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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13:11~14 2006-09-2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실 이 로마서13장은 세상 사회에서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한 권면이고 오늘 우리가 읽은 내용은 그 결론이라는 데서 더욱 중요성을 가지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현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다음 세상이 더 중요한 약속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부터 영원에 이르는 삶에 있어서 구별된 모습을 잃지 않아야만 할 것이다.

특히 세상의 역사가 어두울수록 우리의 빛의 역할은 더욱 귀중하고 그러면서도 영원의 역사를 증거 하는 하늘에 사람으로서 합당한 삶을 감당해야만 하고 절망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을 향할 수 있는 이정표 역할을 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시기에 따라 어떻게 적절히 잘 처신해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이 세상의 흐름에 민감하여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잘 변화하라는 그런 말은 아니다. 우리의 모든 판단기준은 보이는 세계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보이는 세계에서 그 이면의 영적인 세계를 읽어내고 판단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보이는 세계의 변화보다는 보이지 않는 이면의 세상의 변화를 더 빠르게 읽어내고 판단해야 하는 사람들이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다. 노아는 당시의 향락문화[눅17: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속에서도 120년 후에 그 문화가 마지막이 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방주를 예비할 뿐만 아니라 의의 도를 전파[벧후2: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하여 죄악에 묻혀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보는 것은 일반 사람들이 보는 기준이 아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

마찬가지로 우리의 투쟁하는 것도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10:4)고 고백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의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것들도 역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고 담대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영적인 사람들일 수 있다.

우리는 이 역사의 마지막을 어쩔 수 없이 살아 남는 소극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살아 남는 특별한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대부분 믿음의 사람들은 마지막의 시대를 곧잘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그 우려에 합당한 준비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쩌면 막연히 우리의 시간과 역사를 흘려보내는 나약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살 때가 많다.

그러면서 우리는 잘 변명하고 핑계한다. “나(우리)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에 살기 때문에 다를 수 없다.” 과연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도 이와 같은 변명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오늘 이 어둠의 역사를 사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냥 그 어두움의 역사에 적응하면서 적당히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지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으로 살아낸 사람들은 어느 역사에서건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의 환경이나 능력을 핑계하고 적당히 이 어두움에 숨어버리는 것은 사실 그 책임을 하나님께 떠 넘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해야 할 사람들이 그런 모습으로 있다면 과연 하나님은 천사로 이 역사를 회복하실까?

어느 시대에나 사람은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것이 있었다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산 사람들과 그냥 싸우기 싫다는 이유로 무사 안일하게 인생을 되는대로 내어 맡기는 사람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오늘 말세지말(末世之末)이라고 하는 이 시대에 나(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한가지 분명한 것은 바로 이 말세지말의 시대에 주님께서는 이 역사와 사람들을 우리와 우리의 교회의 어깨에 매워 주셨다는 사실이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다른 기관이나 사람들을 사용하여 이 마지막 시대를 하나님의 뜻으로 회복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나(우리)와 우리의 교회를 통해서 라는 사실을 실감한다면 우리의 사면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기드온과 3백 명을 선택하셨다면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바로 우리 자신과 교회가 이 어두움의 역사를 짊어지고 감당하기를 기대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오늘 넉 절의 짧은 이 말씀 속에서는 그러한 주님의 의도를 이해하고 감당해야 할 주님의 사명과 약속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Ⅰ.믿음의 사람들은 역사의 흐름을 안다.(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신앙의 사람들은 한 날 한 날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하신 계획된 시간에도 민감할 수 있어야 한다. 초, 분, 시간, 날, 달, 해가 흘러가는 [시간의 경과, 헬, 크로노스(chronos), 시간의 흐름이나 간격]가 있는가 하면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라고 하면 [때, 헬, 카이로스(kairos)]는 그것을 바라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주어지고 특별히 하나님의 예정된 카이로스는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노아나 요셉(창50:24~25) 같은 하늘의 사람들에게나 감지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인데 물론 일반적인 사람들의 육신의 일에서도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앙의 사람들은 이 역사를 분별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고 그 이유는 이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기한이, 날이, 사십 년이, 천 년이, 때가 차매”(갈4:4) 같은 하나님의 예정하시고 계획된 시간들이 더러 쓰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많은 인류의 시간과 때는 점쟁이나 마술사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깨달아 진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음을 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 시기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고 이러한 시각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시각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평가되어지는 견해들이다. 그러나 안된 일이지만 독일에서 시속 450Km를 달릴 수 있는 최첨단의 자기부상열차 트랜스래피드(Transrapid-TRI)가 시험운행을 하다가 적지 않은 사람의 사상자를 낸 소식을 접하면서 반드시 과학적인 것들이 긍정적이거나 이 어두운 역사를 책임질 논리가 되지 못함을 배운다.

