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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후 8:1~5 2006-12-09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역시 물질이라고 하는 가장 직접적인 삶에 관련되고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이유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시험이 많은 부분도 역시 물질이다.

주님께 드리고 그렇지 못하고의 문제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풍족하게 누리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가난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가? 라는 입장에서 하나님을 불공평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현실에서 물질에 대한 가치관의 문제이다.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다고 하는 입장에서 마치 돈이 만능인 것처럼 생각하고, 금전을 하나님의 자리와 비교하는 풍조가 현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 이런 결과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든 개의치 않고 돈의 노예로 전락해 버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와 외모와 권세를 가져오는 것처럼 보이는 돈에게 기꺼이 노예로 자처하는 것을 보게 될 때 안타까움을 갖게 된다.

또 다른 안타까움은 수고 없이 갑자기 생기는 부(富)의 불균형으로 인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느끼는 박탈감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별로 선하게 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부자가 되는 일이 이 사회의 곳곳에는 더러 나타나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삶에도 불구하고 일평생 집 한 체도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이런 불합리한 문제를 어디까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안타까움을 갖는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과 같이 보이는 하나님 같은 존재인 돈의 가치를 바로 평가하고 성실하게 수고한 결과로 마련한 돈의 바른 사용과 다른 사람들에게 인색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며 사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오늘 날에도 어리석은 부자(눅12:13~21)는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책망 받는 대상이지만 의로운 부자들이 많이 나타나서 어떤 주님의 일이든지 기꺼이 헌신하는 선한 청지기 노릇을 하고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이기를 …



Ⅰ.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형편의 문제이기 보다는 신앙이 문제이다.(1~2)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오늘 본문의 문제는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대인들의 지역에 큰 흉년이 든 것으로 인하여 유럽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신령한 복음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받았으므로 물질로 돕자고 하는 바울의 제안에 기쁘게 동참한 것을 고린도 교회에 소개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 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15:25~27)

우리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바로 깨닫는다면 그러한 깨달음의 방향에 따라 물질도 사용하게 되어 있다. 또 신령하고 귀한 것을 받았다면 당연히 거기에 따른 감사로 세상에서 통용되는 물질을 나누는 것은 순리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의 자랑은 받아야 할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운 형편이었을 뿐만 아니라 연보를 거두려고 하는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의 형편이 넉넉지 못했던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그러한 조건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드리는데 장애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2) 믿음으로 인해서 많은 환난을 겪고 있었고 그런 가운데서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딤전2:6)고 증거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제물로 주신 것은 죄진 인간으로서는 넘치는 감격이요 기쁨일 수 밖에 없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그러한 주님께는 아까울 것이 없고 고마울 수밖에 없다.

누가복음7:36~38에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 받은 예수께 그 동내에서 가장 손가락질 받는 여자 하나가 향유를 담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으며 우는 여인을 청한 바리새인이 핀잔을 주지만 주님께서는 500데나리온 빚진 자와 50데나리온 빚진 자의 탕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청한 바리새인과 이 여자를 비유하시면서 긴 가르침을 주시고 “…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48)고 돌려 보낸다.

우리 모두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죄인인데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런 저주에서 자유하여 영원한 영광에 들어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말기 암을 낳게 해준 의사에게보다 더 감사하게 될 것이고 ‘생명의 은인’이라고 아까울 것이 없을 것이다.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이 저희에게 넘치는 기쁨을 주고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했다는 것은 세상의 원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모습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1) 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은혜 받은 증거이지 풍성하다고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처럼 주님께 대한 감사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



Ⅱ.자원하는 것이라면 힘에 지나는 것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3~4)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은혜” 라고 까지 표현되는 주님의 백성들을 위해 드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교회에게 주신 기쁨이요 선물이었고 그것은 바울의 강요가 아니라 저들의 간청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1.물질 즉 연보는 억지로 내게 해서는 안된다.(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바울이 전혀 예상치 못했을 정도로 힘에 겹도록 저들이 연보를 했는데 오히려 바울 사도는 이것을 만류했던 것 같은 인상을 받는 것은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4) 한 사실로 미루어 봐서 그렇게 이해할 수가 있다. 하나님은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12)

바울 사도는 저들의 형편(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극한 가난)을 보면서 자제할 것을 당부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로 하여금 이 복된 일에 참예하게 해 달라고 간청한 것으로 보인다.

