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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21:1~11 2005-10-02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이제 이 마태복음은 오늘 본문부터 마지막 28장까지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33년의 생애 중에 마지막 약 일주일 동안에 이루어진 내용이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救贖에 집중되면서 예수의 메시야 사역의 가장 결정적인 역할에 나아가고 있다. 복음서들이 다 이런 형태로 삼분의 일이 이 부분에 대해서 기록되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오늘 이 21장에서 25장까지 주로 예루살렘을 중심해서 베푸셨던 비유와 교훈들이고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고 그런 이유에서 십자가에 못박게 되는 마지막에 까지 이르게 된다.

주로 갈릴리에서 전도의 사역을 하셨던 주님은 요단 동편의 베뢰아를 거쳐 여리고를 지나 드디어 예루살렘에 이르시고 이 21장 서두에서 왕의 도성이요 하나님의 택하신 성도(聖都), 시온이란 별명을 가진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메시야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 동안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특별한 말이나 위엄스런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병거(兵車)나 수레를 타고 들어왔던 많은 이방 왕들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들어 오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초라하게 짐승의 우릿간 동물의 구유에 나셔서 세상의 권력과 명예의 괄시를 받으며 죄의 영향력아래서 하나님을 찾는 겸손한 자들을 구원하시려 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이제 서서히 정점으로 나아가고 그 최고봉이 바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이다.

그런 입장에서 본문은 세상의 모든 권세자들과 다른 독특한 그리스도의 겸손과 그 동안 하나님께서 보내셨던 선지자들의 예언을 철저하게 이루시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배우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의 논의도 당연히 이러한 부분을 중심으로 나누게 될 것이다.

온 우주와 인류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세상의 왕의 행차와도 비교 될 수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도성에 임하시는 모습은 오늘 그의 사람들인 우리들에게도 가르침을 주시는 행동이고, 당시의 로마의 압박 밑에 신음하면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자유를 얻으리라는 기대 때문에 세상의 권력자로 임하시리라는 잘못된 메시야 관을 가지고 있던 그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호는 결국 자신들의 생각과 같지 않은 것에 분노하여 십자가로 주님을 내 모는 모습도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크다.

평화의 주님이시지만 이 역사의 마지막에 임하실 때는 결코 이러한 인간 이성에 따라 구원의 역사를 마음대로 판단하고 변심하는 종교적 범죄를 하는 사람들을 결코 용서치 않으실 것이고 모든 권세를 가지고 의로운 사람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또한 용서치 않으실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의중이 바로 다음 주에 상고하게 되겠지만 주님께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택하신 성전으로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는 간악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무섭게 책망하시는 모습을 접하게 되고 시장하셨지만 무화과를 맺지 못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는 모습에서도 연이어 보게 될 것이다.



Ⅰ.주가 쓰시겠다 하라(1~3)

(1)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3)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세상의 권세를 가진 임금이나 장군들은 그 권세를 과신하기 위하여 대개 그들이 움직일 때는 언제나 특별한 말을 탄다. 특히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여 입성할 때는 더욱 호기를 부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도 특별히 눈에 띄는 흰말을 타는 것을 史劇 같은 데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말(馬)은 빠르기도 하지만 전쟁에서도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 특징이다.(욥39:19~25“그것이 골짜기에서 허위고 힘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아니하며 칼을 당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그 위에서는 전동과 빛난 작은 창과 큰 창이 쟁쟁하며,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를 들으면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나팔 소리 나는 대로 소소히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장관의 호령과 떠드는 소리를 듣느니라”)

성경에서 ‘약대’라고 기록되는 ‘낙타’는 전쟁에 사용된 흔적들이 더러 나타나지만(삿6:5, 삿7:12; 대상5:21) 나귀는 전쟁에는 사용되지 않는 농부들이나 중산층 이하의 짐을 나르거나(삼상25:18; 삼하16:1) 교통 수단으로 사용되는 짐승이다. 크기에 비해 힘은 좋은 편이지만 덩치가 적고 영리하지 못한 데 다가 속도도 빠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완전히 평화의 왕이라는 사실을 전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새끼 나귀를 타심으로서 장차 자신이 사람들의 죄의 멍에를 짊어지시기 위하여 그것도 아직 멍에 맨 적이 없는 새끼나귀를 타심으로서 나타내셨다. 이 모습은 이전에 여러 번씩이나 예루살렘을 침략했던 적군의 임금이나 장군들과는 너무나 비교가 되는 초라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언제나 순진하고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을 칭찬하셨듯이 이 어수룩한 나귀 새끼는 하나님의 아들을 태우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오늘도 주님은 단순하고 우직한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고 영광을 들어내심을 상징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여기 또 하나의 놓질 수 없는 인물은 바로 나귀의 주인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 모든 사람들의 됨됨이와 상황을 이미 완벽하게 아시고 제자들에게 시키셨겠지만 이름도 나타나 있지 않은 이 사람은 “주께서 쓰시겠다”는 한마디에 기꺼이 자신의 나귀를 풀어 가도록 하는 어리석을 정도의 순진함을 본다.