조금만 영적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대가 불빛에 겉치장을 화려하게 하는 어두움의 역사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은 세상의 타락의 양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평가에서 볼 때는 그 만큼 빛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수가 적어졌다는 안타까운 판단을 할 수도 있다. 전기 불이나 네온은 불야성을 이루지만 그에 비례해서 영혼의 빛을 가진 생명의 빛이 희미해져 가고 있는 시기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화장을 고치고 회전하는 화려한 빛에 한바탕 소란스럽게 놀아보겠다고 벼르지만 이 역사의 어두움은 이미 자정을 너머 새벽으로 가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의 화장을 고칠 것이 아니라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광명한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맞을 준비를 하기 위하여 우리 마음을 씻고 영혼의 거울인 성경을 들여다보면서 우리의 영적 매무새를 고칠 때이다.

어두움의 때는 모든 인조 불빛에 화려하게 보일 수 있는 장신구를 많이 단 의상이 어울리겠지만 광명한 그리스도의 새벽 별이 떠오르는 이 여명의 시기에는 잠옷을 벗고 흐트러진 잠잘 때의 모습을 씻고 가다듬어 흐트러진 모습으로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맞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새벽조차도 몽롱한 정신으로 아침을 맞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의 권면에 귀를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1:13) 우리의 목표는 이 역사의 밤에 한탕 해서 사는 어두움의 사람들이 아니라 밝은 아침에 목표를 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다가 깰 때를 바로 판단해야만 한다.

2.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웠음을 안다.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시간이 가면서 신앙의 깊이는 더해가고, 각각 개인의 삶의 연령이 더해져서 육신의 삶을 벗을 시기를 더욱 가까이 바라 보는데서나, 이 글을 썼던 일세기 보다도 2천년이 지난 시기이면서 어느 때보다도 어두움이 짙어짐을 깨닫는다면 그만큼 주님의 오심의 시기는 당연히 가까워 진 것이 분명하다.

어느 때보다도 어두움의 시기를 사는 우리들은 우리 자신과 교회의 신앙의 잠에서 뿐 아니라 이 역사를 죄악에서 깨울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의식해야만 할 시기이다. 파수꾼들이 동 틂을 기다리는 것처럼 이 역사를 지키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깰 때가 어느 때보다도 이 때이다. 이것은 우리 육신의 삶의 어느 문제보다도 우선되어야만 한다.

“그 소리는 늘 하던 상투적인 말쟁이들의 소리인데 뭘…!” 해버린다면 후회할 수 밖에 없는 어두움을 깨닫고 잠든 영혼의 심령에까지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 역할을 감당하는 …



Ⅱ.빛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12~13)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하늘의 사람들이 빛을 잃어버리고 어두움에 사로 잡혀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 마지막 시기에는 그런 일이 많은 것 자체가 마지막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지어다”(사52:11-고후6:17) 라고 간곡히 당부하고 계신다.

1.밤중을 지나 새벽으로 가고 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이미 V11f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라고 경고하고 여기서 다시 확인한다. 밤은 거의 끝나 가고 아침이 밝아 오고 있기 때문에 그 광명한 아침에 맞는 사람으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문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의 어두움의 모든 죄의 값을 십자가에서 이미 지불 하셨기 때문에 그 어두움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당부의 말씀이다.

이제 우리의 가치를 나타낼 대가 바로 가까이에 와 있는데도 그 사실을 의식 못한다면 여전히 어두움에 종 노릇 할 수 밖에 없다. 낮의 사람들에게 밤의 일은 어울리지 않는다.

2.잠자리의 파자마를 벗어야 할 때이다.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의상은 그의 신분을 말해 준다. 대낮에 파자마 바람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잠옷은 잠에만 적합한 옷일 분이다. 요즘 문화 매체 속에서는 부부 간에 침실에서나 입음직한 의상들을 버젓이 입고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행동을 하는 것은 이 역사가 밤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귀한 분이 어느날 아침 일찍 찾아 오겠다고 하면 파자마 차림과 흐트러지고 엉클어진 머리와 침 흘린 그대로 맞을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그런데도 오늘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의 태반이 그런 모습으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런 모습으로 맞으려고 하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본다. 신앙 한다는 사람들이여 이제 잠옷을 벗어야 할 때이다.

