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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엡 5:1~7 2024-01-21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누구든지 자식은 반드시 그 부모를 본받을 수밖에 없고 어머니이든 아버지이든 얼굴이나 체형도 닮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일반적으로 생활 속에서 보고 있는 사실들이다. 이것이 현 세상의 육신의 삶 속에서뿐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서나 가치에서도 다르지 않음을 오늘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스스로를 말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어디에서 보더라도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그 아버지의 성품과 모양을 숨길 수 없을 것이라는 바울 사도의 사실적인 증거이다. 오늘 첫 v1~2 속에만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ἀγαπητός㉭, ἀγάπη㉤, ἀγαπάω㉢] 무려 3가지 형태로 언급되면서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앞에서도 그러셨던 것처럼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이면 반드시 나타나야 할 모습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제시하며 권면하고 소극적으로는 빛의 하나님의 자녀라면 있어서는 안되는 어두움의 자세와 열매들은 경계하고 있다.

하늘의 왕자요 공주로서 합당한 모습은 미래의 영원 속에서뿐만 아니라 아직 육신에 있는 현실 속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게 되어 있음을 격려하면서 그렇지 못한 과거의 부정적인 삶의 자세는 장래적으로 어두운 결과를 제시하는 것으로 연결되고 있다.



Ⅰ. 사랑받는 자로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1~2)

여기 첫 절의 내용은 연이어서 이어지는 이 세상이나 어두움과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오늘의 제목과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당부이다. 만약에 부모를 본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먼저 “그러므로”는 이어지는 다음절(2)과 함께 바로 앞의 v25~32에 나타난 하나님을 본받는 삶에 연결되고 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세상에서 빠져나와 하늘의 백성들이 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3) 한 것처럼 미움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되어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과 다른 의무이기도 하고 당연하기도 한 삶의 자세가 바로 사랑받는 자녀 다움이 요구되고 있다.

거듭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고 성령께서 인정하심을 바울은 증거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6) 그럼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는 당연히 그의 자녀됨의 됨됨이가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과 원수 된 죄악의 우리들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아들을 주셨다(롬5:8). 이런 모든 것은 세상의 윤리 기준을 넘어서는 모습이고 그의 자녀들에게도 그러해야 함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상보훈에서 가르치신 바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5:44~45f)

“사랑을 받은 자녀같이” 우리 사람들은 사실 어두움과 미움에 더 익숙하다 보니 사랑받고 산다는 사실의 인식 자체가 쉽지 못하다. 우리는 어떤 조건이나 형편에 관계없이 변함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롬8:31~39)을 변함없이 넘치도록 누리고 있음에도 그 사랑을 사실적으로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 말씀의 도전은 바로 너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고 있는 엄청난 사랑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의식해 보라는 것이다. 왜, 우리는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나를 사람들이 사랑해 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부모, 자녀, 친구, 동료, 심지어 교우들) 이미 나는 넘치는 사랑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고 입고 살고 있음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랑과 연결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명령하셨는데 자비 역시 사랑처럼 사실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하면 별로 의식을 못하는 부분이다. 사랑의 아버지요, 바울은 다시 우리에게 격려하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고후1:3)

“그러므로 사랑을 받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1)라는 오늘 주님의 당부가 확신과 도전을 끼치는 모두 되시기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2f)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으라 했던 권면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는 사람 속에 가지고 와서 행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가운데 살라고 다시 도전한다.

앞에서 인용한 바 있지만 우리가 사랑 가운데 행해야 할 그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하신 바로 그 사랑이다.

이제 그 구체적인 모습이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2b)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영광과 위엄과 존귀를 버리시고 기꺼이 종의 모습으로 사람이 되신 것은 오직 “우리를 위하여”였고 드려진 대상의 죄에 대하여 진노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께”이다.

