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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엡 5:8~14 2024-01-28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지난 시간에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당부의 연장선상에서 이어지는 하나님의 자녀됨에 합당한 권면과 함께 우리의 과거의 상태였던 어두움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을 권면한다. 전체적인 주제는 빛과 어두움이 비교 되고 하나님께나 세상에서 어디에 나타나도 부끄러움이 없는 빛에 합당한 삶이 될 것을 증거한다.

하나님께는 빛과 어두움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과 시간 속에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때 어두움에 숨어서 행하는 일들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에게 보일 때만 종교생활 하는 것처럼 사는 것은 주님께서도 경계하신 내용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믿음의 사람 다윗이 고백하는 것처럼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139:7)라는 하나님 의식은 어디서나 다르지 않은 삶의 모습을 지켜갈 것이고 이런 하나님을 의식하는 행동은 당연히 사람들에게도 다르게 비춰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Ⅰ. 삶의 자리가 바뀌었음을 의식하라(8~10)

우리 각자의 생각은 우리의 행동을 만들고 그 행동은 쌓여서 각자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마음에 가진 것을 겉으로 나타내는 것이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진리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 마12:34) 물론 우리 주님은 가장 쉽게 나타나는 행동이 말이기 때문에 이렇게 증거하신 것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 바울 사도는 과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기 전의 상태를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한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2)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8f)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우리의 상태는 변명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살았기 때문에 그 상태를 구체적으로 거론하기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3)라는 사실을 기억시킨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묻기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롬6:21)고 과거 어두움 속에서의 우리의 삶을 회상하고 있다.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사람이라면 과거의 온 갓 죄악 된 자유스러움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반전되어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8m)는 확신이다. 이 확신이 중요한 것은 이런 고백이 불가능하다면 아직도 과거의 어두움에 머물며 다만 신앙을 흉내 내고 있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주어지는 당부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b)는 것이다. 바울은 ‘~처럼’이라는 표현을 골로새서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3:12)

사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면서 ‘~처럼’이라는 모습 자체가 예수 우리 주님께서 금하시는 외식과 위선일 수 있지 않는가 경계될 수 있다. 바울도 이러한 입장에서는 경계하기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롬12:16)는 경계를 주기도 하여 반대적인 자세를 주문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런 입장에서 ‘~처럼’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절대로 위선을 권장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과거의 어두움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빛에 행한다는 것 자체가 절대로 익숙하지 못할 수 있다.

여기 “처럼[ὡς, 마치 ~처럼, ~할 때에, ~하기 위하여, ~와 동일한 방식으로, ~할 목적으로 (NT에 504회 사용된 부사)]은 뒤에 이어지는 “행하라[περιπατέω, 걷다, 행하다, 생활 방식을 뜻하는 용어로서 깊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말과 함께 이해할 때 더 분명한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자세 역시 우리 각자의 의지나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성령을 의지할 때 가능할 것이다.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나는 안되,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없어!’ 라고 절망하고 ‘또 어쩔 수 없이 연약함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식의 기도를 하는 것은 아직도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는 연약함이다.

과거부터 나 자신은 연약하고 부족하기 이를 데 없었을지라도 이제는 나 자신 속에 행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면서 명령하신 것을 담대히 실천해 보는 것이다. 그럴 때 “아 나도 되는구나!”라는 자긍심과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당연히 그러한 도전의 결과가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9)는 사실들을 경험하고 확인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내가 아닌 빛의 자녀로서의 열매가 세가지로 나타난다. “착함[ἀγαθωσύνη, 선함, 너그러움-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참아 주심 같은 것이다]” “의로움[δικαιοσύνη,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수 있는 성결, 깨끗함]” “진실함[ἀλήθεια, 진리-변치 않는 것]” 사실 이 세가지는 역시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즉, 하나님의 성품들이 부분적으로 그의 자녀 된 사람들에게 나타남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경험된다면 이제 보다 적극적인 도전을 해 볼 수 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10) 항상 받기만 하며 자라던 자녀들이 장성하면 이제는 부모를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아름다운 시도를 해 보는 것은 육신에서도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영적으로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시험해 봐야 할 것이 많지는 않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f) 당부를 보는데 그것보다는 더 아름답고 긍정적인 시험으로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명령이 제대로 실행된다면 믿음 안에 있는가 의 시험은 이미 채워진 것이 될 것이다.

