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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엡 4:25~32 2024-01-14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바로 앞에서는 하늘로부터 거듭난 사람의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이야기했다면 이제부터는 그러한 경건이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어떻게 관계되어져야 하는 가를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권면을 한 후에는 다시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것을 연이어 당부하고 있다.

이 마지막 시대라고 하는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1세기나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구속의 역사를 위해 오셨을 때 당시의 철학적 사상과 더불어 종교는 대단히 관념적인 형태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책망을 하셨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마15, 23장).

세상적 거짓을 버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삶의 과제로 선택한 거듭난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신앙적 삶은 그 진리에 합당한 삶이 되어야 할 것을 바울 역시 당시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에베소 교회나 역사 속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 역시 우리가 믿고 신앙하는 신앙적 과제들이 실제로 우리 삶을 움직여 가고 있는가 하는 점검이 반드시 필요하고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희생하신 그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서로 지체 간은 물론이고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 그대로 실천되어야 할 사실적인 삶의 과제이다.

과거 세상의 육신에 속한 것들을 벗어버리고 하늘로부터 주어진 신령한 것들로 새롭게 입을 것을 권면하는 내용들이다.



Ⅰ. 진리의 삶을 실천하라(25~27)

육신이 중심이 되던 과거 어두움의 세력에 이끌려 다니던 삶의 관습은 이제 진리를 순종하는 삶에 더 이상 허용되어서는 안되므로 버리고 서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끼리 참된 언어와 삶을 당부하고 있다. 먼저 “그런즉”은 앞에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24)은 사람이라면 이라는 이유에서 출발한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25) 이 말씀은 OT의 스가랴서에서 인용한 듯하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슥8:16)

같은 옥중서신에서도 위로부터 거듭난 사람이라면 거짓 것 즉, 옛 것을 더 이상 삶에 가지고 있어서는 안됨을 당부한 바 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골3:9) 여기 “거짓[ψεῦδος,는 ἀλήθεια, 참(진리)의 반대]”은 의미로 에덴에서부터 하와를 속였던 사탄의 전유물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마귀 사탄의 습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비정상적인 상태인 것이지요.

특히 여기 “버리고[ἀποτίθημι, 벗어버리다, 버리다]”라는 표현은 v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할 때 사용된 “벗어 버리고”라는 낱말과 꼭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 특히 v31에 다시 한번 경계하고 있다.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이제 이러한 내용은 좀 더 내면적인 역할로 들어간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26)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1:19~20) 함으로서 분을 내는 것이 영적인 삶에 결코 유익이 되지 못함을 경계한 바 있다.

특히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26b) 한 것은 다른 이해를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루의 시작이 아침이지만 유대인들은 해가 지는 것이 다음 날이고 또다른 해가 지도록이라는 이해는 잠자리에까지 분한 마음을 가지고 눕지 말라는 의미로도 이해가 된다.

야고보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는 부정적으로 표현하였지만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가려버리는 것이 분노이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에서도 “오래 참음”이 나타나고 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27) 결국 거짓과 분냄을 경계하는 결정적인 이유이다. 이 에베소서의 뒷편에서도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1)하여 경계를 주고 있고 베드로 사도 역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라고 하여 기회를 노리는 마귀 사탄을 경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인 일을 저지르고도 태연히 있을 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독특한 경계를 주고 계시는데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삼하12:13b~14f) 라고 하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반대로 비방거리를 얻게 해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다. 우리는 욥이 시험을 당할 때에 사탄의 참소를 들을 수 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1:9~11, 2:4~5)

그러나 욥이 끝까지 범죄치 아니함으로 마귀 사탄은 책망받고 욥은 오히려 갑절의 복을 받는 것을 모범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지 못하면 결국 마귀 사탄은 그러한 우리를 두고 하나님의 구속을 비웃고 비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거짓 것을 버리려는 애씀보다는 적극적으로 참된 것을 행하고 말하는 자세야 말로 의의 백성으로 당당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Ⅱ. 수고를 아끼지 말며 덕을 세우라(28~29)

거듭난 사람이라면 크게는 사회에나 국가는 물론 가까이는 가정에 까지도 소모적인 삶이 아니라 생산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증거하고 가장 흔하게는 언어 생활에서 조차도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는 말들을 사용할 것을 당부한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28) 이 말씀 역시 먼저는 과거의 세상의 삶에서 흔했던 일들의 부정적인 부분을 말하고 이제는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위해서 힘쓸 것을 주문한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28f)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10개의 계명에서 조차도 경계하는(8th.) 항목으로 “도둑질하지 말라”(출20:15)는 것이었고 우리 주님이나 바울 사도 조차도 이런 계명들을 인용한바 있다(막10:19; 롬13:9).

