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골 1:24~29 2023-02-19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구속의 은혜를 증거하고 다시 건전하지 못한 거짓된 신앙의 교리를 지적하는 사이에 홀연히 그리스도의 복음과 자신의 관계를 논하고 자신의 사역을 증거하는 내용을 본문 1:24부터 → 2:7에 삽입하는 내용을 오늘과 다음의 말씀으로 2회에 걸쳐 나누도록 하자.

비록 자신이 골로새 교회를 세우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 복음의 신비를 자신과 구속받은 성도들이 풍성히 깨달음에 감격하며 복음 속의 모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는데 헌신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심지어는 이 복음의 확산을 위하여는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이나 고통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기꺼이 감당할 것을 각오하고 격려함을 듣는다. 이러한 바울의 각오와 격려는 비단 사도인 바울만의 것이 아니라 같은 구원의 신비를 깨달은 하늘의 백성들인 우리 모두가 함께 감당해야할 성도로서의 책임이며 교회의 사명이다.



Ⅰ. 주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에는 고난도 기뻐한다(24~25)

고난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마치 자식이 잘 될 수 있다면 기쁘게 자식을 위한 고난을 감당할 수 있다는 부모처럼 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한다면 그 고난을 기쁘게 견딜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24f)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을 만난적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럼에도 그들을 위하여 고난을 받게 된다면 이제는 기쁘게 감당할 수 있다는 고백이다.

에바브라를 통하여 골로새 교회의 모든 상황을 알게 된 바울은 과거에는 의구심에 있었다 할지라도 이제는 그들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하는 것은 충분히 그럴 가치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20)는 가르침을 준 바 있다. 고난이나 괴로움이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충분히 견딜 가치가 있다고 증거하는 것이다.

바울은 지금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24f)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미 복음으로 인하여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부자유한 몸이 되어 있지만 그럴지라도 교회와 성도들의 성장이나 온전을 위하여 서라면 기꺼이 자신에게 오는 불이익이나 고통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만 이어지는 내용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24b) 오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위한 십자가의 고난이 아직 완전하게 채워지지 않았다는 잘못된 이해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십자가에 희생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고난을 감당하셨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10:14)

그런 이유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여전히 죄의 세상 속에 남아서 의를 행하며 복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기위한 고난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특히 여기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는 증거는 변함없이 자신은 교회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고백으로 들어야 옳을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무리가 없는 것은 다음 절의 중간에 나타나는 표현을 보는 데도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25m) 여기 “너희를 위하여” 라고 할 때 물론 너희는 골로새 교회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앞 절의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는 확인으로 이해해도 무리는 없다.

v25의 중간을 먼저 말했지만 이 구절 앞뒤의 표현이 교회와 그 교회의 일꾼 된 우리들이 우리 모든 성도들과 특히 직분자들의 사명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25)

참으로 귀중한 구원받은 일꾼들의 사명을 확인해 주고 있는 내용이라서 중요하다. 비록 죄악 된 세상에 교회를 두셨지만 그 교회는 사람들의 의지나 뜻을 완성하거나 어떤 부류의 사람들의 목적을 이루는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되심의 중요성을 헤아릴 수 있다. 우리에게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이나 세상과 구별된 성도라는 직분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이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는 직책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바울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라고 이 일이 말씀을 이룸에서 뿐만 아니라 바로 그 교회의 구성원들을 위한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교회의 어떤 직책이나 역할을 받았거나 가졌다면 그것은 바울의 이러한 고백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런 확신과 사명이 확인될 때 비로소 우리 각자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24b)고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사실 골로새 교회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도 이러 고백으로 임했다면 오늘 우리 교회 속에서의 직분도 명예를 위해서만이 아님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Ⅱ. 비밀을 맡은 자의 자긍심(26~27)

바울은 이러한 사명을 확신하는 이유와 자긍심을 두번째로 고백하고 있는 것을 듣는다. “이 비밀은”으로 시작함을 듣는다. 사실 이 “비밀”은 같은 옥중서신 인 에베소서에 교회와 더불어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뜻과 관련된 표현이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1: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3:9)

“비밀[μυστήριον, 감춰진 것, 신비]”은 1세기 당시에는 종교의 계급에 따라 그 깊이를 다르게 하고 전수할 수 있는 기준이 있었던 것을 의미했다. 일반적으로 “비밀”이란 모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미 공개된 것이라면 이미 그것을 비밀이하고 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신비 종교에서 “비밀”의 보다 높은 경지를 소유한 사람들은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교의 특징은 이 “비밀”이라고 하는 것이 감춰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되었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거듭난 사람이면 누구나 깨닫게 되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공개된 비밀]

무엇보다도 “비밀”은 바로 예언되고 계획되었다가 그 언약대로 이 땅에 인류의 죄를 위하여 제물로 드려질 예수 그리스도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예수께서 어린 아기 때 정결예식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다.