우리 인생을 살면서 시험해 볼 일들이 참 많다. 플라스코에 화공약품을 섞어 해보는 화학 시험만이 아니라 많은 시험들을 하면서 지식과 성숙이 시험되지만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보는 시험이다.



Ⅱ.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11~12)

앞에서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도전이 적극적인 것들이었다면 여기서는 반대로 권하지 않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것들이다. 그것은 과거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의 일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것들은 더 이상 시도하지 말아야 할; 지난 시간의 표현대로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3)는 것들이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11) 권고는 좀더 강해져서 하지 말라에서 끝나지 않고 “도리어 책망하라!”고까지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9) 하였지만 어두움에서는 이런 열매가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어둠의 일”이란 당연히 죄의 종의 상태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이 어두움에서 죄의 종으로 움직일 때로 모든 것은 결과가 있는 것처럼 거기에도 열매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빛의 반대 열매들일 것이기 때문에 ‘열매 없는 어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죄의 종으로 있을 때의 결과 즉, 열매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롬6:21)이라고 부끄러운 것들이고 죽음이라고 증거한다.

빛의 자녀로서 어둠의 일에 참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죄의 유혹에 약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귀, 사탄에게 속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둠의 일에 참여하게 되고 부끄러운 결과를 경험하면서 후회할 수 있기 때문에 빛의 자녀들은 더욱 경성해야만 한다.

NT에 ‘참여하지 말라[μή 아니, ~하지 않도록, ~하면 안되므로, συγκοινωνέω, 함께 나누다]’는 부정적인 표현이 여기 외에 다른 한 곳은 바벨론 즉, 세상의 영화의 파멸을 경고하고 있는 계시록에서 읽을 수 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즉, 죄에 참여하지 말고 라 하여 의미에서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같은 옥중서신에 이 “함께 참여하는 것”이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συγκοινωνέω, = σύν, 함께 + κοινωνέω, 참여하다, 나누어주다] 잘하였도다”(빌4:14) 역시 성도 간의 生死苦樂의 삶에 나눔을 칭찬하고 있다. 결국 빛 안에서는 좋은 것이 어둠 속에서는 가치를 잃을 뿐만 아니라 더 초라하고 부끄러움을 보는 것이다.

“그들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12) 이미 앞의 v3~5에 나타난 바 있지만 어둠속에 행해지는 것들은 주로 부도덕한 성적 욕구들과 우상숭배 같은 것들로 모두 떳떳하지 못하여 부끄러운 것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숨기려 하고 다른 이들이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들이다. 오늘 날 대부분의 불신의 세계 속에서 정력(精力, 심신의 활동력)에 좋다는 것들을 찾는 것들도 창조적인 것들이기 보다는 별로 아름답지 못한 육신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들이다.

“그들이 몰래 하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들입니다.”(12, 새 번역)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것들은 일부러 자랑하려고 떠벌리기까지 하지만 다른 이들이 모르게 행해지는 것들은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것들일 뿐 아니라 더 심각한 것은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6)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오히려 자랑하는 그런 세상이 되었다.

우리 주님은 요한 사도를 통하여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2:16) 결국 사라질 이 세상의 것들을 가지고 떠벌리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경계하는 것이다.

