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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살전 2:17~20 2024-04-14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사람은 누구나 하고 싶어하는 일들이 있고 그것이 원활하게 잘 이루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일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하고싶어 하는 일들이 다 그대로 되는 것이 진정 복일까? 생각해 보게 되고 많은 경우에 돌아보면 그 일이 나의 원대로 되었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 까도 생각하게 된다.

이 2장을 닫으면서 바울은 도망치듯 빠져나온 데살로니가 교회를 다시 찾아가 그들을 직접 격려하고 도전을 주고 싶었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함의 안타까움을 숨김없이 표현하고 있다. 앞에서 자신의 젖으로 키우는 유모와 같은 또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데살로니가의 교우들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바 있다.

그렇다면 ‘자기 살려고 도망쳤는가?’라는 오해조차도 없애기 위하여 이런 자신의 심정을 열어서 말하고 그것이 불가능한 것 때문에 디모데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다음 장에서 증거하는데 결국 몸은 급하게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저들과 함께 있었다는 사랑 어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렇게 선한 일임에도 거절되고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나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재림후에 거기에 대한 상급과 영광으로 반드시 갚아 주실 것에 대한 소망도 피력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기대가 없다면 믿음으로 인하여 참고 절제하며 손해 본 것들에 대해 이 땅에서는 안타깝고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울은 이런 것들을 마음에 두고 주님의 영광을 입게 될 부활을 가르치는 가운데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고 격려한 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이 없다면 이 땅에서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다시 데살로니가에 가고 싶어서 애태웠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해서 결국 안타까움으로 대신 디모데를 보냈고 그런 사연을 다음 장에서 말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진행되는 과정의 다리 라고까지 이해하기도 한다. 오늘은 내용의 분량이나 의미에서 두 가지 제목으로 생각하고자 한다.



Ⅰ. 거절되는 것도 수용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17~18)

바울의 고백 속에서 그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거절하신 사실에 대해서 고백하는 내용들을 몇 가지 보는데 그런 예들 중에 하나가 데살로니가에 다시 가기를 소원했지만 그것이 거절되었다는 사실과 자신의 신병(身病)의 문제 즉, 건강을 위해 기도한 것에 대한 거절이었다. 특히 건강에 대한 거절은 오히려 거절하시는 이유까지도 고린도 교회의 지체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또 이런 거절의 내용에서는 사탄이 개입되고 있는 것도 독특한 내용들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2:7) 자신에게 사탄의 사자를 주신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라고 확인하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8) 분명한 이유에서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의 고난을 제해 달라는 기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거절하셨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이렇게 분명한 이유로 거절당했기 때문에 그러한 응답에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한다는 고백도 함께 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들에게 있어서 사탄의 장애는 OT에서는 욥에게 있어서 주어지고 있음을 본다.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이었고 이것이 만천하에 알려지기 위하여 사탄의 참소는 허락되지만 역시 그것이 욥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친구들의 옳지 못한 책망은 정죄됨에도 욥은 당시는 물론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욥의 경우를 통해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 것은 아무리 사탄이 참소를 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만 역할 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17) 바울은 자신이 데살로니가를 떠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은 시간이고 그렇게 잠시 떠난 것도 다만 육체일 뿐이지 마음은 변함없이 그들과 함께 있었음을 공언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17f) 언제나 애정어린 심정으로 부를 때마다 바울은 “형제들아!” 하였다.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이 표현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표현으로 “떠난 것[ἀπορφανίζω, 부모를 잃다, 잃게 되다, ἀπό, ~에서, ~에서부터 + ὀρφανός, 고아, 사별하다.]” 즉 ‘고아가 되었다’는 의미로 자신이 데살로니가를 떠난 것은 데살로니가의 교우들을 버려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부모같이 귀한 데살로니가로부터 떨어져 나온 고아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자신은 오히려 유대인들에 의해서 그렇게 쫓겨나온 것이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놓음을 당한 고아와 같은 심정이었음을 고백하여 데살로니가를 부모와 같은 주체로 묘사하고 자신을 반드시 부모가 필요한 떨어져 나온 고아와 같은 신세로 표현함으로써 데살로니가의 교우들을 위로하려 하는 것이다.

또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라 한 것 역시 거룩한 하나님의 애정으로서 단순한 육신의 감정에서가 아니라 심령으로 이런 표현은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고전5:3f)라는 표현이나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골2:5b)라는 표현들과 같은 의미이다.

앞에서 바울은 자신을 v7b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라거나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11) 한 것을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8) 고백하였다.