그 때 성전에 있던 시므온이란 선지자가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눅2:34b) 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표적”이라고 증거한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표적”일 뿐만 아니라 바로 이 “비밀”시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27b)고 여기서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밀”은 v26에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라고 하는데 이 비밀이 “만세[αἰών, 영겁, 무한히 긴 시대, 영원] 만대[γενεά, 세대, 시대.]”는 숨겨져 있던 것이라고 증거한다. 만세는 하나님께 속한 영원의 개념이라면 만대는 이 세상의 역사를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영적 세계에서 든 인간의 역사에서 건 깊이 감춰져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라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게는 비밀을 아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억겁의 시간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긍심이고 그럼에도 그 신비를 알게 하는 일에 일꾼이 되었다는 자긍심 또한 대단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오늘 이 “비밀”과 관련된 말씀을 주셨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진정으로 천국의 영광스러운 “비밀”을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천국을 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바울은 이러한 자긍심 때문에 비록 몸은 로마의 철창속에 갇혀 있지만 이런 창조주 이신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된 것에 감격하고 있다. 과연 여러분은 이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27f) 이것은 선택되었다고 자긍심을 가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그들의 후손들이라고 자긍심을 갖었던 유대인들 조차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인 우리에게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아브라함의 후손인 바울이 증거하고 있다.

특이 이 얼마나 풍성한지는 바울의 자긍심이요 천국의 모자람이 없는 영광을 증거하는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서신들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메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롬9:23) 이 말씀 역시 이방이 복음에 접붙여질 것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증거하고 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엡1:18)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받을 영광의 풍성을 증거한다.

하나님께 관한한 어떤 것도 ‘겨우’나 ‘모자람’이라는 표현은 있을 수 없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3:16) 우리 겉사람은 후패한다고 할지라도 속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으로 강건할 수 있다(고후4:16)는 약속이다.

이제 바울은 직접적으로 이 비밀의 실체를 고백한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27b)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자신의 삶의 신비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과연 이러한 신비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지만 누구든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본 사람이라면 같은 고백을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주님께는 비밀의 영광이 풍성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풍성하여 넘친다. 어떤 것도 부족한 것이 없음을 v19에서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라는 표현으로 증거한 바 있다.

[v27, 풍성, πλοῦτος, 충만(분)하다, 가득하다, 흘러 넘치다, 부유함] [v19, 충만, πλήρωμα, 충분, 채우는 것, 채원진 것] 결국 어근이 다르지 않은 같은 의미의 낱말이 사용되고 있다.

창세전부터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신비요 구원의 계획이요 영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풍성히 알고 있다는 자긍심으로 그 비밀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기쁨으로 감사하고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완성될 미래의 비밀을 소망하며 충성하는…



Ⅲ. 주시는 능력을 다하여 일한다(28~29)

마지막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비밀인 복음을 가지고 아직 이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권하고 가르쳐서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의 가치로 완성시키는 바울 자신의 사역을 확인하다.

물론 이 사역이 자신의 배운 지혜나 지식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일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역사하시는 성령과 더불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고백함을 듣는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28f)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복음자체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며 가까운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이다. 그 외의 어떤 것도 구원에 있어서는 효력이 없다.

심지어는 OT인 율법조차도 구원의 과정 속에 등장했던 훌륭한 사람 조차도 그것이 구원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

비록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3)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행하신 은혜만이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구원의 비밀이요 신비이기 때문에 오직 그를 전파하는 것이다.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28m) 이것은 구원으로 사람들을 권면하고 전파하는 방법이다. 그것이 곧 모든 지혜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지혜는 세상에서 난 지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1:17b)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만나고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온 갓 수완을 다 동원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적어도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부하시는 것까지 사용할 수는 없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사뭇 단호하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고전2:6) 당시에 말하는 이 세상의 지혜는 말할 것도 없이 철학을 두고 말하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헬라 문헌에서 이 단어[φιλοσοφία]는 어떤 기술이나 학문이나 지식에 대한 열정, 혹은 숙련성에 대해 사용되었다. 헬레니즘의 철학에 있어서 φιλοσοφία는 거의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기까지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철학에서 λόγος를 절대적인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28b) 예수 그리스도를 죄의 값으로 지불하신 하나님의 기대는 적어도 복음을 통해서 거듭나는 사람들이 형상이나 지식에까지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지는 것을 기대하신다.

이 골로새서 3:9b~10에서 보는 대로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는 바울을 통한 확신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되고 있는 “각 사람”은 본래적인 의미에서 오히려 “모든 사람[πάντα(πᾶς, 모든, 온갖, 각각의 모든) ἄνθρωπον]”이라는 의미이다. 복음이 효력을 가지는 것은 각각이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는 말씀에서 같은 형태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29) 이 마지막 부분에 바울의 힘쓰는 모습은 하나님과 함께 동역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는 당부에서도 본다.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한다”(28b) 말한 다음에 “이를 위하여” 내적으로는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라고 성령의 역사를 따르고 있음을 먼저 증거한다.

그럼에도 성령은 홀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구로서의 사람을 필요로 하고 성령의 열정과 함께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29b) 최선의 순종과 노력을 증거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 도구는 바울 사도 자신인 “나도” 라고 고백한다.

오늘도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자세의 일꾼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사람을 배제하고 홀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지 않으신다. 반드시 그의 복음과 말씀에 순종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이것은 바울과 같은 특정한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오늘날 동일하게 구원받은 우리(나)를 통해서 이루기를 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 영광과 위엄의 자리를 내려와 가장 초라한 자리에까지 낮아 지셨다면 이제 내가 이 은혜로 구원받은 일꾼 답게 죄악의 세상속에서 의를 따라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남은 고난을 함께 감당해야만 한다.

우리 각자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어떤 지혜로도 알 수 없는 영광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알아 영원한 영광의 소망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 답게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이 영광의 비밀을 모르고 썩어질 것들에 목숨 거는 각 사람들에게 생명의 그리스도를 일깨우기 위하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힘을 다하여 헌신하여 구원받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