“그가 근본이시오…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18) 구원을 완성하신 새로운 피조물 속에서도 존재 이유의 근본이시면서 영육의 모든 세계의 으뜸이 되시려고 사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저주와 슬픔과 고난을 친히 담당하신 것은 이런 결과를 내다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희생이야 말로 주님께서 으뜸이 되셔서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유요 결과이다.

빌립보서에서도 낮아지심의 결과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기록하고 있다.

주님께서 친히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실 때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 눅14:11) 가르치셨던 교훈을 자신이 먼저 본을 보이시고 지금도 그렇게 겸손으로 주님과 사람들을 받들어 섬기는 사람들을 같은 모습으로 높이실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좇아 낮아지심을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근본이요 으뜸에서 끝내지 않으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19)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같은 증거를 주고 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넘치도록 충만하다. 그 충만함은 이제 그의 사람들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면 누구든지 넘치도록 사용할 수 있게 하셨다. 할렐루야!

육신으로 계실 때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눅6:38f) 말씀하셨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실 것인데 세상의 방법과는 다르게 먼저는 “주라!”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해서 넘치도록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그 충만을 갖다 쓰지 못하는 것은 나의 불신이며 초라함이다. 바울은 담대히 말하고 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빌4:18f) 비록 감옥에 갇혀 있는 몸이긴 하였지만 모든 것에 모자람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풍족하게 누릴 수 있었다.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 된 오늘 우리를 위해서이다. 종류에 관계없이 모든 좋은 것으로 충만하신 그리스도의 충만을 오늘 여기 나의 것으로 누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