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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22:34~40 2005-11-21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주님의 가르치심에 질문의 당사자인 사두개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군중이 다 놀랄 정도의 참패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과 경쟁적 입장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바리새인들은 마음으로는 점점 두려워 했던 것을 오늘 첫 부분에서도 읽을 수 있다.

당시의 바리새인과 사도개인 당파의 경쟁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심했던 것 같고 오늘날도 당파심은 많은 좋은 관계를 갈라놓는 어둠의 역할을 하는 죄악의 한 부분으로 주로 자신의 위상이나 이권에 의해서 발생되는 것들을 보게 된다. 이러한 바리새인과 사도개인의 당파심을 이방인을 위한 위대한 사도인 바울도 위기에서 사용하는 것을 사도행전23:6~10에서 볼 수 있다.

[(6)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7)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 (8)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크게 훤화가 일어날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 하여]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34)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을 분명히 들었으면 거기에 승복하고 순종하면 복인데 언제나 자존심을 꺾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아무래도 성경은 자신들이 많이 안다는 자긍심과 자신들의 이런 교만한 위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손상을 입으리라는 미래를 분명히 내다본 이들은 또 다른 계교(計巧)를 꾸미기 위해 모인 것이다.

건설적인 모임은 성경이 권장하고 있는 바지만 이렇게 죄를 짓는 모임, 하나님의 진리를 악용하는 자세는 사실 두려워 해야 할 죄악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대표자인 율법사를 선발하여 예수께로 보내고 있다. 당시의 율법사는 백성들에게 율법과 예언들을 풀어 가르치는 당시 최고의 성경 교사들이었지만 바로 성경의 기록자이신 하나님께는 역시 무모한 도전에 불과할 뿐이었다.

유대의 랍비들은 10계명뿐만 아니라 그것을 확대한 613개의 계명들이 전해져 내려왔고 그 중에 248개 조항은 “하라!”는 적극적인 항목이고 365개는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항목들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많은 변론의 대상이 되어오고 있는 것들이 있었는데 한 두 가지만 예를 들면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사33:15)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6:7) 라는 등등의 예언들이 율법의 어떤 항목과 연결되고 있는 지에 대한 토론도 분분했다고 전한다.

사실 이 귀한 교훈을 다루게 되면서 행여라도 주님의 교훈을 약화 시킬까 봐 염려가 된다. 그러나 오늘 이 성령께서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교회와 각자의 믿음 생활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막12:28~34; 눅10:25~28]



Ⅰ.말씀을 여전히 잘못 사용하고 있다.(35~36)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말씀을 직접 받은 “그때 그들”에게 주신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은 다시 오늘 “여기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율법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요, 율법의 뜻과 의미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저들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공부도 한바 없는 무식 하다고 생각되어지는 당시의 사람들의 평가와 함께 그러면서도 저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인기를 누리고 계신 예수를 이런 기회에 완전히 코를 눌러주려고 했던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명령의 의미를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아무리 뜻을 잘 이해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은 자신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런 이치를 충분히 알았어야 할 율법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예수를 시험 한다는 것 자체가 용서될 수 없는 불경건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보다도 그 말씀을 읽거나 듣는 당사자인 나에게 주시는 교훈으로 받아드리지 않으면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말씀을 읽고 연구해도 허공의 메아리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알고도 행치 않는 또 하나의 죄를 더하게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 첫째로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칭찬 듣는 교회였던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2:13)

성경에서는 오늘 본문과는 다르게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구원을 놀랍도록 누리는 삶들을 소개하고 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17:11~12)

말씀을 하나님의 진리로 감격하며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치 같은 말씀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하는 마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또 이런 사람들에게 말씀의 능력이 나타날 리 만무하다. 믿음의 성경인 히브리서는 이런 자들을 경고하여 이르기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4:2)

말씀을 잘못사용 하는 범죄, 그것은 그때 율법사들만 아니라 오늘날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동일하게 범하는 범죄가 될 것이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이르기를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4~5)고 디모데에게 경계할 것을 당부한다. 온 세상에 성령께서 충만히 와 계서도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읽을 때는 당연히 성령의 역사도 경험치 못할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순종하여 받들지 못하고 시험하기 위해 사용하는 불경건을 죄와 상관없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시길 …



Ⅱ.계명 중에 가장 귀한 계명을 가르치셨다.(37~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십계명 중 하나님 대상의 계명이다.