[며칠 전에 뉴스에서 정부로부터 최저생계비를 받으면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신의 질병도 치료하지 못하면서 푼푼이 모아서 천 몇 백만원을 기부한 80세가 넘은 한 할머니께서 다시 돈을 모아 3백만원을 더 기탁하자 오히려 기부를 받는 데서 할머니에게 더 필요한 돈이니 그냥 쓰라고 하자, 이 할머니가 남긴 명언이 “주면서 오는 것은 엄청나다.” 라는 신앙이 있는 분인지 없는 분인지 모를 이 노인의 고백이 이미 성경에 가르친 사실이었다.] “…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b) 결국 이 원리는 信, 不信間에 진리일 수 밖에 없다.

만약에 이 할머니에게 그 돈을 내 놓으라고 엄포를 놓았다면 내 놓았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베풂의 맛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기꺼이 내어 놓는 것이고, 특히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감격을 경험한 사람들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게 되는 것이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인용-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출25:2)]

2.이것은 성도를 섬기는 일이요 더불어 주님을 섬기는 일이다.(4f)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 우리는 대개의 경우 예배에 드리는 연보를 “제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예배에서의 제물은 이미 한번으로 드려진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히7:27, 9:12, 10:10)으로 이것을 매 주 주의 만찬 즉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기념하도록 신약교회는 명령 받고 있다.(마26:26~28; 막14:22~24; 눅22:19~20; 요6:48~51, 53~57; 행20:7; 고전11:23~26)

그런 이유에서 연보는 주님의 날 드리도록 되어 있지만(고전16:1~2) 본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성도 섬기는 일”로 표현된 곳은 연보와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고 있다.(4, 롬15:25; 고후9:1, 12, 13) 즉 하나님께 드려져서 그 물질로 주님의 백성들을 섬기고 바울의 선교여행에서도 쓰여짐을 볼 수 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자신에게 보낸 빌릴보 교회의 물질을 “…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8b)고 유일하게 제물이라고 쓰고 있다.

이 밖에도 하나님께 연보를 드림에 대한 경계와 권함을 참고하면 고린도후서 9장에서 보면 “…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5b)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6)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7)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11~12)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13)

물질에 대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심령으로 드리는 것을 기뻐하시고 억지로 마지 못해 내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바울 사도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고후5:14) 라는 고백으로 드려서 주님께는 영광이 되고, 자신에게는 남모르는 드리는 감격이 충만한 연보의 생활이 되시기를 …



Ⅲ.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드린 사람들 만이 기쁘게 드릴 수 있다.(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자랑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에게 요구했던 연보 보다도 유럽의 형제들이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린 것이었고 이것은 적어도 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자신이 주님의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라고 믿고 사용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사실 자신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뜻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실현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린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게 되어 있다. 아직도 나 자신의 의지와 뜻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아직도 온전히 주님께 드려진 사람이 아니요, ‘그리스도인’ 이라거나 혹은 ‘성도’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 주님의 종들을 향하여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롬14:7~9f) 라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믿음으로 인하여 사는 사람들을 인하여 감격을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살전3:9)

우리의 삶이 주님께 드려졌다고 할 때 주님께 드리는 것은 물질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가진 소망도, 이상도, 지식도, 물질도, 생명까지도 주님의 것이 되고 이런 입장이라면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요구하실 때 어떤 것이든지 기꺼이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바울은 혈혈단신으로 에베소 교회에서 헌신하고 있는 디모데를 향하여 당부하기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7~10) 라고 경계를 주고 있다.

우리의 주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실 때 직접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19~21)고 경계하셨다.

이것은 사실 구약의 욥의 삶의 철학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욥1:21) 자신의 소유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소유하고 계신 하나님께서 맡겨 두신 것이라는 고백 속에서 비로소 잃어도 상처를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맡겨두신 분이 요구한다면 언제든지 드릴 수 있어야 비로소 올바른 청지기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우리의 몸도 마음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지불하시고 산 것임을 기억할 때 우리의 소유가 당연히 주님의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오늘 인색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자세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내가 관리하고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많은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우리 모두 주님께 드려진 생명임을 의식하시는지…? 그렇다면 형편에 관계없이 주님의 요구에 풍성히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도 역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11:6)는 원리가 적용된다.

먼저 나의 영원한 저주의 운명을 구원키 위해서 자신을 친히 제물로 주신 그리스도를 기억한다면 드리는 일에도 참여하게 해달라고 강건하게 될 것이다.

아니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졌다면 드리는 것은 드리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는 고백과 함께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물질의 헌신도 기쁘게 드릴 수 있어서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주시는 기쁨을 충만이 누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