만약에 오늘 우리의 어떤 귀중한 제산을 오늘 본문의 주님의 말씀처럼 단순히 “주께서 쓰시겠다”고 가져가려 한다면 과연 이 나귀 주인처럼 순순히 내 놓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좀더 구체적으로 비교 한다면 우리 각자가 타는 그다지 좋지 않은 차라고 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세세하게 주님의 어떤 일도 말하지 않고 단순히 “주께서 쓰시겠다” 라고 달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게 된다. 아무리 착한 사람일지라도 “글쎄 그건 좋은데 지금 이것을 해 놓고 쓰도록 하시지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이 사람은 “주께서 쓰시겠다”는 한마디에 다른 아무 조건도 붙이지 않고 보내는 모습에서 주님에 대한 진정한 순종을 보게 되고 자신의 소유의 바른 사용을 보게 된다. 마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3 “…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는 아브라함을 연상케 한다.

오늘의 시대는 모든 면에서 이러한 단순한 순종이 어렵고, 오늘 우리가 정확하게 아는 상황일지라도 결코 쉽지 않은 신앙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되어 진다. 비록 세상이 어떻게 변했던지 또 무엇을 요구하시든지 “주께서 쓰시겠다”는 주님의 명령에 “기꺼이 그렇게 하십시오!” 라고 응답할 수 있는 …



Ⅱ.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4~7)

(4)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7)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4) 한 기록을 읽는데, 마태는 이미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선지자로 하신 말씀”(1:22, 2:5, 15, 23, 13:35)이라는 부분을 기록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을 증거하고 이스라엘이 고대하고 있는 구세주임을 확신 시키고 있다.

그러나 마태는 자신이 이렇게 구약의 예언 성취로서 오신 그리스도로 예수를 증거 할 뿐만 아니라, 좀더 적극적으로 예수께서 직접 구약의 선지자들이 증거 한 예언들을 철저히 이루려 하셨다는 사실을 증거 함으로서 말씀을 실천하시는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들어내려 한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는 증거로서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증거하신 말씀이 실체가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늘 5절의 인용된 본문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는 말씀이다.

나귀를 타신 이유를 세가지로 기록하는데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라고 밝히고 있다.

①공의로우며 – 대개의 군주들은 공의롭지 못하여 완력이나 무력으로 자신들의 권좌를 지키는 것을 본다. 지혜도 없고 모략도 없고 긍휼도 없기 때문에 왕으로 났다는 한 가지 사실로 숭배되고(태평양 전쟁의 원흉인 일본 천황이나 전두환 같은), 그 권좌를 지켜가는데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희생되는 무서운 악순환이 뒤를 있게 되는데 반하여, 칼도 무기도 지니지 않은 체로 당연히 숭배 받아 마땅한 위엄과 사랑과 평화가 그 보좌를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선동하지 않아도 자연과 우주가 찬양을 드릴 분이시기 때문에 구태여 위엄을 갖출 필요가 없으신 것이다.

나중 16절에 인용되는 것처럼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라는 시편8:2의 말씀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자연스러운 것이다.

②구원을 베풀며 – 피를 흘려 왕위에 오른 군주는 절대로 백성을 적들과 기근과 도탄에서 건질 수 없다. 아니 그런 군주들은 백성의 삶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자신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사셨다. 오히려 자신이 나귀처럼 그의 사람들을 주인처럼 위하시는 멍에를 메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에서 조차 자신의 양을 구원하시는 선한 목자이심을 보이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친히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신 선한 목자이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③겸손하여 – 진정한 왕은 절대로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사람들의 보는데 자신을 과신하려고 어떤 가식적인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증거 하는 진정한 신앙의 지도자들은 자신을 꾸미지도 않고 위장하지도 않는다.

