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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21:12~22 2005-10-09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셔서 맨 먼저 하신 일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만나는 장소로 구별하신 성전의 청결 작업이었다. 오직 하나의 목적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죄와 축복이 이루어지는 특별한 공간으로 성별하신 성전이 그 관리자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육신적 이윤을 위하여 악용되는 병폐를 직접적으로 책망하시고 사악한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셨다.

요한 복음에 보면 좀더 구체적인 주님의 성전정화작업을 기록하고 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2:15)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의 행동을 보게 되는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은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온유하시고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그 진리로 자신들의 권력과 이권을 삼아 착취하며 악을 행하는 당시의 실제 권력자들 앞에서는 참으로 강한 모습으로 그들의 죄를 지적 하심으로써 세상의 일반적인 사람들의 처세술[强對 弱, 弱對 强]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셨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聖殿 淸潔의 역사는 외형적인 것에 치우치는 물량주의의 신앙을 과신하려는 우리의 예배의 처소의 올바른 사용과 영적인 성전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心殿인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경계를 함께 주고 계시다.

열매를 찾으셨으나 잎사귀만 무성하여 저주 받은 무화과 나무의 사건을 통해서도 멀리서 볼 때는 건강해 보이고 열매가 있을 것 같으면서도 정작 가까운 곳에서는 열매 없는 가지의 모습을 같은 모습으로 가진 이 시대의 교회와 각자의 신앙에 경종을 울려주고 있는 귀중한 교훈이다.(막11:12~24; 눅19:45-48)



Ⅰ.성전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12~1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 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 하시니라”

솔로몬이 최초로 성전을 지어 놓고도 역대하 6:18~21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8:27~30) 라고 고백한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요 동물제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를 예시해 주는 장소였다.



1.오늘의 성전은 무엇일까?

①본문과 같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예배 드리는 장소로 이해할 수 있다.

예전처럼 죄진 인생이 짐승의 피를 뿌리고 기름을 태워 바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기념하면서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공적인 예배를 드리는 장소이다.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예배나 처소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들을 행하는 것보다 인간의 이성이나 감성에 충실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거나 특히 사람이 중심이 되거나 높임을 받고 의도적으로 백성들을 선동하여 물질을 강요한다면 여전히 주님으로부터는 책망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과거에 제물의 성결을 검사하는 권한이 제사장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이 거룩한 일을 빙자하여 사리사욕을 챙기는 것이 주님으로 채찍을 맞아 마땅했다면 오늘의 예배의 처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는 안되며 주님보다 사람들이 영광을 받아도 안될 것이다.

②성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요, 우리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세례를 받고 성령께서 거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오히려 성령의 전이요 성전이라고 증거하면서 경계하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행20:28)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각자의 마음의 성전도 더럽히면 역시 책망의 대상이 될것이다.



2.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만 사용되어야 한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13)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56:7)

하나님은 이 우주 가운데 충만한 분이시기 때문에 성전에 가둬둘 수 없는 분이시다.(왕상8:27; 대하2:6, 6:18 -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다만 사람들이 마음을 정돈하고 옷깃을 여미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마음을 털어놓는 기도의 장소이다.

죄인들은 사죄를 구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심판주로 다시 오실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은혜와 감사의 처소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주님의 명령과 의도와 다르게 사람들을 속이거나 수탈하는 곳으로 사용될 위험성도 주님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그때와 같이 언제나 있다.

주님께서 자신을 상징하는 이 성전을 찾아 오셨지만 가짜 주인들이 판을 치다 보니 진정한 주인이 오셨는데 알아보지 못했다. 당시에 그 성전의 실체이신 주님께서 오셨을 때 오히려 소경이나 저는 자들과 어린 아이들은 알아보고 기도하고 찬양했지만 지도자들이 알아보지 못했던 경계를 오늘 우리의 신앙 공동체는 갖지 않았는지도 경성해야 할 것이다.



3.강도의 굴혈을 만들 수도 있다.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 라는 말씀이 인용된 본문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7:11)

하나님은 사람들의 형편에 따라 제물을 드리도록 하셨고 과중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다.(출30:13; 레1:14; 5:7; 12:8 눅2:24) 함에도 불구하고 먼 곳에서부터 힘겹게 매고 온 양을 제물로서 불합격 판정을 내리고 뒤로는 그 불합격 판정을 내린 양을 싸게 팔게 하여 돌려와서 다시 비싼 값에 제물로 파는 그야말로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돈에만 눈독이 든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대로 보일 리 만무하다.

그러한 자신들의 비리를 꿰뚫어 보고 계신 주님을 죽이는 것 만이 자신들의 수치를 감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했으니 얼마나 무모한 생각인가! 누가는 함께 기록된 말씀에서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눅19:47~48)는 저들의 감추인 흉계를 폭로하고 있다.

요한이 역시 이 말씀을 기록하면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고 말씀하셨지만 성전의 주인이자 성전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정할 수 없는 성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타락하면 사람을 죽이는 가장 무서운 도구로 변하는 것이 바로 종교이다.

신령한 것이 속화되면 즉, 더럽혀지면 그보다 더 추한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 중에 하나인 性이 잘못 사용되면 가장 더러운 것이 되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인간의 타락이 가장 심하게 될 때 잘 못 사용되는 것이 이 [宗敎와 性] 두 가지이다.

도둑이나 강도의 굴혈(窟穴) 즉 소굴로 이용되고 있는 죄인을 구원하려던 장소, 그 성전을 보시며 주님은 진노하셨고 오늘도 인간 중심의 교회는 같은 책망을 받을 것이다.



