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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골 1:20~23 2023-02-12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도 지나칠 수 없는 찬양의 대상이시고 존귀이지만 그보다 우리와 더 가까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 희생의 역사이다. 그것이 더욱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와 자랑이고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된다.

그 엄청난 희생의 역사로 과거 하나님의 반대편에서 오로지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던 원수로 행하였지만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의 형벌은 제거되고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가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완전한 자로 자라갈 거룩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 견고한 약속에 머무르는 한 영원한 영광의 소망은 흔들림 없는 튼튼한 약속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기대와 찬양과 감사도 빼앗기지 않을 이 변함없는 은혜의 약속위에 흔들림이 없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이렇게 이방의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끼치게 한 바울은 그 자긍심과 기쁨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증거하고 있고 오늘도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바울과 같은 자긍심으로 일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Ⅰ. 만물의 조화를 위한 십자가의 보혈(2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 그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귀하고 감격이 되는 사랑으로 어떤 것과 도 비교될 수 없는 제 삶의 새로운 시작이 가능했던 분기점(Turning point)이었고 구속의 은혜를 제대로 맛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가 없을 헌신의 이유이다.

바울 사도 역시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고 죽이던 자신을 만나주시고 그 복음의 일꾼으로 삼으심에 감격하여 충성할 수밖에 없었음을 그의 마음을 담은 서신들마다 고백하고 있다. 계속되는 이 골로새서에서도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 다음에 자신의 복음의 일꾼됨의 감격을 다음 시간에 바로 고백함을 듣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모든 속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사실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구만리 장천의 뜬 구름같이 멀고 먼 이야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고 죄인 된 나를 위해 죽으심은 아무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제 개인과 인류는 물론이고 이 우주의 가장 큰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은 단순히 죄인 되었던 사람만의 회복이 아니다. 본래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벌어져 버린 상태에서 그것은 우주의 관계에 교란을 가져왔고 당연히 자연도 고통을 겪게 되었음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증거한 바 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8:22)

결국 피조물의 대표격인 사람이 범죄함으로 그 여파는 사람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피조 세계까지 균형을 잃고 다시금 자신의 대리 통치자인 사람들이 창조자 하나님의 아들의 바른 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이러한 부조화에서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롬8:19~21)는 안타까움을 증거한 바 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는 깨어져버린 모든 자연질서의 화평을 이루시는 우주의 화해를 가능케 하신 사랑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 범위를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20m) 다시금 조화를 이루게 됨을 증거하고 있다.

앞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근원이시며 창조의 출발점이 되신다는 사실을 다룬 바 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16~17)

심지어 여기 “만물”은 보이는 세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 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결국 만물의 원인과 결과와 목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부조화가 되어 버린 “만물”의 회복을 위하여 희생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라고 할 때 육의 세계와 영계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영계에 반란을 일으키고 어두움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부리고 있는 마귀 사탄의 세계까지도 포함된 것을 말한다.

그럴 때 ‘자기 지위를 떠난 일련의 범죄한 천사들(유1:6)과 도 화해를 이룬다는 것인가?’는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모든 피조세계에 절대권을 가지신 주님께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이미 사람들을 죄에서 회복시키셨기 때문에 불순종의 영적인 세력은 마지막에 무저갱에 잠그시므로(계20:10) 이 우주의 질서를 회복하실 것을 이미 계시록에서 예언하신 바 있다.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20b) 이제 결과적으로 “그로 말미암아”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만물이 다시 제 자리를 찾아 조화를 이루게 됨을 기뻐하실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충분히 창조자로서의 권위와 위엄과 능력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마귀 사탄이 이 세상과 우주에 일어나 반란과 부조화조차도 친히 자신의 피를 지불하시고 해결하심으로 결국 희생을 가르치시는 모범이심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의 백성들에게 희생과 겸손을 명령하실 만한 모범을 친히 보이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순종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음을 모든 행동으로 보이시고 가르치시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을 불순종(不順從)하는 것이 오히려 손해가 되는 것이다.