사실 이러한 주님을 증거 하려면 그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증거 해야 호소력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호된 책망을 들었다. 예수 그리스도나 하나님 아버지는 가장 사실적으로 증거 해야 생명이 풍성하고 조금이라도 가식적이거나 꾸미려 한다면 오히려 그분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꾸밈 없이 하나님을 증거 할 일꾼을 하나님은 찾으시고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자세의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순종과 겸손을 그의 일꾼들에게 주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았던지 직분자는 주님을 닮은 겸손이 바탕이 되어야 주님께서 가장 기쁘시게 쓰시는 일꾼으로 사용하실 줄로 믿으시기 바란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주님을 표현하여 이르기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고 증거하고 있다.

여기 두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이 합리적이지 못하고 이해도 안됐지만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6) 라는 순종을 보이고, 이 순종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는 놀라운 은혜를 들어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셨다면 오늘 우리야 얼마나 진리 된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지키려고 애써야 하겠는가! 모두 기록된 성경의 진리를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



Ⅲ.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8~9)

(8)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 8절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이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돌층계)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왕하9:13)는 내용으로 엘리사로부터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예후의 말을 듣고 취한 행동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깨달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자신들의 입은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 깖으로써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쇠하지 않을 영광을 입혀주실 메시야이심을 행동으로 증거 했다.

그런가 하면 영락없는 왕의 행차를 묘사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9f)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 내용은 시편 118:25~26의 인용으로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라는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자들이 성전이 보이기 시작하면 멀리서부터 일반적으로 부르는 노래라고 한다.

이 성전을 사모하는 순례자의 노래는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찬양 되어지면서 구원을 호소하고 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메시야여 비노니 우리를 구원하소서!” 뜻이다. ‘호산나’는 구약성경에 모두 8회가 쓰여(삿7:2; 왕하6:26; 시12:2, 20:10, 28:9, 60:7, 108:7, 118:25)지면서 “구하(기도하)오니 구원하소서!” 라는 의미의 호소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자세히 모르면서도 그 위엄과 진실에 압도되어 이런 찬양을 드렸지만 예수께서 그들의 이런 기대와는 다르게 정치적인 권력이나 무력을 사용하지 않자 다시 이들은 예수를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27:22~23) 라고 빌라도에게 충동질 하는 것을 본다.

그도 그럴 것이 본문 10~11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는 기록처럼 언제나 군중들은 우매함을 본다.

마치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의 은감실을 만드는 직공들이 바울이 에베소에 복음을 전하자 자신들의 생업이 타격을 받을 것 같은 불안감에 소란을 일으킨 경우에도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행19:32)는 기록과도 비교될 만 하다.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핍박할 때 유월절에 천하에서 예루살렘에 모여든 유대인들이 약 3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는 기록을 봐도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고 그들이 단순한 동요에도 움직일 수 있었는가는 짐작이 간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같은 현상은 더러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바로 알지 못하는 모임은 수(數)에 관계없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염윤곤-택시를 타는 사람에게 예수는 누구이며 당신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가?) 교회를 와도 왜 교회를 와야 하는지 분명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교회를 들락거리는 사람들이라면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다. 소동은 있고 의문은 있으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 막연한 소속불명의 선지자 정도로 밖에 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임은 있으나 마나 한 모임이다.

오늘에도 그냥 훌륭한 선생정도로 나에게 복을 줄 수 있는 축복자 정도로 그리스도를 이해한다면 참으로 가련한 인생이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는 고백이 인생의 종착역까지 갈 수 있는 바른 믿음은 참으로 중요하다.



나귀처럼 우직하고 주인의 쓰임에 합당한 사람이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처럼 이 인류 구원의 역사에 쓰임을 받고, “주께서 쓰시겠다”면 자신의 건강이든 제산이든 이유를 불문하고 순종할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증거 되고, 어떤 경우에도 나의 인생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하는 주님을 닮은 말씀의 순종자들에 의해서 구원의 역사는 계승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의 해결자요 이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확신하고 그 분께 늘 구원을 호소하고 또 그분의 구속의 역사를 기쁘게 증거하고 찬양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