그런 이유에서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17b)는 표현은 단순히 그냥 그리워하는 관계가 아니라 혼자서는 도저히 삶을 감당할 수 없는 부모를 찾는 고아와 같이 그들을 그리워하는 입장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18) 이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다시 가고 싶어 했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육신적인 바램이나 소원이 아님에도 왜 그것을 허락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분명 바울 사도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유들을 위한 것이었고 연약한 믿음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필요했을 것 같은데 그것을 왜, 사탄으로 하여금 막도록 하셨는가 하는 것은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역사이다. 그러나 역시 나타나 보이는 것들이 다가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자세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바울이 어디에서 데살로니가로 가려는 시도를 ‘한번 두 번’ 소원했는가 하는 것은 분명치 않지만 그곳이 어디든지 데살로니가에 돌아가려는 도전은 여러 번 계속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18m) ‘한번 두 번’이 숫자적으로 헤아릴 수 있는 의미이기 보다는 그 만큼 바울이 저들에게 가고 싶어했던 바울의 마음의 간절함을 표현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 다른 문제는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18b)라는 표현이다. “사탄[שָׂטָן, Σατᾶν, Σατανᾶς, 적, 참소자, 대항자, 대적자, (귀신, δαιμόνιον, 신적 존재, 악마; 마귀, διάβολος, 비방자, 악마, 중상자→ 들을 거느린)]”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과 같이 언제나 진리요 빛이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대편에 서서 선하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대적자가 되어 악을 조장하는 영적인 존재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중간에서 사람에게 온 갓 악의 근본이 되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시키는 간악한 존재이다.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하는 것처럼 역시 하나님과 성도 간의 간격을 이간시키는 데서 끝나지 않고 성도와 성도들 간에서도 역시 틈을 만들려고 하는 일을 쉬지 않고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무저갱에 저들을 가둘 때까지 이런 죄악을 조장하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사탄이 자의적으로는 어떤 일을 주도하지 못하고 또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에 그렇게 가고자 하는 바울의 아름다운 의향을 막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이 허락되지 않은 것 자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무리가 없을 줄 안다.

이렇게 아름답고 선한 의도의 영적인 일들도 막힐 수 있음을 각오하고 그럼에도 그런 일들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최종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 성도 간에는 더 큰 확신을 가져올 수 있을 것임으로 당장에 거절된 사실만으로 실망하거나 하나님께 투정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제 이 땅에서 허락되지 않은 선한의지의 결과는 역시 더 크고 아름다운 것으로 채워질 것임을 바울은 내다보면서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모습을 이어지는 내용에서 보게 된다. 여기에 인용할 수 있는 말씀이 바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롬8:18)이지만 오늘 말씀과 더불어 생각할 때 ‘현재의 고난’을 다른 것들로 바꿔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모두 믿음 생할 하는 것으로 인한 것들로 한정되어야 한다. ‘현재의 거절된 것은, 현재의 불이익은, 현재의 무시당한 것은, 현재의 수치는, 현재의 불명예는, 현재의 초라함은 등등’ 결국 신앙 때문에 이 땅에서 겪는 안타까움은 그것에 비교될 수 없는 영광으로 영원 속에서 갚음을 받을 것임이 약속된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좀 더 적극적으로는 오히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1:29)는 가르침들도 우리가 믿음으로 받을 영광을 위한 고난들이 허락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것은 당연히 인류를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역사가 이 역사 속에 오셔서 십자가를 감당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고난으로 이루어졌고 하늘에 돌아 가셨을 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2:9b~10) 비교될 수 없는 영광된 이름을 주신 구원의 역사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오늘도 믿음으로 인한 고난이나 어려움을 당하고,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을 위한 선한 의지가 거절된다 하더라도 역시 바울이 뒤에서 격려하는 것처럼; 물론 재림에 대한 소망이기도 하지만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4:18)는 격려로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Ⅱ. 믿음의 결과는 이 땅에서 끝나지 않는다(19~20)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과연 무엇일까! 아니, 오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나의 자랑은 과연 무엇인가?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면 세상 사람들은 옳지 못한 삶을 살면서도 오히려 자랑이 중심에 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2)

과거 페르샤(파사) 왕국의 총리 대신이었던 하만은 친구들과 아내를 불러놓고 “자기의 큰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왕이 자기를 들어 왕의 모든 지방관이나 신하들보다 높인 것을 다 말하고, 왕후 에스더가 그 베푼 잔치에 왕과 함께 오기를 허락받은 자는 나밖에 없었다”(에5:11~12)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죽음의 그림자였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바울은 오히려 세상에서는 전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들을 자랑한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30)거나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고후12:9m)하여 전혀 자랑할 수 없는 약함을 자랑하고 있다.