Ⅱ. 원수 되었던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21~22)

이 부분은 바로 앞의 v20 내용을 좀더 확대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화목을 좀더 성도 한사람 한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완벽한 주님의 백성으로 세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해 주고 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21)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 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을 누리기 전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어쩌면 모든 이 세상의 불신의 상태에 있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대표하는 모습이다.

여기서 보이고 있는 두가지 형태의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 내용도 어쩌면 뒤에 말하고 있는 것이 앞의 원인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마음으로 원수가 되어 있는 상태가 결국 악한 행실로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할 수밖에 없었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 행동은 마음에서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자신을 바알세불을 힘입어 그렇게 한다고 비판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4) 지적하신 것과 같다.

결국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악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과 마음으로 원수가 되어 있기 때문에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도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악한 행동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악한 행실[ἔργοις τοῖς πονηροῖς]”은 그 행동 자체가 빛이 아닌 모든 안타까움의 절정인 어두운 상태를 의미하는 내용이다. [πονηρός, 슬픈, 불행한, 근심으로 괴로워하는, 괴롭게 하고 슬픔을 초래하는 것, 재난이나 재앙을 가져오는, 가련한, 무력한, 비참한, 초라한, 매력 없는, 부적당한, 쓸모없는, 파멸적인, 해로운]

이러한 마음에서 나오는 “행실[ἔργον, 일, 행위]”이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모습일 것이다.

여기 하나님과 “멀리 떠나”있는 상태도 잠시 살필 필요가 있다. “멀리 떠나[ἀπαλλοτριόω, 사이를 나쁘게 하다(이간), 정을 떼다, 멀리하다, 배반하다]”도 역시 온 갓 안타까움을 다 가지고 있는 낱말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상태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는 바울의 평가는 당연한 것이다.

이런 비극적인 상태에 있던 우리의 과거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22f) 먼저 “이제는”이라는 반전을 볼 수 있다. 과거의 우리의 상태 스스로는 도저히 빛이신 하나님과 관련을 가질 수 없는 상태였음에도 우리의 개선되거나 선한 행위에서가 아니라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전혀 반대의 위치로 옮기셨다는 확인이다.

이러한 역사를 바울은 디도서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라고 확인하고 있다.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으신다. 아무리 죄악과 어둠에서 끌어내 놔도 죄의 습성에 잡혀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스스로 거룩해질 수 없는 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사실이다.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22m) 과거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어있던 상태의 사람이 과연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가능하겠는 가를 인간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면 도저히 불가능한 내용이지만 이런 변화 역시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졌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새로운 출발점 즉, 전환점이다. 죄로 충만한 세상 속에 우리 중 한사람도 스스로 거룩해지거나 의로워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항상 절망하고 좌절될 때마다 우리 각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바로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인 것이다.

주님께서 희생으로 이루시고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22m) 세워주실 것에 대한 확신과 감사를 갖을 수 있는 근거는 로마서에서도 바울이 증거하는 사실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5:10)

믿음에 관한한 어떤 것도 사람에서 나오거나 출발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 아니 가능성조차도 전혀 없다. 그럼에도 십자가 희생의 최종적인 목표는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22b) 하신 것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허물과 죄투성이였던 우리를 흠 없고 라는 표현 자체가 모순으로 들리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에 함께 죽고 새로 태어났다면 충분히 가능한 내용이다.

이제 그 목표는 한층 상승되어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증거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책망받을 것으로만 충만한데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라는 삶의 자리를 옮긴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책망할 것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절대로 정죄함이 없나니 라는 엄청난 약속을 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도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 말에는 역시 종말적인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믿음의 사람들의 거룩함은 하나님의 성령과 함께 이루어져 죄에서 사서 최종적으로는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 그것 가지고 절망하지 말자. 하나님은 오늘 나의 초라하고 연약한 영성을 보시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를 위해 죽으심을 보시고, 보다 미래적으로 온전해 갈 우리 각자를 기대하시며 바라보신다.

