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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골 2:8~15 2023-03-05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창조주요 구세주이시면서 모든 것에 모든 것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간략하게 찬양했다면 여기서부터는 구체적으로 건전치 못한 잘못된 교리를 반박하여 허황됨을 논증하기 시작한다. 이단에 대한 비 진리적인 논증을 시작하면서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충만에 충만으로 넘침을 모든 것에 부요하신 분이셨다면 이단은 공허하고 허황됨을 증거하고 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시작하여 증거를 충분히 가진 진리였다면 이단은 온 갓 유치한 것들로 적어도 바로 볼 수만 있다면 절대로 사람에게 유익을 가져다줄 수 없는 공허하고 허황된 것임을 증거한다.

먼저 ~v15를 다루면서 v8을 거짓되고 허황됨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됨을 경계하는 내용으로 서론으로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이 그를 순종하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함께 누리도록 허락하신 충만임을 확인한다.

두번째 내용에서는 이러한 모든 넘치는 복이 우리 사람이 한 것은 어떤 것도 없고 다만 구속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기 위하여 단순히 세례와 믿음을 통해서 거듭남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받았음을 증거한다.

마지막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사죄의 은혜는 십자가의 완벽한 구속으로 더 이상 정죄 당할 일이 없을 정도로 정죄의 법에서 완벽하게 자유케 하였음을 통하여 어떤 권력이나 통치의 법으로도 더 이상 정죄 받지 않음을 확인한다.

상당의 불신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하며 사는 신앙의 삶을 ‘종교에 종 노릇하는 것이다’ 라고 비웃는 것을 더러 본다. 그러나 진정한 종 노릇은 오히려 진리를 모르고 온 갓 우상과 전례 되어오는 풍습에 메여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첫마디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8)는 바울의 경계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8f) 앞에서 이미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4b)라는 바울의 호소를 들은 바 있다. 사로잡힌다는 것은 어떤 것에 꼼짝없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사람은 하나님 아닌 어떤 것에도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죄성(罪性)을 가진 대상에 사로 잡힌다면 그것은 반드시 악용될 수 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절대로 불의를 행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모든 것을 다 맡기고 넘겨드려도 절대로 손해 나거나 해 됨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사로잡혔다는 것은 곧 종 노릇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에 사람의 가장 귀중한 자유를 어떤 대상에게 넘겨주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안된다는 경계이다. 심지어 사람들은 하나님께도 온전히 순종을 하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안타깝게도 허황된 것들에 사로잡혀 사는 일들이 더러 있다.

골로새 교회가 사로 잡힐 수 있는 것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였다. 철학이 지혜를 사랑하고 지혜를 넓게 나눠서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면 바울은 절대로 이렇게 경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지혜를 사랑한다는 철학의 미명(美名)으로 속이는 일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흔한 일이다.

또 속임수는 어떤 경우에도 바람직하게 사용될 수 없는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바울을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는 그 경계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8m)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의 정결 예식을 지적하시면서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막7:4) 하셨다.

지혜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 조차도 확인되거나 검증되지 않은 막연한 것을 지켜 오고 있는 전통이 지적을 받을 정도로 많았다면 미개한 나라나 문화들 속에는 그냥 막연히 지켜오는 것들이 더했을 것이다. 결국 이런 것들이 사람의 전통이고 어떤 것들은 생각만 바르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보면 허무맹랑한 것들이 너무 많다.

사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런 모든 어리석은 것들에서 죽은 존재들이다. 그것은 그런데 메일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다. 바울은 사람들 세계에서도 고상하게 여기고 추앙하는 철학조차도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사실 세상에 귀하다는 것을 다 해 봐도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만나고 경험해 보면 그런 것들이 얼마나 유치한가를 깨닫게 된다.

결정적인 이런 것들의 병패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8b)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배우고 본받고 따라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만 따르면 완벽한 대도 사실 이 주님마저 바르게 따르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죄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믿음의 철로역정(天路歷程)은 그리스도를 따름이 시작이요 바탕이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에서 출발하고 점검하고 따라야 한다. 그것이 바른 순종이고 빗나가지 않을 비결이다.