이렇게 자랑하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라 하고 다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빌3:3f) 라고 증거한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19) 여기서 바울은 완전한 기대나 행복이나 자랑을 다 뒤로 미루어 둠을 본다. 그렇다, 늘 얘기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영광은 이 땅에서 다 찾아 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오히려 주님 재림의 뒤에 미뤄두고 오늘 섬김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배운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19f) 여기서 “우리”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를 나의 죄의 댓가로 믿고 사는 같은 믿음의 하나님의 백성들인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 거론되는 “소망, 기쁨, 자랑”은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 어떤 것을 향한 것이냐는 것이 관건이다.

먼저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여 어떤 형편에서 든지 흔들림없이 굳게 서는 것이 바울이 가장 바라는 첫번째 소망일 것이고 기쁨은 그들의 믿음이 흔들림 없이 진리에 서서 오히려 아직 불신의 사람들에게까지 생명을 끼치는 것과 다른 교회들에게도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이름일 것이다. 물론 믿음 안에서 “소망, 기쁨, 자랑”이 오늘 우리에게는 또 다른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여기에 “자랑”은 그냥 자랑이 아니라 면류관[στέφανος(στέφω, 둘러 씌운다) 왕관, 금관, 화관]을 수식하고 있어서 좀더 미래적이다. 물론 이런 표현을 OT에서도 더러 보인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16:31) “화려한 왕관”(겔16:12) 다른 사람들은 갖지 못한 영광스러움을 나타내기 위하여 특별히 머리에 씌워주는 특별한 관을 말한다. 그럼에도 복음 속에서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9:25) “의의 면류관”(딤후4:8) “생명의 면류관”(약1:12) “영광의 면류관”(벧전5:4)이라는 표현들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자랑의 면류관이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19) 라는 형태로 실제적으로 머리에 쓰는 관이 아니라 데살로니가 성도들 자체가 면류관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어찌 보면 주님께서 재림하신 후에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 자신의 자랑거리라는 감사를 담은 표현이다.

참고할 것은 “강림하심[παρουσία, 임재, 현존, 있음이지만; 옴, 도착, 강림, 참석하기 위해 오는 것]”은 두가지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한가지 의미로만 의미를 한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마24:3 주의 임하심). NT에 모두 24회가 쓰였지만 이 데살로니가 전, 후서에 모두 7회가 쓰이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는 표현들로 쓰였다.

세상은 점점 혼란과 무질서 속에 믿음을 지키는 것 자체가 힘들고 그런 이유에서 사실 의의 주님께서 다시 이 역사 속에 그에게 붙은 믿음의 사람들을 데리러 오실 때까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사 주신 생명을 그때까지 지켜가는 것자체가 우리 시대를 볼 때 면류관일 것 같다.

이렇게 1세기에도 바울의 믿음과 확신은 주님의 재림에 집중되어 있다면 오늘 역사의 마지막 징조가 어느 때보다 분명한 이때에 더욱 그래야 할 것이고 쉬 사라지고 없어질 세상의 영광과 자랑보다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벧전1:4f) 영광을 바라고 사모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19f) 묻던 바울은 좀 더 직접적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확신을 돌린다.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20) 다만 앞에서는 “자랑[καύχησις, 자랑, 영광, 영광스러운, 기쁨]”이 여기에서는 “영광[δόξα, 광채, 영광, 영화, 명성]”으로 쓰였지만 그 의미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여기에 사용된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스러움을 표현하는 낱말이지만 그 영광에 참여하는 성도들에게도 당연히 이 영광은 빛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자신이 위기와 고난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여 열매가 된 성도들을 자신의 미래의 영광이라고 증거하는 것이다. 다니엘서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12:3)는 것이다.

우리가 선한 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해 시도하는 일들도 거절될 수 있음을 배운다. 사실 나타나는 일로만 보면 ‘왜, 이런 좋은 일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는가!’ 라고 투정할 수도 있지만 계시에 제한을 가진 우리 자신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보고 계신 선하신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믿음으로 맡기고 주어진 과정에 최선을 다함으로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바울과 같은 충성된 하나님의 백성이요 일꾼의 자세이다. 비록 선한 뜻을 막아서는 것이 사탄일지라도 이 악한 존재는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음도 확신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거절되고 어려움이 될지라도 주님의 뜻을 위한 소망은 나중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반드시 채워지고 영광으로 바꿔 주실 것이다. 우리 지체들 간에도 미래의 영광을 기대하며 서로가 영광됨을 고백하는 성숙한 믿음의 삶을 바울처럼 감당하는 자세로 이 마지막 시대를 믿음으로 살아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