다만 한가지 단서를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오늘 말씀의 마지막 부분이다.



Ⅲ.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라(23)

튀르키예(Türkiye)의 지진으로 인하여 몇 만명이 죽는 비극을 겪고 있다. 자연재해의 일은 사실 사람이 손을 쓰기 어렵지만 미리 방비한다면 많은 인명피해를 줄일 수도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같은 진도의 지진에서도 피해가 적은 것은 미리 그것을 방비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결국 신앙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지진은 땅의 흔들림이고 이로 인해서 목숨을 잃는 안타까움은 그래도 육신에 그치는 것이라면 마지막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을 흔들어 넘어뜨리려고 하는 어두움의 역사를 성경은 충분히 경계해 주고 있다.

이런 영적인 지진에서도 흔들리지 말 것을 바울은 오늘 마지막에 부분에서 경계하고 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23f) 지진이 오기 전에 내진 설계를 충분히 한 건물들은 지진에서도 견디고 귀중한 사람의 생명의 피해를 확실히 줄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도 흔들리지 않을 두가지 경계를 주고 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하나님께서 경계하신 것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 바로 믿음안에 거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모범을 보였다고 하면서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전4:6)에 처럼 튼튼하고 견고한 믿음의 터는 바로 기록된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어떤 믿음의 사람들의 훌륭한 영적인 경험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불변하는 약속인 말씀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터 위에 굳게 서서”이다. “터”를 세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인데 이 터를 둬야할 기초가 더욱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믿음[πίστις, 신뢰, 확신, 확실성, 확고한 확신]”이라는 불변하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세상의 고상하다는 철학도 사람들의 경험적 이론도 어떤 것도 하나님의 신실하신 믿음의 터보다 튼튼한 믿음의 토대는 없다. 우리가 믿음의 터 위에 튼튼하게 머무른 다면 거기는 절대로 지진이나 흔들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의 중요한 자세 앞에 “만일”이라는 가정이 주어지고 있는 것도 주목해 봐야할 자세이다. 바울과 하나님은 참으로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기를 원하지만 만약에 라도 그렇지 못하면 역시 이 경계의 의미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만일”이 지켜지기 만한다면 그 결과를 연이어 기록하고 있다.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23m) 이 세상에서 소망은 한상 시간적이고 영원하지 못하지만 복음의 소망은 사라질 수 없는 영원에 속한 것으로 불변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미 v5에서 이 복음의 소망을 거론한 바 있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쓰러지고 흔들릴 이 땅 위에 쌓아 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을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경계된 이야기와 함께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말은 바로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이라는 표현이다.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가 아닌 이상 흔들리는 것은 무엇이든 좋지 않은 것이다. 믿음에서 흔들리든, 서로의 신뢰성에서 흔들림 이든, 소망에서 흔들리든, 땅바닥이 흔들리든 모두 좋지 앉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딤후2:19f)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터는 무엇이든 튼튼하다. 문제는 언제나 견고하지 못한 사람이 만든 바탕이 하나님의 하나님의 견고한 터처럼 역할 하려고 하는 것이다.

바울은 다시 이 튼튼한 하나님의 복음의 일꾼 된 것의 넓은 약속과 자신이 이 복음의 일꾼 된 감격을 다음에 나눌 말씀까지 계속하면서 이 구속의 은혜 증거하는 역할을 자랑하고 있다.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23b)



우리가 매주님의 날마다 주님의 명령으로 기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그것은 모든 불미스러웠던 과거를 청산케 하고 만물과 화평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임을 기억하며 찬양할 이유가 된다.

과거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악한 행동만을 일삼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자신의 생명이신 피 흘리심으로 어둠에서 사 주시고 이제는 화평의 도구들로 하나님을 닮는 거룩하고 흠 없는 하나님 앞에 서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하늘의 백성으로 세워 가심을 순종으로 받아 드리자.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의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림이 없다면 오늘 우리를 통하여 더욱 확산되고 천하만민으로 전파되어 나갈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은혜임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하나님의 친 자녀들로 감당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