Ⅱ.그러나 그 성전에서도 진실하게 주님을 찾는 자들을 치료하시고 어린 아이들의 찬양을 받으셨다.(14~17)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던 성전 속에서도 그 이권과 권력자들로부터 소외 당하고 힘이 없었던 장애자들과 어린이들은 주님을 바로 알아 보았고 찬양하였다.



1.성전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시는 모습이다.(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성전은 본래 죄를 가진 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사라는 행위를 통해서 회복하는 장소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성전은 이 본래의 모습은 잃어버리고 당시 지배 계층들의 배를 채워주는 장소로 변질되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라고 아버지께 기도한 바 있다. 베드로 사도의 기록처럼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은 시작되고 있는 것을 본다.

성전을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는 상업지를 넘어서 선량한 백성들을 등쳐먹는 강도나 다름이 없는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책망하셨지만 그럴지라도 차라리 불구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순종하려 했던 연약한 자들의 하소연을 주님은 받아 주셨고, 사실 이러한 불구자들은 다윗 시대부터 성전에서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던 소경과 저는 자들[…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삼하5:8b]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치유의 은혜를 누렸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실족하고 있는 것은 바로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였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11:5~6)

같은 마태복음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12:7) 하신 말씀을 이 곳에서 다시 사실적으로 이해 하게 된다.



2.선동되지 않은 찬양을 받으셨다.(15~16)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 수 없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다윗 시대부터 금지되어온 소경과 저는 자들의 치료를 성전에서 행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사역을 이상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감이 가득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의 병행 구절을 보면 마가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막11:18)는 기록을 읽을 수 있다.

진정한 성전의 주인이 오셔서 자신의 백성을 고치고 가르치는 모습이 삐뚤어진 그들에게는 속이 뒤틀렸고 자신들의 좋은 돈벌이를 방해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싶도록 미웠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순수의 모델인 어린 아이들은 호산나를 찬양하고 있었고 주님은 그것을 꾸짖는 저들의 항의를 거절하고 영광을 받으신다. 왜냐하면 성전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찬양은 격려되고 있지만 진정한 기쁨과 감사로 드려지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의도되거나 강제적인 것이나 사람을 의식하는 찬양은 온전치 못한 것이다.

Ⅲ.한 무화과 나무를 통하여 기도의 위력을 교훈 하셨다.(18~22)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에서는 이 내용을 두 단락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다.(11:12~14, 20~24)



1.언제든지 주인이 요구하시면 열매를 드릴 수 있어야 함을 교훈하면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함을 경고하는 말씀이다.(18~19)

비록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창1:14) 하신 해와 달의 창조의 목적이 있었지만 본래 절기가 없었던 에덴동산은 “…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창2:16b) 한 것으로 봐서 늘 과실이 풍성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 인간의 죄가 극에 달하고 세상이 한번 물로 멸한 후에 비로소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2)는 말씀과 함께 세상의 과목들은 요즘은 시설 재배를 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철에 따라서만 과일을 낸다. 그러나 천국의 열매는 에덴에서처럼 ‘시절을 좇아’(시1:3)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계22:2) 라는 기록을 본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맺게 되는 영적인 열매는 철에 관계없이 주님께서 요구하실 때 드릴 수 있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바로 성령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막11:13~14)

멀리서 볼 때는 열매가 있을 것처럼 무성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 보면 잎사귀만 무성한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보실 때도 같은 형편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경계를 주시는 말씀이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눅13:6~9)

우리 신앙의 사람들은 경계를 갖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1:7) 라고 했고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했지만 잘못된 안심은 경계해야만 할 자세이다. 바울의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는 자세는 우리 모두도 가져야 할 자세로 성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과 함께 신앙의 열매 맺지 못하는 안이함은 경계 되고있다.



2.다른 한편에서 이 말씀은 주님의 사람들의 기도의 위력을 설명해 주고 계시는 말씀이다.(20~22)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치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강조하실 때의 내용과 다르지 않은 교훈이다. 성전을 바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믿음과 기도는 엄청난 위력이 있음을 보게 된다.[연지동 미군사택부지] 앞에서도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는 더러 다룬바 있기 때문에 약한다.



Conclusion. 오늘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인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를 감격하고 또 아직 구원을 모르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복된 장소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사람의 의지나 감정, 생각보다는 하나님을 만나는 처소답게 십자가에 구속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과 함께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진노하시는 처소가 될 수도 있다.

성령께서 와 계신 각 믿음의 사람들의 마음의 성전도 사악한 세상의 것들로 채워져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멸하실 것이다. 이런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장애자와 어린아이 같은 자세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멀리서 보기에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 같은 신앙을 결코 칭찬하지 않으신다. 철이 아닐지라도 언제든지 열매를 요구하시면 내 놓을 수 있어야만 한다. 가까이 다가가서 열매를 찾으실 때 늘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지속적으로 맺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위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구원의 확신은 필요하지만 잘못된 확신은 치명적이다. 암 말기 환자가 자신은 건강하다고 착각하는 것보다도 더 비극적인 것이 바로 구원을 갖지 못했으면서도 구원 받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바른 하나님의 성전 즉, 성령의 청결한 성전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이라면 그런 사람이 가진 믿음과 기도의 능력은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의 도구이기 때문에 세상에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오늘 주님께서 찾아 오셨을 때 부끄러움이 없이 청결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으로 부끄러움이 없는 저와 여러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