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마 20:17~28 2005-09-18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 말씀은 마가복음10:35~45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고 있다.

주님께서는 일반적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메시아 관을 갖고 자신을 따라 배우고, 또 쓰실 제자들에게 자신의 인류를 위한 십자가 사역을 구체적으로 가르치신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앞에서도 말씀하신바 있지만[“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16:21)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17:22~23, 참고17:12)] 그러나 본문이 가장 구체적인 말씀이다.

이런 쓰라린 선언을 들으면서도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두 아들의 장래를 위해 치마 바람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서 다른 제자들은 분내고 주님은 섬김의 원리를 통해서 천국에서 승리자는 섬기는 자로 세상에서 산 자들이라는 역설적인 교훈과 함께 자신이 바로 섬기러 왔으면 자신의 목숨을 인류의 죄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아픈 마음을 저들에게 들어내 보여 주고 계시다.

이 주님의 가르침은 세상과는 정 반대로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원리이지만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교회는 당연히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할 것은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 가르침이 있은 지 2천년이 지났지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는 여전히 주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셔서 주님의 이름으로 섬긴 자들을 상주실 그 날까지 십자가의 원리로 살아가야 할 우리의 삶을 교훈 해 주고 계신다.



Ⅰ.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최고의 목적을 말씀하신다.(17~19)

(17)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19)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주님께서는 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길이 마지막 모든 인류를 대신한 죄의 수치와 거기에 상응하는 고통과 외면을 당하실 수 밖에 없는 아픔의 길임을 아시고,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오르시고 로마를 비롯한 모든 외부의 학정(虐政)에서 이스라엘을 건질 것이라는 메시아에 관한 잘못된 선입견을 가진 제자들에게 미리 자신의 사역을 알려서 그 때를 당하더라도 실족하지 않도록 준비 시키기 위하여, 주님은 참담한 심정으로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러한 사실을 이르시는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사도 요한을 통해서도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요13:19, 14:29)고 말씀하신 바 있다.

주님께서는 유월절에 자신이 바로 그 진정한 유월절 양으로 오셨음을 아버지 하나님께 고백하시기를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12:27)

그것도 자신을 증거 해야 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모함을 받고 이방의 권력인 로마의 사형판결을 받고 능욕과 수치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버림을 당해 죽으셔야 할 처절한 운명을, 3년 동안 자신을 통해 듣고 배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지만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찬 제자들의 귀에는 전혀 들려지지 않았던 것을 본다.

사실 내가 당해야 할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격려해 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이 되고 감사가 되는지 모른다. 그런 입장에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런 서로의 관계로 이 땅에 함께 살아 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러한 분명한 슬픔과 고통을 앞에 두고도 그것을 알아주고 격려를 받을 한 사람도 갖지 못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힘겨웠을 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것이 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 주님 자신을 위한 것인가? 전혀 오늘의 나를 위한 것 아닌가? “그가 찔림은 우리(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나)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내)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나)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나의)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나)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그러나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절망 뒤에 있을 영광을 선언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16:21)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17:23) 하셨던 것처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19)신 약속이다. 죽음으로 죄는 해결되지만 다시 부활하시므로 비로소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도 약속하신 것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이 놀라운 은혜로 나는 오늘 부족하고 모자람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누리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지 않는 …



Ⅱ.여전히 없어질 땅에서의 영광을 구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다.(20~24)

(20)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죽으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는 비장한 심정을 말씀하셨는데도 이런 요청을 하는 것은 참으로 생각이 없는 사람들임에 분명하지만 이들이 바로 앞의 예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것에 집착을 하면 그것과 관련되지 않은 것들은 눈으로나 귀로도 잘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본다. 장난감에 마음이 팔린 아이에게는 어떤 다른 것도 가치가 없고 흥미도 없다.(햄버거, 피자) 주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말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탁을 지금 이 母子들은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영적으로 단순한 것은 참 좋은데, 오히려 육적으로 단순한 경우가 이런 경우인 것 같다. 우리는 이미 4:21에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신 기록이 있고, 이 마태복음을 비롯한 복음서에 수없이 이 두 형제의 기록들을 접하게 된다.(10:2, 26:37) 한가지 특이한 기록의 차이는 마가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막10:35) 한 것으로 기록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어머니와 두 아들이 함께 주님께 간청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우리 나라에 한 때 ‘치맛바람’이라는 것이 학교들마다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 역사가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보면 신기할 뿐이다.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주님은 그들에게 물으시기를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너무나 무지해서 이런 경우가 더러 있다. 자기가 지금 무엇을 구하는 지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조르는 경우가 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에게 잘 드는 칼을 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두 사람이다 보니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는 질문에도 “할 수 있나이다” 라는 대답을 덥석 하고 말고 주님께서 안타깝게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눅12:50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를 받으려니와”(막10:39) 라고 말씀 하셨고 이들은 과연 주님의 잔을 마시며 주님께서 받은 세례를 예언대로 받고 만다. 이 말씀대로 야고보는 사도 중에 제일 먼저 참수형을 당하는 순교자가 되(행12:2)고 요한은 오래 살면서 잔인한 고문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역사가들은 전하고 있다.