3.하늘의 의의 옷을 입어야 한다. “빛의 갑옷을 입자” 잠옷을 벗은 속옷 차림으로는 주님을 맞을 수 없다. 바울 사도는 그의 옥중 서신에서 하늘의 백성들이 벗어 버려야 할 것들과 대신 입어야 할 것들을 낯 낯이 지적해 주고 있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골3:8~10, 12)

하늘에 속한 백성들에게는 거기에 어울리는 당연한 복장이 있다. 빛이신 하늘 아버지로부터 입혀진 옷은 당연히 빛의 옷이면서 이 옷은 죄와 어두움을 이기는 갑옷이다. 바울은 이것을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1)는 당부로 표현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입혀진 빛나고 깨끗한 하늘의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19:8)

4.광명한 하늘의 사람으로 행해야 한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여기서부터 나타나는 경계는 당시 타락한 로마의 풍조에 대한 경계와 같은 오늘의 세속적인 삶에 대한 경계 항목들로 육체적이고, 성적이고, 감정적으로 조절되지 않은 타락의 삶을 경계해 주고 있다.

사람들에게서는 그 신분에 맞는 위엄과 품위가 묻어난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신앙적 모습을 흐트러뜨릴 수 없는 이유는 언제 주님께서 나타나실 지 모르기 때문이다. “낮에와 같이” 밤을 살지만 우리의 삶은 한시 동안도 마음을 방심할 수 없는 긴장된 삶을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밤에 소속된 사람들이 아니라 영원한 낮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단정히, 헬, 유스케모노스(euschemonos), (본래 좋은 모양에서 유래) 예의 바르게, 점잖게, 정직하게] 라는 모습이 천국백성으로서의 예의 바른 모습을 견지하라는 의미이다.

5.세상적으로 잘 어울리는 삶을 버려야 한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모습에 더 익숙하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방탕, 헬, 코모스(komos), (해이해진 것처럼) 술 마시며 떠들기, 반역, 소동] 바울은 갈라디아서5:19에서부터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V21에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하여 오늘 본문과 반대로 술 취함이 앞서 오기는 하지만 이것이 다 육체의 일들이라고 엄히 경계한다.

6.죄의 삶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이미 이 세상의 결말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음란, 헬, 코이테(koite), ‘눕다’ 라는 침상에서 유래하여 부적합한 남녀 관계를 의미하게 되었다.]; [호색하다, 헬, 아셀게이아(aselgeia), ‘잔인무도한’에서 유래하여 방탕, 무절제, 음탕, 방종] 주님께서는 마지막을 경계하시면서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눅17:27; 마24:38)

7.믿음 안에서는 다투고 질투하지 말아야 한다.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우리는 마치 갓 잡아 올려놓은 생선처럼 아무리 몸부림쳐야 소용없는데도 살았다고 퍼덕거리고 살겠다고 퍼떡거립니다. 아직도 시퍼렇게 나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지요… 주님의 도마 위에 주님 뜻에 맡기고 “주님 나를 뜻대로 요리 하십시오!” 하고 맡기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하며 나는 그렇게 섬기지 못하면서 나보다 잘 섬기는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이 태반이다. 이런 자세를 경계하고 있다.



Ⅲ.그리스도를 옷 입고 살아야 한다.(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여기 ‘오직’이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1.하나님께서 입혀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흰 옷을 벗지 말아야 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이미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롬1:7)

가장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는 의식은 바로 세례라는 의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한 자가 되고 다시 부활에 참여한 자가 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게 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믿음으로 구원 받기 때문에 세례는 반드시 받아야 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데 그들은 이 그리스도를 옷 입는 엄연한 약속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야곱이 아버지께 이삭에게 복 받기 위해 나아갈 때 형 에서의 옷을 걸치고 나아가서 맏형의 복을 대신 받았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복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여 기도하고, 그것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이미 허락하신 것이다.(요14:13~14)

그리고 우리는 이 입혀주신 그리스도의 옷을 더럽히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3:4)

2.신령한 일을 위해 애써야 한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리스도를 옷 입고 사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힘써야 할 것을 부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것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을 에베소서에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4:22)

그리스도를 옷 입은 사람들은 [정욕, 헬, 에피뒤미아(epithymia), (특히 금지된 것을) 동경, 욕망, 갈망] 위해서 육신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신령한 일을 위하여 육신을 쳐서 굴복시키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육신의 일(헬, 프로노이아, pronoia)을’ 이라는 말이 ‘미리 + 생각’ 한다는 의미다.

신령한 사람들의 미리 계획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영적인 일이지 정욕의 일을 계획적으로 결행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마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