Ⅰ.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을 누린다(9~11)

사람에게서 나온 철학이나 신학적 이론은 언제나 %(percentage)로 따진다. 1세기에 유행했던 영지주의에서도 당시의 철학적 이론을 도입한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몇 %를 가지고 있다고 마치 경영권의 지분(持分- 몫)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거기에 대한 반론으로 이미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1:19)라고 증거한 바 있다. 이렇게 %로 생각한다면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몇 %를 가지느냐?’는 우스꽝스러운 논리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이론 자체를 거절하는 표현이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9) 이 말씀 자체가 인간적인 이해로는 한계를 가지는 표현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것이 넘치도록 가득 차 있다는 표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성의 모든 속성들이 육체로 거하신다는 것이 이원론적인 이해로는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역사라는 것은 인정한다면 어려울 것도 없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10f) 이런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를 순종하여 영적인 하늘의 가치로 거듭난 사람들이라면 역시 같은 충만이 주어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요한 사도는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고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모자라는 데서는 나눠 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만 계속 솟아나서 넘치는 상황에서는 충만하게 채워 짐이 절대로 한계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가 이것을 믿고 확신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눅6:38f) 다만 우리가 이 은혜의 역사를 믿지 못하므로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10b) 주는 데는 반드시 권세 즉 소유권이 있어야 하고 행할 수 있는 권세가 있어야 하는데 골로새 교회에 잘못된 가르침은 천사 숭배에 대한 이론까지 등장함을 뒤에서 볼 수 있다(18~19).

천사들도 계급적인 이치로 이해하고 지금 우리의 시대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천사의 우두머리 정도로 이해하는 안타까운 가르침이 존재한다. 결국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을 함께 가지시는 데는 어떤 권력조차도 제제할 수 없는 이유는 1:16에서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 한 것처럼 권력에 있어서도 최고 위에 계시기 때문에 한계를 가지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11) 이것은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이 충만을 어떻게 누리게 되었는가에 대한 증거이다.

할례는 율법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언약을 육체에 세기는 것으로 아브라함에게서 부터 명령되어졌다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창17:13)

그러나 육체에 새겼던 언약은 육체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고 하나님은 다시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렘4:4; 신10:16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 하여 마음의 할례 즉, 죄와 연결된 마음을 자를 것을 당부하셨다.

그럼에도 이 마음의 할례는 사람 스스로는 불가능한 율법의 한계를 드러냈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하여 거듭나는 복음의 역사로 가능했음을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라고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그것이 결코 율법이나 사람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고 다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Ⅱ. 세례와 믿음으로 일으키심을 받았다(12)

이 말씀은 바로 앞에서 말한 영적인 할례의 구체적인 설명이다. 이 한 절 속에다 죽어 장사됨과 부활시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늘의 사람들로 세움을 입었음을 완벽하게 표현하여 마음의 할례를 지적하고 있다.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믿음의 행위를 단순히 상징으로 여길 것이냐, 실제적인 삶으로 이해할 것이냐 하는 두가지 측면의 이해이고 이런 이해에 따라 사실이 달라진다. 위험한 것은 바로 전자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된 말씀이나 교훈들을 단순한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의미만 헤아리면 된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생명도 천국도 은혜도 상징일 뿐이기 때문에 사실이 될 수 없다는 데서 종교행위에 불과한 모든 것이 되고 마는데; 상징과 사실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도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12f)라고 하여 각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분명한 약속을 상징으로 받아들이면 사실로는 죽은 것이 아니다.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이 초보적인 단계에서 실패하고 또 이런 것은 지도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누구든지 세례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도구와 역사를 통해서 반드시 죽어야 한다.

