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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엡 5:15~21 2024-02-04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  
지금까지 과거의 불신의 삶과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삶, 빛과 어두움과 빛 아래서의 신앙인과 불신앙의 삶을 대조하면서 과거 그리스도 밖에서의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던 삶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합당한 새로운 삶을 권면해 왔다면 오늘의 부분은 이러한 당부의 결론적인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와 계시는 성령의 지혜를 사용하여 모든 삶을 빛 아래에서 생명으로 채워 가라는 내용이면서 심지어는 시간 까지도 복음으로 구원받은 자신의 삶에 합당하게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이 될 것과 모든 상황에서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지혜로 행하므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돌려 드릴 것을 도전하고 있다.

특히 v19은 골로새서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리스도인의 모든 신령한 지혜가 단순히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찬송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에 피차 가르치는데 필수적임을 보충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Ⅰ. 지혜 있는 자로 살아라(15~16)

지혜는 세상 어느 민족이나 사모하고 바라는 삶의 방법이다.(탈무드)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14:20) 한다. 함에도 범죄한 인류의 지혜는 어두움의 지혜가 대부분이다. 그런 이유에서 죄를 모의하고 짓는 데는 ‘어떻게 그렇게 머리가 비상할까?’ 할 정도지만 의를 행하는 데는 어리석기 이를 데 없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에 비취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육신의 어리석음을 버리고 신령한 하늘의 지혜 즉, 성령을 통해서 위로부터 주어지는 지혜로 행할 것을 당부하는 것이 먼저이다. 과연 위로부터 주어지는 지혜가 어떤 것인가를 야고보를 통해서 듣는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약3:17) 마치 성령의 열매와 비슷한 덕목들을 열거하고 어둠에서 흔한 두 가지는 배제되는 지혜가 위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지혜임을 증거한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15) 더 이상 어두움의 간교한 삶의 수단에 머무르지 말고 하나님께나 모든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드러내 놓고 행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위해서는 주의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기 두번이나 거론되는 지혜는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고전2:6)라는 바울의 증거를 본다. 최근에 너무 흔하게 보며 안타까운 일들은 주로 정치세계에 나타나는 정치가들에게서 보게 된다. 나라를 바르게 다스린다고 하는 정치세계의 사람들이 가장 쉽게 약속을 어기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는 것을 보고 있다. ‘왜 그럴까?’ 역시 바른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빛보다는 어둠의 세력이 더 설치는 세상 속에서 빛의 백성으로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는 참으로 자세히 주의하여야 할 것 같다. 믿음이 타락하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경외)이 없는 종교 세계속에서 바른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어떻게 행할 지를 많이 고민해야 할 시대인 것 같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지를 자세히 주의하여…”(15f) 세상을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주의하여[βλέπω, 보다]” 무엇이든지 자신이 확인하고 행하는 일에 문제가 생길 수 없다. 그것도 “자세히[ἀκριβώς, 정확하게, 부지런히]” 보고 선택하고 결정한다면 거의 후회할 일은 없다. 언제나 문제는 보지 않고 확인하지 않고 결정해 버리는 것들이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을 순종하는 믿음의 문제와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주신 예언의 말씀만 믿고 확신한다면 거기에는 거짓이나 부풀림이 전혀 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나 계시를 내가 보고 확인하며 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어두움에서 일어나는 세상의 일들에 대한 조심성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도 그의 백성 된 우리가 좀더 잘 알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호6:6b, 나는…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15b) 여기에 “지혜 없는 자, 지혜 있는 자”의 차이는 글자 한자 차이일 뿐[ἄσοφος, σοφός]이다. 이것을 보다 쉽게 이해하면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라고 해도 그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지혜는 매사를 행하면서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가!’를 점검해 보는 것이 오히려 빛의 백성으로서 당연한 자세가 될 것이다.

이제 실제적으로 이 지혜를 사용해야 할 첫번째 과제가 주어지고 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16)했는데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대는 언제나 악했다. 노아의 방주 이전의 사람들이나 언어가 혼란케 된 바벨탑 사건의 상황에서도 멸망과 문제가 되는 원인들은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을 외면해 버리는 것들이 문제의 출발이었다.

