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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골 2:16~19 2023-03-12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대부분의 이단들은 종교나 문화 그리고 전례 되어 오는 풍습의 혼합이다. 골로새 교회나 아시아의 이단들도 다르지 않았고 특히 복음을 빙자한 이단들은 이미 폐기된 율법을 적당히 섞어서 복음인지 율법인지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이다.

이런 이유에서 성경은 건전한 신앙을 위해서는 시대적인 바른 이해와 구분이 반드시 되어져야 함을 확인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도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전례 되어 오는 전승들과 적절히 섞어서 불확실한 새로운 종교적 교리를 만들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법인 양 혼란케 만들었다.

여기 골로새 교회에도 그림자였던 율법과 천사숭배 같은 불확실한 교리들이 건전한 신앙을 밀어내고 교우들을 혼란케 만들었고 이런 옳지 못한 종교적 계율이나 행위들을 바울은 항목들을 들어서 반박하고 있음을 읽는다.

이런 일들은 갈라디아서를 쓰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갈라디아서에서는 철학이나 전래된 관습 보다는 주로 율법이 복음을 덮고 있었던 것은 이 지역에 특히 유대인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이런 문제는 다른 전통이 강했던 지역에서 주로 볼 수 있고 무속적인 성향이 강한 우리 나라 역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영과 진리를 대부분의 경우 예배에서만 적용하려고 하는 것이 일반이지만 신앙의 전반에 적용해야 하는 것이 맞다. 신앙에 바르게 조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영과 진리이고 영적인 것의 바른 판단도 역시 진리인 성경으로 검증할 수 있다.

문제는 항상 크게 우려스러운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사소한 데서 출발할 수 있기 때문에 늘 바른 믿음을 위하여 신앙적으로 깨어 있는 것이 필요하다. 심지어는 교회를 더욱 활성화시키려고 주어진 직분들이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우리의 시대에도 보게 된다.



Ⅰ. 율법으로 인한 판단을 받을 필요가 없다(16~17)

대부분 먹고 마시는 문제나 날이나 절기에 대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 밖에서 규제되는 것들이 많다. 물론 이런 금지 조항은 OT의 율법 조항에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복음이 완성된 후에는 이 그림자 적인 것들조차도 대부분 의미를 잃었다.

특히 오늘 말씀의 초두에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거론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의문에 속한 율법의 완성과 그 은혜를 인하여 우리 모두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 은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말씀이다.

“먹고 마시는 것과…”(16f) OT의 제사 법전이라고 하는 레위기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결한 짐승이나 곤충 그리고 물고기까지도 규정되어 있었고 구체적으로 11장에 주로 기록되고 있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47) 기록되고 있다.

물론 이런 말씀은 당시의 위생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건강을 위한 위생적인 섭생을 구별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먹고 못 먹는 것들을 말씀하신 다음에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44) 경계하셨고 이를 베드로 사도도 인용한 바 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5~16)

레위기7:20~27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생명으로 여겨지는 피를 먹지 말 것을 명령하시고 짐승의 기름도 먹지 말 것을 증거하셨다. 민수기6:3~4에서는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의 법을 말씀하시는데 이스라엘에서 가장 흔하게 마시는 포도주는 말할 것도 없고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라는 금지명령까지도 볼 수 있다. 물론 제사장들에게 구별된 회막에 들어갈 때는 포도주나 독주도 금지되는 항목이었다(레10:9)

물론 복음 시대 이후로도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로 고린도 교회 같은 경우에는 우상의 제물에 대한 경계가 주어지기도 하였고(고전8, 10장) 이방 출신의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교회가 금지한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행21:25) 라는 내용도 있다.

이번 문제가 이방 교회에서 공공연하게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로마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에 거론이 되고 있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14:2~3)

그러나 같은 옥중에서 쓴 것으로 보는 디모데전서에서 금욕주의에 대한 경계를 주면서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3~5)는 교훈도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다.

결국 복음으로 자유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성도 간에 덕이 되며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면 신앙 때문에 금하는 음식은 하나님의 권위와 명령에 어긋남이 없다면 금할 것들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오늘 날에도 음식의 금기사항은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방 종교에서나 또는 육신적인 건강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해당됨을 보게 된다.