그 드려진 구체적인 모습이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인데 “향기로운 제물”은 OT의 모든 합당하게 드려지는 제사로 대표적으로 “그 숫양 전부를 제단 위에 불사르라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요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출29:18)고 나타나고 있다. 같은 옥중서신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연보를 이와 같이 표현한 바 있다. “…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4:18b)

“희생제물[θυσία, 희생제사, 제사드리는 행위]”은 짐승을 잡아 피를 받고 그것을 제단에 뿌리는 주로 속죄의 제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히브리서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는 대표적인 말씀과 더불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리신 희생의 제사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2f) 한 것처럼 항상 이러한 주님의 희생의 자세로 우리도 살 것을 도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가 다름 아닌 로마서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과 다르지 않은 교훈이다.



Ⅱ. 합당치 못한 것은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3~4)

앞에서는 우리 아버지 이신 하나님을 본받을 것을 당부하였다면 여기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마땅한 삶의 모습을 먼저는 부정적으로 그리고 다시 적극적인 자세로 권면하고 있다. 어찌 보면 빈부의 격차가 크고 부요했던 그레코로만 시대의 부자나 권력을 가진 자들의 부도덕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에서 비롯된 성적 부도덕에 대한 경계를 주고 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3) 당시에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인 기준을 잃어버린 탐욕과 수치를 모르는 일들이 그러한 세상과 구별된 성도들에게는 있어서는 안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 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1:1의 남녀관계를 혼인이라는 언약 속에서 아름답게 하시고 합법화하셨다. 그러나 문화가 발달하고 부요해질수록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허물어지고 어겨진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여러 아내가 가능하고 남자에게도 그것이 역사 속에 나타난다.

그럼에도 1:1이 어겨졌을 때는 언제나 당사자들에게나 그 자녀들에게 큰 손해가 발생하는 것은 성경에서도 이미 수없이 나타난 사실이다(말2:15f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오늘 두번째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 바로 이러한 부도덕이 합당치 않다는 경계를 주고 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3f) 했는데 맨 첫 단어가 적절치 못한 성관계를 의미하는 “음행[πορνεία, 매음, 간음, 음탕한 행위]”에서 시작하여 여기에 연결되어지는 부도덕적인 행위들과 삶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더러운[ἀκαθαρσία, (육체적, 제의적, 도덕적) 불결] & 탐욕[πλεονεξία, 탐욕스러운 욕망, 탐심, 탐욕스러움]”이라는 낱말들이 “온갖”으로 설명되면서 책망 되고 있다.

우리 문화 속에서도 오히려 빈곤하고 어려운 가운데서는 糟糠之妻라는 四字成語처럼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지켜졌지만 솔로몬처럼 천명의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왕상11:3f) 거느리는 사람들은 결국 그 영광을 잃어버리고 자식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일들은 성경뿐만 아니라 역사 속의 영웅호걸들에게서 자주 보는 일들이다.

그런 역사적인 결과들을 마음에 두고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3m) 즉 흉내도 내지말라는 경계를 주면서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3b)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에게 당연한 것임을 강조한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4) 여기서도 역시 “말, 말, 말”에 대한 경계의 내용이다. “누추함[αἰσχρότης, 부끄러움, 더러운, 수치, 추함, 사악함]”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들을 수 없는 표현들을 의미하고 “어리석은[μωρολογία, μωρός, 어리석은, 우둔한 + λέγω, 말하다]” 분별력 없는 말이다. “희롱의 말[εὐτραπελία, 농담, 천한 말, 저질 농담, (긍정) 익살]”로 모두가 다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들이다. “마땅치 아니하니” 어울리지, 적당하지 아니하니 즉,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의 말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반전은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4b)는 것이다. 같은 옥중서신에서도 같은 당부를 볼 수 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 우리의 행동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조심하고 신중해야만 할 것이다. 앞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나왔었지만 “오히려[μᾶλλον]”는 ‘더욱 더’라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발달하고 말의 표현들이 저급 해진다고(아이러니)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구별된 하나님의 나라 속에서 신령한 성도로서 어울리는 언어구사가 더 합당하고 그리스도인의 가장 흔한 표현은 감사하는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Ⅲ. 진노의 대상이 되지 말라(5~7)