짧은 한 마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16)는 당부와 원인이 다 주어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시간을 아껴서 사용하라!’ 정도로 보이지만 이 당부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아끼라[ἐξαγοράζω, 구속하다, 속량하다(갈3:13,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4:5, ἐκ, ἐξ, + ἀγοράζω, 사다)]”라면 “세월[καιρός, 시간, 시점, 순간]”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의 주어진 시간(순간)조차도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라는 명령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하면 바로 “때[ἡμέρα, 날]가 악[πονηρός, 나쁜 상태에 있는, 병든, 나쁜, 사악한]하니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증거한다. 우리 각자가 흘려보내고 있는 시간(순간)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인 은혜안에 불러들인다면 바로 세월을 아끼는 것이다. 그러나 어두움 속에서 그냥 흘려버리는 순간은 그냥 악한 때로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주어지는 말씀이 많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당부가 부담이 되지 않아야 정상이고 또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부담스러운 삶을 주문하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완벽한 장치를 해 놓으신 다음에 우리에게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 선물로 와 계신 성령을 따라 산다면 전혀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구속을 힘입어 사는 사람들이라면 시간조차도 되는 대로 흘려보내서는 안되고 구속받은 백성 답게 우리의 매 순간을 구원의 시간으로 활용하여 비록 악이 관영 하는 세상이지만 하나님과 성령의 지혜로 가치 있는 생명으로 시간조차도 사(구매)야 할 것이다.



Ⅱ.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17~18)

당부된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이 사실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로 살고 행해야 할 것인가를 교훈 하는 내용이 두번째로 주어지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생각없이 행하는 어리석은 삶을 사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17) 이 말씀의 좀더 구체적인 당부가 바로 로마서12:2의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명령으로 이해된다.

어떻게 보면 v15의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라는 말씀의 반복처럼 들리기도 한다. 앞에서는 적극적인 형태로 당부했다면 여기서는 그 반대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형태로 다시 권면하는 것이다.

먼저는 이 말씀이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으로 그렇지 못한 것이 어리석은 것으로 편하게 이해를 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빛아래서 공개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분명히 이 어두움의 역사를 슬기롭게 지내는 하늘 나라 백성됨의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지혜일 것이다.

여기의 앞선 내용이 역시 바로 v16의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 붙여서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17f)라는 연결을 볼 수 있다. 완성된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라면 거기에는 어리석음 자체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어둡고 악한 세대 속에서 묻혀 사는 전혀 변함없는 어두움에 익숙한 어리석은 삶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17b) 이 당부 역시 죄악이 관영하고 악이 지배되는 세상이기 때문에 요구되는 삶의 자세이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일들이 그 근원지가 어두움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 역시 주님의 뜻을 찾아 그것을 순종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참된 자녀일 것이다.

연이어 경계되는 한가지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18)는 당부인데 술 취한 사람은 절대로 지혜로울 수 없음을 솔로몬이 경고해 주고 있다.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잠23:33~35)

특히 1세기에 부유와 부도덕 속에서 술이 많은 역할을 한 것 때문에 교회의 지도자들의 자격에서 이러한 것들을 배제할 것을 경고하는 내용들도 더러 나타남을 본다(딤전3:3; 딛1:7, 2:3).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18f) 또 다른 의미에서 술 취함 이란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을 다른 것에 빼앗기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에서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할 삶이 세상이나 다른 사상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을 경계하는 교훈이기도 하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의 가르침 외에 우리의 생각을 잃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마음이나 생각을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을 경계한다고 하는 이유에서 정치적인 당파나 계속 변하는 사상적 흐름에 끌려가는 것도 다르지 않은 또 다른 술 취함 일 수 있다.

이런 모든 잘못된 흐름을 차단하기 위한 믿음의 자세가 바로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18b)는 권면인 것이다. 바울은 육신을 따르는 삶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하였지만 그러게 되기 위한 장치가 “…오직 성령으로 충만[πληρόω, 채우다, 넘치게 하다]을 받으라”(18b)는 당부이다.