신명기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①마음을 다하고 ②성품을 다하고 ③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소위 말하는 “쉐마”의 인용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온전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가르침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평생동안 이렇게 사랑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인 여호와”이시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원문이나 인용문에 중요한 주안 점은 “다하고” 라는 동사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것을 남겨두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그대로 가지고 뛰어 드는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세가지 다 할 것들의 항목들을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나 자신의 모든 것이다. “다하고”에서 제외 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지 모조리 가지고 주님께 뛰어드는 것이다.

①마음을 다하고; 나 자신의 중심부인 감정과 생각의 모든 것을 다하여 사랑해야 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감정 없이 냉랭한 자세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뜨거운 감격의 눈물로 사랑해야 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아픔을 인하여 가슴 애이며 우는 것 같은 감정을 주님을 향하여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십자가가 나의 눈물의 이유가 되어야 하고 부활과 승천, 성령의 오심이 나의 희열이 되어야 한다.

②목숨을 다하고; 사람이 가진 목숨은 하나밖에 없지만 이 하나의 생명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 한분 뿐이다. 나의 생명이 다하기 전에라도 나의 생명을 바칠 수 있는 분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신 주님 한 분 뿐이시다.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512:3b] 그런대도 많은 사람들은 이 하나의 목숨을 너무 많은 대상에게 주려고 하는 모습을 본다.

③뜻을 다하여; 우리의 의지와 삶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는 자라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오히려 신앙을 이용하는 것을 볼 때면 그것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뜻이 정해져 있어야만 한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단1:8) “…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b) 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섬길 분도 하나님 뿐이시다.

공관복음들과 약간은 차이가 있는데 큰 범주에서는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마가와 누가는 여기에다가 ④“힘을 다하여”를 포함하고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12:30; 눅10:27) [힘 - 능력, 권세, 권능]

이렇게 나의 정서에서부터 능력이나 재산이나 어떤 것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순서적으로도 첫째 되는 기초요 또 크기에 있어서도 가장 큰 계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섬기노라!’ 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최고의 가치와 시간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질투 나게 하는 것이요, 주님을 분노케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주셨다. 그런데도 우리가 다하여 드리지 못한다면 당연히 주님은 흡족해 하지 않을 것이다.[185:1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주님은 온전히 드리지 못하는 나를 향하여 탄식하고 계시는 것이다.



Ⅲ.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이 세상에서의 실천 계명.(39~40)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십계명에서 인간 관계의 계명이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8)의 인용이다. 사실 살벌하다고 생각하는 율법에 이런 가르침이 있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또 이 말씀은 이미 이 마태 복음서에서 이미 인용된 바 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마19:19)

“둘째는 그와 같으니” 하나님을 경외 함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강조하시는 부분이다. 또 하나님 경외는 당연히 여기에서 결실 해야만 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 십자가의 형태는 이 계명을 상징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6~27)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바울 사도께서도 10계명의 대인관계의 항목들을 함축해서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9~10)고 정리해서 말하고 있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 부분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는 말씀을 우리는 제목으로 잡았다. 그러므로 이 내용을 좀더 자세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오늘의 과제이다.

여기의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했지만 산상보훈에서 주님께서는 같은 말씀을 주시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OT)”(마7:12)고 가르치셨다. “율법과 선지자”는 사실 구약성경의 별명이다.

사실 여기 “강령”이란 말은 [kremavnnumi,kremannymi, 매달다, 달려있다, 걸다, 매달리다의 뜻으로 (마18:6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라는 표현으로 번역된 내용과 같은 말씀이다.]

그래서 이를 영어에서는 구체적으로 그렇게 번역하고 있는 부분을 읽게 된다.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hang on these two commandments.”(NIV)

그런가 하면 주님의 이 답변에 대한 반응도 다른 공관 복음에서는 좀더 첨가되서 기록되고 있는데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막12:32~34) 라는 기록을 보는 동시에 누가 복음에서는 좀더 구체적인 반응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눅10:28~29)로 부터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계속 되고 있는 것을 본다.

오늘의 말씀은 유대인들의 복잡한 율법의 행동강령과 십계명을 단 두개로 정리하고 있다는 데서 대단히 중요한 주님의 답변이다. 그러나 다시 이 말씀을 더 압축하면 한 단어의 계명이 될 것인데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영원하다고 하는 바로 그 사랑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37~39)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신구약의 계명이 우리의 삶 속에 완전히 이루어지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이 말씀을 순종하는 여러분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경험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