특히 “도둑질[κλέπτω, 훔치다, 속이다, 속여 빼앗다, 마법을 걸다]”은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훔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게으름으로 다른 사람들의 비용으로 살아가는 남에게 의지하여 얹혀 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반절에 이어지는 내용이 이를 더욱 분명히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발장이라는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은 배고파 빵 하나를 훔쳤다가 중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살다가 나와서 나중에는 시장(市長)까지 되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말년을 사는데 이것 역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삶과 이후의 삶을 묘사하는 작품이기도 할 것이다.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28b) 이제 혜택만을 받던 자리에서 오히려 주는 사람이 될 것을 당부하는데 사실 주고 끼치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기 쓰인 “돌이켜[μᾶλλον, 더욱 더, 오히려]”는 반대적인 의미이다. 신앙이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의 기적만을 의지하여 수고는 덜하고 풍성히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합당하지 않다.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많은 경우 사회적인 약자들이 있는데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자신의 빈곤에서 스스로 자유 할 수 없는;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마26:11f; 막14:7f; 요12:8f)하신 것처럼 도움을 주려고만 하면 구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늘 있다. 여기 “가난[χρεία, 필요, 결핍, 부족]”이라는 말도 초대 교회 속에서 늘 도움의 대상이었음을 볼 수 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2:4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4:35)

도움은 항상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해야만 한다. 바울은 이런 것에서도 모범이었다.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면서도 손수 일하여 자신의 생활에 소용되는 것을 스스로 감당하였다(행18:3).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은 수고를 덜하고 남의 손으로 수고하는 것을 누리기를 원하는 것을 보는데 이것도 도둑질과 다르지 않은 삶의 자세이다. 특히 믿음 생활에 있어서 잘 못된 자세를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후10:15f)고 바울은 지적한바 있다.

이런 입장에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는 당부는 생산적인 삶을 당부하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는 ‘노동의 목적은 부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궁핍한 이웃을 돕는 선한 일에 있다’라는 말을 한다. 물론 “선한 일(ἀγαθός)”이란 하나님의 속성으로 부족한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주는 자세 자체가 하나님의 모습인 선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둔 사람이라면 그 아버지의 성품을 본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 행동이면서 좀더 흔한 삶의 자세에서 언어생활이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29) 여기서도 먼저는 부정적인 경계를 준 뒤에 적극적인 권면을 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29f) “더러운[σαπρός, 썩은, 부패한, 쓸모없는, 매우 나쁜, 무가치한]” 말이란 불결하고 냄새가 나는 것 보다는 삶에 유익이 안되는 무가치한 말을 의미하는 것이 독특하다. 사실 유대 사회에 있어서 언어생활에 재치나 위트 있는 말은 삶에 활력을 주는 것으로 권장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 관계나 지체들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말의 구사는 경계되고 있다.

대신에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29m)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언어생활이다. 1세기에는 철학에서조차 덕을 소중히 여기고 언제나 덕을 위한 삶을 권장하여 개인의 덕(τέχνη)과 전체 사회의 덕(ἀρετή)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여기 [오직]이 먼저 쓰이고 목적은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이며 방법은 선한 말을 하여이다.