차서 넘치고 있는 상태에서는 다른 것이 더 들어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당부를 주고 있고, 앞에 오직은 다른 모든 방법을 배제한 이것만 가능하다는 의미다. 이것이 막연하고 불가능한 것이라면 주님께서 절대로 이런 당부를 주지 않으실 것이다. 이미 와 계시는 성령의 역사를 모든 삶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드림으로써 가장 영적으로 바른 이해와 행동을 할 수 있게 하실 것이다.

바울은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7) 함으로써 성령으로 충만할 때 신앙적인 모든 행동은 가장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마음에 두고 주는 당부이다. 성령으로 행함이 절대로 어리석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신령한 지혜의 사람으로 살기위한 가장 사실적인 방법이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18b)일 것이다.



Ⅲ. 하나님께는 찬송을 서로 복종하라(19~21)

세상의 없어질 지혜가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신령한 하늘의 지혜로 충만한 삶의 결과로서의 내용이 오늘 나누게 되는 마지막 부분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신령한 찬송과 감사를 드리게 될 뿐만 아니라 성도 서로 간의 겸손의 모습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이루어 질 것을 확인하고 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19) 성령의 충만으로 하늘의 지혜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 이럴 것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5:13)고 야고보가 권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백성들이라면 어려움에서나 편안함에서 나올 수 있는 삶의 형태는 두가지 밖에 없다. 고난당하는 자는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고 기도로 그 고난을 맡겨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사죄의 감격과 승리로 인한 기쁨은 당연히 찬송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일상이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19f) 육신의 사랑과 삶의 희로애락과 향수와 추억을 담아 노래하는 소위 말하는 트로트를 부르고 듣는 사람들도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죄에서 구속하시고 주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영원을 기대하며 살게 되는 감격을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는 찬송은 당연한 하늘의 감격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43:21).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19b) 찬송은 서로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화답하는 것이면서 성령께서 함께 계시는 사람의 중심인 마음에서부터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람을 의식하는 찬송보다는 주께 즉, 하나님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것이다. 여기서 노래도 역시 다윗의 고백처럼 “그들이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공의를 노래하리이다”(시145:7)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를 칭송하는 것이다.

특히 여기 세가지 형태의 명령적인 현재 분사(分詞)가 쓰이고 있다. 서로 화답하며,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는 역시 세가지 형태의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뻐하고 감격하는 것이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20) 이 말씀과 함께 쉽게 떠올리는 말씀이 “항상 기뻐하라”(살전5:16)는 같은 바울의 당부이다. ‘범사’는 ‘모든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라면 ‘항상’은 시간적 상황에서 ‘언제나’를 의미하기 때문에 결국 같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으로 범사와 항상은 공간과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는 의미가 없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이상 어떤 상황, 심지어 그것이 견디기 어려운 상황과 힘겹게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도 변함없는 감사를 드릴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 확인되고 그러한 형편에서도 성령의 역사를 누릴 수 있다.

우리를 아들의 피로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엄청난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 스스로에게는 불가능한 그러한 역사를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항상 가장 유효한 감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릴 때 바른 감사가 될 것이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가능하게 되었다면 우리가 드릴 감사 역시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는 당부가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능력은 하늘을 향한 찬송과 감사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히 옆의 지체들 간에도 누리게 됨을 증거한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21) 여기의 “복종[ὑποτάσσω, ὑπό ~아래 + τάσσω 배열(치)하다, 정리하다]”이라는 표현이 언제나 자신을 접고 들어가는 표현이라서 자연적인 것은 아니다. 즉, 억지적인 요소를 가지는 말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형제의 관계이지만 인간적인 관계에서는 순종이 어려운 경우들이 더러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복종의 중보자도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우리를 우리 되게 하시고 맺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φόβος, 공경, 존경]함으로 불가능한 것이 없어지게 된다.

또 어떤 한쪽에만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피차, 서로 간에 복종하는 것은 복종이라는 말과도 상관이 되고 차별 없는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는 절대적인 순종을 드리고 그 믿음 가지고 옆으로 지체들에게도 서로를 받아 주고 수용하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15:7)고 격려한다. 이런 자세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삶의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