오늘의 마지막 부분은 세상에 익숙한 삶이나 행동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부적당한 것들임을 경고하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삶에 함께 참여하지 말 것을 경계한다. 누구든지 복의 대상으로 살고 싶지 진노의 대상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홀연히 우리의 삶이 끝난다면 우리의 살던 모습에 맞는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5) 먼저는 앞에서 언급한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것들임을 에베소 교우들을 비롯해서 역사 속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이미 가르침 받아 충분히 알고 있는 내용들임을 전제한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그런 다음 앞에서 경계된 항목들을 다시 확인한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3f)인데 이것을 계속 경계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있어서는 안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한가지 항목이 덧붙여지고 있는데 그것은 앞에 거론한 항목들과 더불어 “곧 우상 숭배자” 라고 말하고 있다.

골로새서에서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하여 같은 항목들이 땅에 있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고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한 것이다.

특히 1세기의 부적절한 성행위들이 우상숭배 하는 여사제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고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이런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고전6:16, 18) 역시 음행과 더러운 행위들임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5b) 라고 부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독특한 것은 그냥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에베소서를 통해서 알게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창세전부터 있어왔지만 그 귀한 영광의 나라에 죄인 된 우리가 참여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을 통해서임을 말하고 있고 바로 그 주님을 통하여 우리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앞에서 죄악의 행위 속에 속한 사람들은 그와 관련된 어떤 행위이든지 다, 모두 영원한 영광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경계이다. 사람들의 판단은 ‘한 가지쯤이야 봐 줄 수도 있지 않느냐?’고 기대하고 ‘거짓된 모든 것을 다 부정하시는 하나님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것이다.

또 이런 지극히 인간적인 판단으로 한가지 정도는 괜찮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쐬기를 박는 내용이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6)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변치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진리일 뿐이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6f) 하나님 말씀이 아닌 것은 아무리 그럴싸한 말일지라도 진리는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진리 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진리를 말하는 것은 누가 말하든지 순종하는 것이 생명이다.

OT에 이방의 왕들이었던 느부갓네살 이든지 바로 느고 이든지 고레스 왕이든지 어린아이 이든지 상관없다. 꼭 전도자를 통한 말씀만이 아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것은 누구든지 즉, 누구의 말이든지 헛된 것이다. 여기에도 전도자가 말할지라도 헛된 교훈은 들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6b)라는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의 대상이 되어야 함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진노의 대상으로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진리를 순종치 아니하는 불순종 때문이다.

여기에 다시 한번 강한 부정적인 권면은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7)한 것인데 중요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믿고 순종하면 생명과 복의 대상이지만 생명의 교훈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거절해 버리는 자들에게 남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진노의 대상의 사람들과 함께 하면 함께 마치 과거 민수기16장의 레위의 후손 고라와 르우벤 자손 다단과 아비람과 온과 같이 하나님의 질서를 거역하고 하나님의 반대편에 섰다가 땅이 입을 벌려 이들을 모두 삼켜 버렸던 무리들과 같을 수 있다. 물론 복음 속에서는 철저하게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이겠지만 진노의 대상의 무리와 함께 한다면 역시 예외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두려운 경계를 주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16) 했는데 그 사랑의 아버지를 본으로 삼고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제물 삼아 사랑하심 같이 그 사랑 가운데 행하라고 하신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고 사는 주님의 자녀들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구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 당부하신다.

세상은 부요하고 편리할수록 경건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깊은 생각함이 없이 말을 함부로 내뱉아 다른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지만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와 순종의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감사하는 말이 일상이 되기를 바라신다.

모든 바른 믿음의 백성들이면 반드시 아는 것처럼 악하고 죄악 된 세상의 모습처럼 음란하고 자기 중심적인 우상숭배자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를 잘못되게 가르치는 것에 자유 할 수 있도록 진리로 훈련하여 우리 가진 영광의 상을 빼앗기거나 잃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생명의 진리를 거역하고 왜곡시키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들과 함께 하는 데서 나와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고후6:17~18)는 약속에 순종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