세배대의 아들들이 마음에 두고 있었던 잔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라는 영광스러운 잔으로 알았던 것으로 이해되어지지만 주님께서 마실 잔은 인류의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진노의 잔 즉 고통의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잔을 받아 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 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라”(렘25:15)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임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오히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23)는 부정적인 답변을 듣게 된다. 적어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영광은 최선의 충성과 믿음으로 헌신한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셨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런 사람들에게 주실리가 만무하다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나중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도 있었던 기록이 본서에 나타나고 있다. “…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마27:56b)

이 내용에서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맹랑한 두 제자와 어머니의 행동에 반응하는 다른 열 제자들의 모습이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24) 철없이 설치는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태도 못지않게 나머지 열 제자도 마찬가지였다는 판단이 된다. 결국 3년 동안 주님을 따라 다녔어도 성령의 사람이 되지 못하는 이상 열 둘이 한결같이 세속적이고 권력적인 모습을 보시면서 이제 그들에게 이 지상 사역을 위임해야 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분명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다. 오늘 우리가 이들과 같다면 역시 주님께서 탄식하실 것이다. 모두가 참된 진리에서 일탈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는 그래서 “…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18:8b) 탄식하시는 주님 앞에 마지막의 역사는 다가오는데 그래도 진리를 고수한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세상과 타협하고 저울질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신다면 얼마나 안타까워 하실까 짐작이 되지 않는가?

그럼으로 두 제자와 그들의 어머니의 태도에 함께 분노하는 다른 제자들은 오늘 나 자신임을 깨닫고 회개해야만 한다. 영적인 진리의 길을 간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썩어질 세상의 것에만 눈 박고 산다면 우리도 이런 자세밖에는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참으로 신앙을 하는 우리들이라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시는 주님의 말씀에 현실이 어떻게 됐든 “아멘!” 할 수 있는 …



Ⅲ.섬기는 자가 존경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신다.(25~28)

(25)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러한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변변치 못한 제자들을 보시면서 주님은 또 다시 귀중한 섬김의 원리를 가르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이방인’들 즉, 불신의 세계는 조그만 권력만 있어도 그것을 최대로 쓰려고 권세를 부리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안타까움을 지적하고 계신다.

사람의 어리석고 간악한 것은 자신의 먼 친척이라도 권력의 자리에 있다고 하면 그것을 자랑하려고 하는데 “야, 우리 집안 아무개가 이런 자리에 있어, 응 그 유명한 사람이 우리 사돈의 팔촌이야!” 이것은 그만큼 범죄 한 인간은 권력의지가 강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파출소에 술 취한 사람들이 잡혀오면 대개는 “야, 나 함부로 대하지 마, 우리 가까운 친척이 검찰청(법원, 법무부, 청와대) 요직에 있어!” 라는 식으로 엄포를 놓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호기를 부려 본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 지구대나 파출소에서는 어련히 그러려니 하고 생각을 한다고 한다.[왜 바보스러운 개그가 인기가 있는가!]

저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묘한 습성이 있고 이것은 사실 섬기는 지위를 뛰쳐나와 하나님과 겨루려는 범죄 한 천사 즉, 마귀의 습성이자 최초로 유혹을 받은 마귀의 꼬임이었다. 사탄은 묘한 인간의 권력의지를 부추기는 것을 보는데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하나님을 거역한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사14:13~14)했다고 이사야를 통해서 책망하셨고, 유다서에는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1:6) 했는데 이방인의 집권의지는 다 여기에 속한 것으로 경계 되어야만 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26~27) 이것은 분명 이세상 사람들의 자세와는 정 반대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교회라고 하는 데는 가졌던 모든 권력 조차도 내여 놓고 평등해 지는 곳이다. 야고보는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1:9~10)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에 권세를 부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세상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신약 교회의 모습도 그런 모습이었음을 사도행전 속에서 본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4:32) 그러므로 교회 속에 들어 온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모든 권리를 주님께 바치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도 자신의 의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직 한 분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당부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할렐루야!

주님의 백성이라면 육신의 혈육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챙기는 사람들이다. 만약에 교회 속에서 자신의 혈육을 챙기고 있다면 그것은 벌써 그리스도의 피를 거절하는 것이다. 일을 함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들 보다는 자신이 더 수고하고 자신의 혈육들을 더 시키고 영혼의 형제들을 배려하려 드는 자세가 교회 속에서는 더 중요한 자세이다. 영원한 피로 맺어진 그리스도의 피를 더 귀중하게 여겨야 하는 곳이 바로 이 교회이다. 남에게는 온유하되 자신에게 더 혹독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주님은 모범이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8)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섬기기 위하여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목숨조차도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는 모습 앞에 참으로 부끄럽고 황송해서 섬기고 또 섬기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나의 권력과 이권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위임해버린 사람들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사도 바울처럼 “나는 죽었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든지 내 자신이 높임을 받으려는 의지가 살아난다면 그리스도는 내 속에서 또 다시 죽으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겸손은 반드시 보상되는 데 이 세상에서 가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서 보상 받을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달라야 한다. 물론 정당한 것을 무조건 양보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우리가 철저하게 손해보지 않으려는 계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욕을 들으신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은 끊임없이 되살아 나려는 나를 주저앉혀야 할 주님의 명령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그렇게 살게 하려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 나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을 보내셨다. 우리는 이 세상의 짧은 영광에 목숨을 거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라 영원에 승부를 거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 속에서 나를 죽이지 못한 다면 영원 속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주님의 영광을 자랑하고 나를 낮추고 산다면 영원에서는 분명히 높은 영광을 영원히,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높임을 받으려고 하는 유혹을 받을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나 자신으로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온 갓 수치와 고난을 받으셨음을 기억하고 나는 죽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것 때문에도 우리는 매 주님의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