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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벧전 1:13~19 2006-10-01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다. 구원의 선물을 누린다고 하는 것 자체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거져 주신 선물이다. 이 말은 믿음의 사람들은 먼저 받은 바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는 받았다고 고백하면서도 그 은혜 받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다니엘을 향하여 “내게 이르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단10:11f) “가로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단10:19f)

위대한 사도인 바울은 자신의 행한 일들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또 은혜 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받은 은혜를 알고 가져올 은혜에 온전히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즉, 미래의 완전한 구원에 삶의 목표를 둬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은혜 받은 자의 삶에 대한 경계로 은혜를 입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다.

또 이 말씀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은혜의 삶을 증거하고 그러한 삶은 주님의 재림에 완성될 것을 증거 하심으로써 하늘에 합당한 우리의 삶을 당부하는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오늘 나는 은혜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혹시나 은혜를 욕되게 하는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지 않는지 이 말씀을 통해서 점검하면서 천국을 향해 가는 나그네의 삶을 살면서 은혜를 지속적으로 누리고 미래에 재림의 주님께서 가져오실 완전한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어떠한 모습으로 신앙해야 할까를 다시금 점검하는 …



Ⅰ.성별된 삶을 살아라.(14~16)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신앙 하는 사람들의 변화는 분명해야 한다. 그 기준이 뚜렸하고 모습이 분명해야 한다. 사실 ‘거룩’ 이라는 말은 하나님께나 어울리는 낱말이고 사람에게는 사용하기 조심스러운 표현이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감히 이 말을 사람에게도 쓰면서 옛날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명령하신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4~45)

한마디로 구별된 삶을 살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게 하시려고 우리의 죄악의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지불하고 사 주셨고 이런 입장에서 뒤에 가서 다루게 되겠지만 구별되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를 욕되게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먼저 는 부전적인 경계를 주신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14) ‘이전 알지 못할 때’는 두말 할 필요 없이 주님을 알기 전의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은 삶의 때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면서 옛사람은 이미 물속에 장사 지낸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죽어버린 과거의 삶이 여전하다면 그것은 전혀 영적이지 않은 것이다. 과거의 하나님을 몰라 불순종할 때의 세상의 유능한 모습이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습과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주님을 믿기 전에 세상에서 가진 목표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무엇이 되어야지!, 나는 누구처럼 되어야지!” 그러나 하늘의 가치로 거듭난 사람들이라면 더 이상 그 과거의 가치를 인생의 목표로 삶고 살아서는 안된다. 비록 과거에는 알지 못해서 불순종했지만 이제는 그런 유치한 가치로 영원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제는 “순종하는 자식처럼”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 성별의 목표를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5) 당부를 하고 있다. 우리를 부르신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 아버지이시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본삼을 수 없기 때문에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주신 것이다.

바울 사도도 같은 당부를 준 바 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엡5:1) 좀더 구체적인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

이것은 적어도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이기 때문이라고 베드로는 일깨워 주고 있다.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16)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b)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20:7)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거듭났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는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적어도 세상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본 받으려고 경건을 연습하며 애쓰며 기도하며 성경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주님은 귀하게 보신다. “그래, 내가 너의 그러한 삶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지!” 마치 귀엽게 쌔근거리는 갓난 아이를 보는 엄마처럼, 희생의 대가로 거듭난 한 인생의 구별된 삶을 의하여 세상에서 분투하는 주님의 백성을 보시는 주님의 사랑은 지극할 것이다.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 났다면 비록 이 땅에서 성결이 완전해 지지는 못할지라도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라는 바울 사도의 목표는 바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이다.



Ⅱ.경외하는 삶을 살아라.(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절대로 외모로 취하시지 않으시지만 그러나 모든 행동은 그 중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대로 판단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어떤 부분들은 사람들의 눈에서는 감추어져 있지만 주님은 우리의 밤낮을 다 보시고 어디에 있든지 살피시는 주님이시고, 그 행동들이 어디로부터 오는가 까지를 판단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우리의 안팎을 다 살피시는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가까이 지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섬길 것이다. 특히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나그네는 언제나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자신으로부터 좋지 못한 소문이라도 나는 날에는 자신의 가는 길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고 세상의 나그네는 역시 사람들을 의식하지만 천국을 가는 나그네는 늘 위를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다.

만약에 지나갈 이 인생을 바로 가지 못한다면 영원한 본향에 들어 가는 것을 거절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나그네 길을 두려움으로 지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을 의식하는 유치(幼稚)함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령한 삶을 살아야만 할 것이다.

세상의 불신의 사람들 조차 ‘하늘 무서운 줄 알아라!’고 곧잘 말한다. 우리가 그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절대적인 공의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참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살아야 할 것이다.