그럼에도 여기 그리스 본문에서는 [덕]이라는 낱말은 사용되지 않았고 다만 “세우는[οἰκοδομή, 세움, 지음, 쌓아올림]”이라는 말만 쓰여 있다. 결국 믿음의 사람들이 주변의 지체들의 믿음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말의 표현조차 성령을 의지한다면 이어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29b)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말씀을 순종하여 죄를 해결 받는 은혜를 누리기를 바라신다. 골로새서에서는 좀더 적극적이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4:6)

바울 사도는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롬14:15)고 하여 먹는 음식으로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을 경계했다면 말 한마디로 형제, 자매의 믿음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주변의 듣는 모든 지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Ⅲ. 과거 세상적인 삶을 버리고 거듭난 삶을 실천하라(30~32)

앞에서 연결되면서 덕스럽지 못한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끼칠 뿐만 아니라 그것은 성령을 근심되게 하며 최종적으로는 자신을 더럽히고 손해를 끼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여기서도 과거에는 자연스러웠던 덕스럽지 못한 것들의 금지와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지체들과 교회안에서도 함께 누릴 것을 당부하며 마무리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30)우리 말 번역은 조금 약하다. 원문에는 “하나님의 성령”이기보다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령(τὸ πνεῦμα τὸ ἅγιον τοῦ θεοῦ,)”으로 나타난다. 죄를 졌던 과거의 사람의 행위들과 분명한 구별을 위하여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령”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 치시는 것이 성령의 주 임무 중의 하나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인치신 성령께서 그의 심령을 성전삼고 계신다.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성령의 시대가 아닌 율법의 시대인 OT에서도 같은 표현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사63:10f)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이 은혜에 합당하지 못한 과거의 육신을 따르는 행동을 할 때는 “하나님의 성령”은 그 사람 안에서 근심하시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오히려 바울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는 적극적인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은 오히려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30b)는 확인을 주고 있다. 우리 속에 거듭남으로 오신 성령은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죄와 상관없이 그를 기다리는 자들을 위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속에 인치심으로 와 계시므로 육신을 따르는 것보다 언제든지 성령을 따라 행할 필요가 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31)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안되는 반드시 버려야 할 온 갓 부정적인 죄의 사람의 전유물들이다. 여기에 나타난 항목들은 하나님을 외면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들과 같은 항목들이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롬1:29) 또 같은 옥중서신 인 골로새서에서도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3:8)고 같은 경계를 주고 있다.

특히 맨 앞에는 “모든[πᾶς]”이 붙어 있어서 이런 유형은 어떤 것이든지 버려야 함이 강조되고 있다. ①악독[πικρία, 씀, 쓴맛, 성질이 잔혹함, 쓴 쓸게],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롬3:14); ②노함[θυμός, 격정, 진노, 격노, 분내서 크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표현하는 말이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눅4:28); ③분냄[ὀργή, 충동, 자극, 분개, 진노], 이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표현으로 쓰여졌다; ④떠드는 것[κραυγή, 외침, 고함 소리, 애통], 크게 떠들새(행23:9ff); ⑤비방[βλασφημία, 비방, 중상, 모독, 욕설],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딤전6:4b); ⑥악의[κακία, 나쁨, 괴로움, 고생, 불행, 파멸], 온 갓 불행을 표현하는 낱말이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행8:22f)

이런 믿음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모두… 함께 버리고” 라고 거의 명령에 가까운 권면을 주고 있다. 그러나 버리면 다시 가져야 하는 것들을 여기서도 역시 연이어 당부되고 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32)

여기 나타난 덕목들은 앞구절의 세상의 육신에서 나타난 것과는 대조적으로 주로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서로 친절하게[χρηστός, 온화한, 유쾌한, 인자한, 선한] 하며…” 주로 인자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낱말이다.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6:35b)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2:4) 역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러한 성품을 닮아야 한다.

“…불쌍히 여기며…” [εὔσπλαγχνος, εὖ 좋은, 좋게 + (σπλάγχνον, 심장, 마음, 사랑) 부드러운 감정, 특히 친절, 자비심, 동정심] 사랑에서 나오는 동정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정서와 감정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라야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는 당부나 부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울 것이다.

지금까지 나누고 있는 이 에베소서 즉, 교회론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창세전부터 예정된 교회 속에 거듭 난 하늘의 사람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남기 위해서는 옛 것 세상에 속한 것들을 모두 벗어 버리고 하늘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들로 덧입을 때만 가능하고 그것은 개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지체의 관계에서 더욱 그러해야 함을 당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