문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척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면 더 이상 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6:2~3)

이 첫 단계가 중요한 것은 이 첫번째 죽음이 사실 적이어야 다음의 약속이 바로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분이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사실적인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가능하게 되는데 죽지 않은 상태에서 부활을 기대한다는 것이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죽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 죽음에 나를 내 드려야 하고 내가 주님과 함께 사실적으로 죽었을 때 당연히 그리스도의 부활에 하나가 될 수 있다.

여기 중요한 역사는 역시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인데 이것은 앞에서 경계했던 것처럼 절대로 관념적인 것 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것처럼 나 또한 일으키심을 확신하는 것을 표현한다.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부정과거형으로 부활이 과거에 일어난 일이며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귀중한 믿음의 이치가 상징이 아니라 사실이 되어서 죽은 우리 각자에게서 아무도 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새 생명 역시 주님과 함께 죽었던 나의 것으로 누리는…



Ⅲ. 십자가를 통해서 정죄에서 자유케 하셨다(13~15)

v12의 세례로 죽고 삶을 좀더 확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이런 이치는 신앙의 체계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1세기 교회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문제이기 때문에 NT성경 속에 자주 언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13) 사실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존재로 취급될 수 없었던 골로새 교회와 같은 이방인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바울 사도는 역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도 같은 교훈을 주고 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5)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

결국 하나님과의 언약인 할례를 받지 못한 무 할례의 상태에서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엡2:2)라는 상태 자체가 하나님의 생명과는 관계없는 죽은 상태에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런 비극적인 상태에 있던 이방인인 우리들에게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13)라는 확인은 “그와 함께 살리시고”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케 하신 은혜를 증거하고 있다.

단순히 “죽었던 너희”와 함께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함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거듭난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포함한 주님의 은혜[사하시고, χαρίζομαι, 값없이 주다, 호의를 베풀다, 용서하다]를 증거한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14f) 한마디로 사람의 죄를 정죄하는 율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실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졌지만 이 정죄의 법은 결국 법을 알건 모르건 정죄를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로마서에서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2:12)

“법조문으로 쓴 증서[χειρόγραφον, 손으로 쓴 것, 자필증서, 특히 법적인 기록이나 증서]는 범법자들에게는 불리하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법조항을 토대로 서로 간에 서약한 서로에게 효력을 가지는 문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법을 어기실 리는 만무하기 때문에 분명히 사람에게 불리한 이 증서를 전혀 문제를 겪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없애 버리신 것 자체가 은혜이다.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14b) 없애 버리신 것도 이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①“제하여 버리다[ἐξαλείψας, 씻어버리다, 문자적인 의미로는 석회를 바르다, 하얗게 회칠하다, 또는 무엇인가를 위에 칠하다, 비유적으로 씻어내다, 흔적을 없애다, 지워버리다 멸하다.]”

②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말씀 그대로 법의 효력을 완전히 죽여 버렸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더 이상 정죄하거나 할 수 없도록 폐지해 버린 법을 의미하고 이것은 당연히 정죄의 법인 [율법]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15f) 세상의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고 드러내셨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범죄케 하는 영적세계의 악한 세력들의 범죄 행위를 들어내고 더 이상 범죄를 조장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을 말씀하신다.

그렇게 하신 역사는 역시 저들조차 어리석게 여겼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것이다.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15b)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결국 인류를 범죄케 하는 어둠의 세력을 잡은 자들의 수치를 드러내시고 그들에게서 권력을 회수하신 놀라운 영적 세계의 질서를 바로 세우신 능력의 역사인 것이다

나에게 사람의 전통이나 세상의 초등학문과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극복하려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속의 충만은 누구보다도 나를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 죄의 사람인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의 부활에 하나가 되어 이제는 허약한 삶이 아니라 이기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셨다. 이런 엄청난 은혜의 약속을 오늘 나도 누리고 있는가?

이제 정죄의 법은 지워지고 치워졌다. 나를 위한 주님의 희생으로 이루셨다. 그럼에도 이런 확신이 약한 이유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