죄를 지을 때마다, 세상의 것들에 유혹될 때마다,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를 두려워 해야만 할 것이다.



Ⅲ.이러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보는 사람들은 사람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삶의 원인이 첫 조상 아담으로부터 유전되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저주의 쇠사슬이 끊긴 것은 이 세상의 가치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증거 하는 것이다.

영원한 저주에서 사람이 자유 할 수 있는 것은 이 땅의 가치인 금이나 은 같은 유한한 것으로 된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적어도 아담 이후에 이 죄악의 땅,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불사르기 위하여 예비 된(벧후3:7)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이라고는 날 수 없었고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6~17)고 확인 시켜 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속고 산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그래도 사람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고 더 낳은 방향으로 개선될 수 있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믿음의 사람들 조차도 이 어두움의 마지막 시대에 많은 부분에서 속고 있는 것을 본다.

어떤 사람들은 감정에 속고, 어떤 사람들은 말에 속고, 사람에 속고, 환경에 속고, 운명에 속고, 돈에 속고, 사랑이라는 미명에 속고, 관계에 속고, 거짓된 약속에 속고, 이적에 속고, 그럴싸한 거짓된 것들에 속고 또 속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면 모두 가짜이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심지어 구원의 약속 조차도 하늘에서 주신 것이 아닌 사람들이 그럴싸하게 뀌어 맞춘 것들에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

친구를 선택하는 데도 조심해야만 한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고전15:33)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것 그대로가 아니면 모두 가짜이다.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구언에 관한한 땅에서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은 가짜이다.

이런 모든 것들에서 자유하고 지혜로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하시려고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저주를 사해 주신 것이다. 모든 것이 허물 투성이인 세상, 뒤집어 놓고 봐도 바르지 않고 돌려 놓고 봐도 온전할 수 없는 이 삐뚤어진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하여 세상의 사라지고 없어지는 가치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피 흘리게 하셔서 그 거룩한 피의 가치로 우리를 절망의 유전, 저주의 유전, 슬픔의 유전에서 끌어내 주셨다.

그래서 저는 바울의 고백을 자주 인용한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 보배로운 독생자의 피로 우리를 대속하셨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그 희생 때문에 우리가 살고 소망을 갖게 되었다. 우리의 노력과 천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로 값을 치르고 산 생명들이 되었다면 삶의 이유도 목표도 다를 수 밖에 없다. 과연 오늘 나는 무엇 때문에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Ⅳ.주님께서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라라!.(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그리스도인의 은혜는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언제나 은혜에 살고 또 은혜를 받으며 살고 은혜를 인하여 살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6)

믿음의 사람들의 진정한 은혜는 아직 미래적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큰 은혜의 극치가 될 것이다. 또 이것이 가장 큰 소망이다.

매 순간이 다음 순간을 지키시는 은혜로 또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므로 소망이지만 이런 모든 것들은 구원의 완성을 이룰 재림의 날을 목표로 사는 사람들이 신앙의 사람들이다. 우리의 성화도 은혜도 완성될 그 영화로운 아침을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소망이요 기대이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그러므로 “소망의 삶을 살아라!”는 격려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만 주신 약속이요, 이 약속 때문에 신앙 하는 사람들은 상황과 조건에 관계없이 언제든지 행복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자세의 삶도 같이 당부하고 계신다. 앞에서 구별된 삶과 경외하는 삶을 당부했지만 사실 이 말씀이 맨 앞에 위치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공동] 이것은 마치 애굽을 빠져나가기 위하여 유월절 양을 먹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보는 모습과 일반이다. [출12: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나그네는 그 걸음이 민첩하기 위하여 허리를 단단히 잡아 묵고 단순한 차림으로 걸어야 하기 때문에 허리를 동여매야 하는데 신앙 하는 사람들은 바로 마음의 허리를 동여매라는 당부를 듣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 허리띠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엡6:14) 라고 그리스도인들의 단장을 가르쳐 주고 있다.

주님의 다시 오시면서 가져올 은혜를 기다리는 두 번째 자세는 [근신하여, 헬, 네포(nefo), 술취하지 않다, 분별 있다, 지켜보다, 자제력이 있다.](4: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5: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이다.

미래의 온전한 은혜를 기다리는 자세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다시 오심의 때를 기대하는 것으로 또 다른 소망을 삼는 천국의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과 함께 모든 인류를 위하여 은혜를 가져 오시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고 증거 하는 삶이 지속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소망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자신 있게 증거 하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삶이 되어야 한다. 자신 있는 삶을 살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이 부끄러울 뿐이다.

과거의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을 본 받지 말고 우리를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시기 위하여 세상에 없어질 보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순종하여 다시 이 땅에 심판을 위해서 나타나시는 주님의 가져오실 은혜도 온전히 기대하는 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