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벧전 1:20~25 2006-10-08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우리는 지난 시간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18~19)는 놀라운 약속을 확인하면서 우리의 은혜는 과거와 현재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이땅에 다시 오실 때 오히려 우리의 완전한 변화 까지도 가져올 것을 기대하자고 격려한 바 있다.

오늘 다루는 말씀은 그러한 약속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그 약속을 키우며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면서 그것이 계속해서 이 역사에 오고 또 가는 육신의 사람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영원한 언약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한 마디로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저주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의 가장 실제적인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모습에서라는 말씀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모습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가진 내면의 모습은 반드시 삶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불변하는 감격의 약속을 가졌다면 그러한 구체적인 모습은 미움과 저주의 삶에서 벗어나 사랑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고 사랑도 연애하는 남녀처럼 잠시 잠깐 불탔다가 꺼지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언약을 소유한 이상 영원토록 지속적으로 불 탈 뿐만 아니라 일 순간이라도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짓된 것은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불변하는 약속처럼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이다.

이러한 베드로 사도의 신앙 하는 사람들의 진실된 사랑은 바울의 사랑의 헌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내용과 一脈相通함을 깨닫게 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4~8)



Ⅰ.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자들이다.(20~21)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역사는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계획되고 의논 된 것으로 이런 원리에서 이해한다면 세상의 창조 자체가 영원의 모든 저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였다는 엄청난 원리까지도 이야기 할 수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역사의 마지막에 그것도 구속 받은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실 수 밖에 없으셨고 이것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로 하여금 신뢰와 소망을 하나님께 두게 하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바울 사도도 교회론이라고 하는 에베소서에서 같은 고백을 하고 있는데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3~5) 라고 같은 증거를 주고 있다.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21) 이 말씀을 보면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이시고 도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시지만 베드로 사도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가르치고 있다.

무엇보다 신앙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이 세상도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께’만 둬야 그 신뢰와 기대가 결코 쇠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수시로 변하는 이 세상에서 불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변하는 것 즉, 이 세상에서 귀하다고 하는 것들을 믿거나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나 기술이나 어떤 것에도 소망을 둔다면 그것은 결국 허무하게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히13:8)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약1:17b) 하나님께만 절대적인 신뢰와 소망을 둠으로 영원토록 믿음과 소망을 지켜가는 …



Ⅱ.썩지 않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자들이기 때문이다.(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앞의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18~19)는 말씀의 반복 같은 감이 든다.

누가복음8:11에서 주님께서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라는 가르침을 생각하게 한다. 세상의 모든 열매는 대부분 생명을 가졌지만 그것은 환경이 좋지 못할 경우에는 생명을 움 티우는 대신에 썩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천국의 씨인 복음은 어떤 환경의 사람 속에 심겨지든지 그것은 썩을 수 없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서는 복음의 씨가 심겨지고 몇 십년이 지나고서야 발아를 시작하는 경우도 있고, 저주 받은 썩은 시궁창 같은 곳에서 천국의 씨인 복음을 받고 그러한 환경에서 아름다운 복음의 싹을 티우는 경우도 더러 있다.

만약에 생명이 있기만 하다면 그리고 그 씨앗이 흙에 제대로 심어 지기만 한다면 그 씨는 생명의 능력을 욺 티우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생명을 가진 씨는 흙 속에서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고 까지 비유 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대부분 식물의 씨앗은 오랜 기간 심겨지지 못한다면 그 생명이 소멸되어 버리지만 한 사람의 마음 속에 깊이 심겨진 천국의 씨앗은 반드시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는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그것은 절대적으로 강제적이지는 않다.

그런 입장에서 밭의 상태에 따라 결실이 다를 수 밖에 없다고 주님은 비유하셨다.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13:4~8)

그러므로 성장과 결실의 문제는 전적으로 밭의 상태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천국의 씨는, 생명을 가진 씨에는 절대로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각자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는 놀라운 약속을 우리 각자의 삶에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썩어질 씨가 아닌 썩지 아니할 씨’를 받은 우리의 삶의 밭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썩을 수 없는 영원과 영광의 씨를 생명으로 받은 우리의 삶이 모두 옥토 같은 토양으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는 …



Ⅲ.세세토록 사라지지 않을 복음을 가졌기 때문이다.(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사40:6~8)