정통 불교에서는 기본적인 식단에서부터 제외되는 식재료들이 있다. [五辛菜, 파·마늘·달래·부추·흥거(양파)] 이런 음식을 먹으면 입 주위에 귀신이 달라붙는다고 하며 생으로 먹으면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고 삶아 먹으면 음심(淫心)을 일으켜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한다.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16m) 이 역시 OT 성경에서는 지켜야할 날이나 절기들이 있었다. 유명한 유대인들의 절기는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과 같은 세 절기로 특별히 빠져서는 안될 절기들로 명령되어 있다.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신16:16)

이스라엘과 안식일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성일로 지키도록 10계명에서부터 정해져 있었고(출20:11) 달의 시작과 보름 날도 기념하도록 정한 날로 기록되고 있다. “초하루와 보름과 우리의 명절에 나팔을 불지어다”(시81:3)

“또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에 모든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가 명령하신 규례의 정한 수효대로 항상 여호와 앞에 드리며”(대상23:31; 대하31:3; 겔45:17)

그럼에도 이 안식일도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118:22~24) 라고 주님의 날로 변화된 사실을 시편기자는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당시까지도 지켜졌던 이러한 날에 대한 기념에도 혼란이 없을 것을 당부한 바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롬14:5~6)

여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그것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것이 옳다는 가르침은 아니다. 물론 여기에 요점도 교회 안에 지체 간의 화평과 덕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16b) 여기 비판받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물론 앞에서 거론하였던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이다.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는 좀더 가까운 표현은 ‘심판하지 못하게 하라’는 의미로 ‘판단받지 말라’는 더 가까운 표현이다.

물론 어떤 일들을 두고 평 할 수는 있지만 판결할 권한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 드려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이런 이론에 대하여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갈4:9~10) 라고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한 바 있다.

결국 과거의 율법에서 이건 주변의 종교적이거나 문화나 전승으로 인한 것이었든지 간에 그런 것들로 결정적인 비판하지 말아야 하고 심판 받지 말아야 할 이유는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17f)라는 이유에서이다.

과거 OT 율법 속에 있었던 모든 것은 실체가 아닌 장래에 오시게 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희생으로 완성될 교회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신앙에 있어서 보다 분명히 구분해야 할 일이 바로 이 그림자와 실체의 분별이다. 아직도 많은 부분과 사람들이 이 그림자와 실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문제가 생기고 건전치 못한 사건들이 생기는 것이다.

어쩌면 이 첫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한마디가 바로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17)는 말씀이다. 사실적인 실체가 있는데 아직도 그림자를 중요시하고 그림자에 치중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것이고 유치한 것이다.

앞에서 v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했는데 여기 v17의 “몸[σῶμα]”이나 v9의 “육체[σωματικῶς]”는 같은 낱말이다.

예언되거나 명령되어진 모든 것의 실체로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실적인 몸으로 오셨는데 상징이나 비유를 따라 행하는 어떤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Ⅱ. 하나님 외에는 숭배의 대상이 없다(18~19)

여기 v18은 모두가 신앙에는 합당하지 못한 표현들로 가득 차 있다. ‘꾸며낸 겸손, 본 것에 의지하여,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 등등 모두가 임마누엘을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바르지 못한 항목들로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탄식하실 행동들 뿐이다.

그러므로 v19에서는 그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에 붙어있지 않은 존재들로 결국 그리스도께 붙어 있어야 힘을 공급받고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실 것이라는 교회의 원론적인 원칙을 설명하고 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18f)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도 종교지도자들을 강하게 책망한 이유는 그들의 거짓된 경건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도둑질하려는 것들이었다.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23:3, 5~7)

신앙의 첫째도 그리고 마지막도 “겸손”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라고 주님을 따라 배우는 것이 바로 겸손임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진실 된 겸손은 사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내봐야 그 진실을 알 수 있다.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거짓교사들은 아무래도 겸손을 가장하고 그들의 마음을 도둑질하려고 했던 것 같고 대부분의 건전하지 못한 교주들도 겸손을 가장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거짓된 겸손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사람의 자세이다. 말만으로의 겸손이 아니라 사실적인 겸손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데 그것은 연출되지 않은 자연적인 겸손으로 우러나오는 겸손이다.