우리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듭난 하늘의 사람들이라면 마귀 사탄이 주도하는 어두움의 일 즉, 부끄러운 일들에 는 참여치 말아야 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부하신 것처럼 구제 같은 선한 일을 몰래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마6:2) 다른 모두가 아는 것을 꺼려하는 일들은 참여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책망할 수 있는 빛의 자녀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Ⅲ.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13~14)

산 사람이 시체들 틈바구니에서 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영적인 의미에서 이런 일들은 이 세상에서 더러 나타나고 있는 일들이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는 말씀이 오늘 마지막 교훈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5:14)라고 증거하신 바 있다. 빛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이 있으므로 그 옆의 죄와 더불어 사는 어둠의 세상사람들의 상태가 드러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13) 그럼에도 이 말씀은 이해가 쉽지 않은 구절이다.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대로 빛의 자녀들이 참여하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책망해야 할 어둠의 일들로 입으로 거론하기에도 부끄러운 일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결국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되겠지만 다시 뒤에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는 해설구가 쉽지 않다. 보다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편이 바람직할 것 같다. 즉, 어둠의 일이 하나님의 빛으로 드러나 부끄러움을 깨닫고 그 수치를 주님의 십자가에 맡기고 빛으로 나아와 빛에 거하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치를 부끄러움으로 끝내는 인생들은 가련한 사람들이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속에서 확신하는 것은 빛이 존재하는 이유는 부끄러움과 수치를 주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고 빛으로 나아오도록 이끄시는 사랑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14) 이 말씀은 분명히 육신적인 이해로서는 불가능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죽은 자들이 응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잠자는 자나 죽은 자들 역시 최종적으로는 그렇게 되겠지만 육신의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비슷한 표현들이 OT의 이사야서에 더러 나타난다. 두 곳만 인용을 하면 장차 복음으로 인하여 구원될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양을 노래하면서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사26:19)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오늘 본문과 가장 비슷한 한 곳을 더 인용하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60:1) 바로 구원의 메시야를 인한 교회가 빛으로 역할 할 것을 예언하는 부분이다.

바로 앞절에서는 빛이 이르렀고 그 빛으로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라 선언한 다음 그 결과에 따라 응답할 것을 권면하는 교훈이다. 우리 주님께서 베데스다 못 가에서 38년된 중풍병자를 치료하신 후에 주신 교훈에서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5:28) 라고 육신적으로는 사뭇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주신 바 있다. 이 말씀은 물론 이 역사의 마지막에 다시 오실 왕 중의 왕이요 생명의 주님께서 재림 주로 오실 때 있게 될 이 인류의 반응이겠지만 오늘 말씀과도 무관하지 않은 영적인 교훈이다.

성경은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깨어 있을 것을 당부하는 내용들이 더러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어 있을 것을 권면하는 내용이 마태복음24:42, 25:13 같은 경우이다. 그럼에도 여기에 잠자는 자여 깨어서는 연결되어지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는 말씀과 연결해서 이해하면 단순히 육신의 잠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는 표현은 세상의 죄악의 어두움에 취해 있어서는 안되는 즉,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 죽음과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가 분명하다.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기 때문이라고 증거한다. 그럼에도 이 말씀의 단어 하나하나는 현재 능동으로 쓰여 졌음에도 문장의 흐름으로 볼 때는 사람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주도적인 역할에 응답하는 조금은 수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지금은 영적으로 볼 때 편안히 퍼 질러져 잠잘 때가 분명 아니다. 올해 우리의 푯대세움 말씀이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13:11)는 경고조의 교훈인 것도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주님의 사랑이라고 확신한다.

비록 우리가 과거에는 어두움 가운데 있었고 자랑스럽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빛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삶의 자리를 옮겨 하나님은 물론이고 사람들에게 공개된 빛의 삶이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이제는 빛의 열매를 맺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 보다는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도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과거의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는 대신 그런 부끄러운 일을 도리어 책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빛의 삶으로 살 때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옳지 못함을 깨닫고 빛으로 나올 수 있게 죄의 잠을 깨어서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으로 비추시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일어나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믿음은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