이 부분에서는 이 세상적인 것과 천상의 것을 대비시키면서 우리는 하늘의 영원한 것에 의해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임을 증거 한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24) 하나님의 말씀은 에덴 이후의 사람 그대로를 어떤 경우에도 긍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올 한해도 가을을 맞고 있지만 봄에 연녹색으로 힘있게 올라와 짙은 초록의 왕성한 생명력을 뽐내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던 한해살이들은 어느새 노란 잎을 떨구며 힘없는 모습으로 시들어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우리네 인생이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요즘은 사람들은 자신의 푸르름을 좀 더 오래 유지해 보려고 온 갓 수술과 관리를 해 보지만 아무리 찬란한 꽃의 영광도 스러질 수 밖에 없는 것이 한 해 살이 식물의 운명이다. 특히 사철식물이라고 하지 않고 “풀”이라고 하는 부분을 사람에게 비유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사람이 입는 찬란한 영광도 기껏해야 한 여름 피고 반드시 떨어져야 하는 풀꽃에 비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을 내다본 영국의 시인 W. Wordsworth는 Splendor in The Grass(초원의 빛)라는 시에서 “…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것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서러워 말지어다. 차라리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힘을 찾으소서. 초원의 빛이여! 빛날 때 그대 영광 빛을 얻으소서.” 라고 인생의 영화의 순간을 잃지 말고 누릴 것을 권면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푸르렀던 날과 영광을 입었던 순간을 분주함으로 보내버린 것에 대한 한탄을 하는 것을 듣는다. 사실 죄를 가진 에덴이후의 인생이란 우리의 원하는 만큼 영광으로 우리 곁에 머물러 주지 않고 싱싱한 푸르름으로 지켜주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청춘을 그리워 하고 회상하는 노래로 달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정말 인생이 이것 뿐이라면 한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여기에서 끝내지 않도록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 주셔서 보다 근본적인 저주의 문제를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시므로 허무한 인생을 채워주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만족과 감사로 채우도록 하셨다. 할렐루야! 뿐만 아니라 이 육신의 삶을 넘어서 세세토록 변함없는 영광을 입게 하셨다.

그 약속이 바로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25)는 말씀이다. 영원히 영원히 영광스럽게 존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화를 덧입게 하셨는데 그것이 곧 세세토록 있는 말씀을 각자의 생명에 심음으로써 가능하게 하신 것이다.

사람은 영원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 5) 하시고 주님께서 친히 영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시고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들어가도록 허락하셨다.

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망의 몸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십자에 함께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하나가 되는 거듭남을 통하여 가능케 하신 것이다. 유한한 존재인 사람이 무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그것은 바로 세세토록 있는 생명의 말씀을 우리 삶에 심어 영원한 생명을 움티워 영원을 힘입게 하신 것이다.

너무 철학적인 표현이 된 것 같지만 이것이 사실이고 유일하게 죄를 가진 인간이 영원할 수 있는 방법이다. 세세토록 존재하는 말씀을 의지하여 영원을 사는 …



Ⅳ.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을 살게 되면 삶의 길이에만 변화가 있게 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삶의 모습 자체가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데 그것이 곧 각박하고 짜증나고 미워하는 삶에서 여유가 생기기 때문에 대범해지고 넉넉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미워하고 저주하던 삶에서 사랑하고 축복하게 되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

에덴을 쫓겨나와 동쪽에 장막을 치고 살면서 자식을 낳았지만 결국 최초의 자식은 같은 형제를 시기하고 죽이는 비극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미움은 좋은 것이 아니지만 대대에 전달되어서 이 땅에 끊임없이 피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저주스러운 미움의 끈에서 모든 사람들을 자유케 하시려고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 이것은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 이 저주 받은 운명에서 완전히 자유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진리, 희생의 피를 순종함으로 가능케 하신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의 영혼이 죄에 오염되어 있는 한 결코 깨끗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변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영혼을 깨끗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흘림으로 마귀 사탄의 저주의 수하에서 자유케 하시고 죄의 노예로 끌려 다니며 미움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죄의 종에서 비로소 의의 종, 평화의 종, 생명의 종, 자유의 종이 되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죄의 저주와 슬픔과 미움에서 자유 한다는 사실을 가장 사실적으로 보게 되는 모습이 바로 “…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 한 사실이다. 예전에는 사랑한다고 해도 사랑하는 척이 많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 거짓이 없는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삶은 나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있는가를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자식은 반드시 그 부모의 삶을 본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는 말씀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다시 요한 사도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4:12)는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심지어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는 두려운 경계까지 주고 있다.

“…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사랑은 따스한 것이다. 좀더 사랑하게 되면 뜨겁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 어떤 젊은이들은 순간적인 사랑을 불태움으로 완전히 재가되어(burnt out)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탕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결코 불타 없어질 위험성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진리가 그 연료이기 때문이요, 영원하신 주님께서 바탕이 되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피차 사랑하라는 권면을 주고 있는 것이다. 육신의 혈육끼리는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끼리 서로간에 뜨겁게 사랑하고 멸망할 가련한 영혼들을 복음을 나눠줌으로 사랑하고 이런 모습이 자연적으로 나타남으로 그러한 사랑의 관계에 자신을 참여 시키고자 하는 세상의 사람들이 교회에 더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교회의 성장이 될 것이다.

교회의 사랑은 이런 것이기 때문에 좀 특별하고 이런 사랑의 관계가 드러남으로써 교회의 교회다운 면모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