천사숭배는 1세기에 건전하지 못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가르침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도 이것을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어떤 존재도 끊어낼 수 없음을 말하면서 천사와 영적인 존재들을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대략적인 천사숭배의 유형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것보다 천사를 통해서 섬기는 것이 더 유효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으로, 사실 천사는 신비한 존재들로 성경에서도 천사들의 존재와 활동을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하나님과의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중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인 OT 시대에는 대부분 천사들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중보하고 또 사람들이 이 천사를 하나님으로 오해하기도 한 일들은 적지 않다.

그럼으로 이 천사 숭배도 엄밀하게 말하면 OT 율법시대의 잔재라고 볼 수 있다. 주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와 계실 때에는 우리의 완전하신 중보자이자 보혜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할 하셨다.

복음을 완성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대로(요14:16)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이 역사의 마지막 때까지 우리의 완벽한 중보자로 보혜사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천사는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일꾼이긴 하지만 우리의 중보역할을 하는 존재는 될 수 없다.

거짓 교사들에 의해 가르쳐진 잘못된 교리를 지키게 된다면 최종적으로는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는 경계는 좀 더 직접적으로는 그러한 잘못된 교리를 따르지 말라는 얘기이다.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18b) 여기에도 거짓 교사들의 행위가 나타나고 있다. 모두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답지 못한 모습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믿음을 정의한 바 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 육신의 본 것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믿음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가시 떨기 불꽃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뵙지 못했고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은 한계가 있고 특히 영적인 것은 더욱 그렇다.

특히 이단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이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이유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은 나타난 현상이든지 신비적인 어떤 것을 본 것에도 신앙을 의존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언약에 의존하는 사람들이다.

찬545:1.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2.이 눈이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이미 얻은 증거대로 늘 믿으며 이 맘에 의심 없이 살아갈 때에 우리 소원 주 안에서 이루리(후렴)

골로새의 거짓 선생들의 또 다는 문제는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여기서도 바울의 가르침을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 한다니 그대로 허풍일 수밖에 없다. 신앙이 빗나가는 가장 쉬운 지름길은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과장하는 것도 옳지 못할 터인데 육신의 생각이나 판단을 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위험한 신앙의 행위이다.

다음 v19은 좀더 쉬운 이해를 위해 다른 번역본을 인용하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그는 머리에 붙어 있지 않습니다. 온몸은 머리에 붙어서 마디와 힘줄로 영양을 공급받고 서로 연결되어서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라나는 것입니다.”(19표준새번역)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19f) 이 표현은 거짓 교사들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앙의 출발이며 명령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는데 그들은 이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지 아니한다는 표현은 주님께 붙어있지 않다는 단적인 표현이다.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19b) 바울의 같은 옥중 서신이면서 교회론이라고 하는 에베소서에서 같은 표현을 볼 수 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6)

이것은 단순이 우리 몸의 구조와 성장을 묘사하는 것이지만 영적인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성장도 결코 다를 수 없다. 머리는 바로 생명의 사령탑과 같다. 그 머리의 지시에 따라 몸 속에 일어나는 모든 활동들이 명령되고 진행하게 되어 있다.

이런 원리에서 본다면 골로새 교회에 들어와 있는 이단들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이유는 그들은 생명의 출처인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은 상태 때문에 이미 죽어 있는 상태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어 있는 상태는 당연히 썩게 되어 있어서 그 부패는 점점 더해 갈 것이고 마침내는 소멸되고 말 것이라는 가능성도 의미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이만큼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신앙하는 우리는 신, 불신 간에 어떤 사람들에게라도 비판을 받지 않도록 소신과 실천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결국 진리에 합당하지 못한 믿음으로 우리나 각자로 인하여 비판을 받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고 주님께 욕이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 생활의 어떤 것이라도 사람들에게 꾸며서 보이는 부끄러운 모습은 없어야 하는 것은 물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아닌 다른 것들이나 주관적인 경험을 과장하는 것도 조심해야할 부분이다. 믿음생활 하는 모든 능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로부터 지속적으로 받아 함께 천국에 이르도록 자라가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