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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빌 4:4~9 2006-12-10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쁨과 감사는 기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환경에 관계없이 내면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인데 거듭난 사람들 속에 함께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상황으로 인식하고 믿음에 견고히 설 것을 당부하는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는 바울 사도의 당부를 듣게 되는 데 비록 세상의 마지막이 온다고 해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쁨과 감사를 잃지 않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평강이 지배하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는 육신의 생명을 잃는 한이 있어도 바울처럼 기쁨으로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모습이 이 편지를 받고 있는 빌립보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 이 글을 함께 읽는 우리 모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이 바울의 당부가 먼 이야기여서는 안될 것이고 같은 믿음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동일하게 같은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나눌 수가 있을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는 과연 이러한 기쁨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자신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 약속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약속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하늘을 사모하는 백성이라면 동일하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충분한 기쁨과 감사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Ⅰ.기쁨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이다.(4~5)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오늘날 우리의 환경적인 이유들이 기쁨을 뺏어가는 일들이 참 많다. 불확실한 미래, 불안한 정치 상황, 밤낮없이 계속되는 데모, 하락하는 경제상황, 치솟는 Apt. 가격, 조금이라도 소망적인 앞날을 예상할 수 없다. 직장에서는 언제 잘릴지 모르고, 사업은 전망이 불확실한 이 해를 보내면서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가 묻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변은 당연히 [예]이다. 주님께서 “사업이 잘되거든 기뻐하라!” 거나 “돈이 잘 벌려지면, 건강하다면 기뻐해라!”고 주문하고 있지 않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비록 짧은 문장이지만 이 말 속에 바울 자신이 기뻐하는 이유를 담고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이유들을 포함하고 있다.

기쁨의 장소는 “주 안에서”이다. 이 위치는 비록 우리의 외향적인 환경이 바뀐다고 해도 변함이 없다. 비록 자신이 로마의 감옥 속에 억울하게 갇혀있어도 바울에게는 그 감옥이 바울 사도의 믿음조차 가두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어떤 환경적인 요소가 옥죄어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우리는 변함없이 “주님 안에” 있는 것이다. 믿습니까?

기뻐할 시기는 “항상 기뻐하라!”이다. 이 고백은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가 가장 잘 묘사하고 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이러한 고백을 드리고 있는 시점이 포악하고 잔인한 갈대아 군대가 쳐들어 온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예언 후에 드리는 고백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하나님께서 평화를 허락하신 상황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사로 잡힐 것이라는 비극적인 미래를 내다보면서도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항상 기뻐하라!” 했는데 “항상”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이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노년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항상”에서 제외된 시간은 없다. 사실 항상 기뻐서 싱글벙글하는 사람은 사람들은 정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좀 직설적인 말로 표현해서 ‘미친 사람은 항상 즐겁다.’는 표현이 있다. 무엇엔가 마을을 빼앗기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항상 즐거워서 히죽거린다는 표현이다.

바울 사도는 “기뻐하라!”는 당부와 함께 그럴 수 있는 자신의 이유를 앞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 바울은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가두는 가운데도 결코 만족이나 기쁨이 없었지만 비로소 자신을 웃게 한 예수 그리스도가 다른 이들에게 증거 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의 이유였다는 고백이다.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2:17~18)고 본문 4b과 같은 당부를 주고 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 여기 [관용]이라는 말에는 ‘온화한, 너그러운, 절제하는, 인내하는’ 등등의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세상이 한꺼번에 무너져 버려도 주님은 오실 것이다.” 라는 확신이 우리로 하여금 여유를 갖게 하고 너그럽게 할 수 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만 참고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온유함을 나타내라는 당부이다.

아무래도 [여유] 라는 것 자체가 다급하고 불편하면 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당부는 꼭 신앙의 사람뿐만 아니라 주변의 信, 不信間에 볼 수 있게 하라는 명령이다. 사회가 혼란할수록 그리스도인들이 여유를 가질 때 주님의 영광은 들어나게 되어 있다. 혼란의 시기에 신앙의 사람들조차 우왕좌왕 한다면 복음의 가치는 손상을 입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인정하던 하지 않던 세상 사람들은 사회가 불안하고 혼란할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을 눈 여겨 보게 된다. “저 사람들은 어떤가!” 그러나 별반 차이가 없다면 결국 우리가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치 없게 여기고 말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세는 침착하고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한가지는 이런 행동들이 연출되어 나타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의 행동은 언제나 내면에 가진 것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조금만 더 인내하면 주께서 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여유를 가지고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조건과 상황에 관계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며 여유로운 모습이 사람들에게 자유스러운 삶이 되어서 주님께는 영광이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끼치는…



Ⅱ.기뻐 할 수 있는 삶의 비결들.(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앞에서 “항상” 이라는 말이 “기쁨”을 꾸미는 말이었다면 “염려하지 말고” 라는 말을 “아무것도” 라는 대상을 구성하고 있다. “염려” 라는 말은 확실히 신앙인들과 관련된 말은 아니다. 사실 “염려”는 죄로 인해서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끝임 없이 사람을 시들게 만드는 사탄이 준 단어이다. 어려워도 염려되고 좋아도 그것이 어떻게 될까봐 염려하는 악순환[과연 얼마나 길게 갈까?]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

잘 되도 염려요, 안 되도 염려이고 염려라는 고삐를 인간인 이상은 놓지를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을 때 비로소 염려와 작별하게 된다. 그러나 늘 염려에 잡혀 살던 사람들은 평소의 습관대로 그리스도 안에서조차 이 염려를 찾아서 챙기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살기 쉽기 때문에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염려는 에덴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후의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수치가 드러날까봐 염려하여 숨었고, 이 저주스러운 죄의 수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심으로 누구든지 십자가의 은혜를 힘입는 자마다 세상에 염려를 던져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께로 들어왔고, 이제는 염려대신 해야 하는 것은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일만 남아 있다.

여태껏 스스로 고민하고 걱정하던 것을 온전히 주님께 기도로 맡겨버리는 엄청난 복을 누리게 된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우리 사람에게서 기쁨을 빼앗는 가장 일반적인 방해물이 바로 염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염려를 기도로 감사하게 하나님께 맡겨 버림으로 기쁨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믿습니까?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 우리가 기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염려를 온전히 주님께 맡길 때 주님께서 처리하신다. 이 논리를 반대로 이해하면 주님께 맡겨 드리지 않는 염려는 그대로 있을 것임으로 아직 그 사람의 차지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말씀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온전히 기도와 감사로 맡겨드렸을 때 우리의 고민하던 문제는 모든 지혜에 으뜸이신 하나님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 때부터 비로소 우리보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게 되는데 그 보호의 영역도 역시 앞에서 “주 안에서”였던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이다.

염려와 고민을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로 맡길 수 있기 때문에 기도는 그만큼 신앙에 있어서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기쁨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도 우리의 죄의 짐을 지셨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 각자의 삶의 현장 그대로는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는 염려 투성이요, 그렇기 때문에 불만 투성이기 때문에 기쁨과 감사로 살아야 할 인생이 염려의 먹구름으로 덮여서 인생을 다 소비해 버리고서야 후회해 보지만 때는 늦고 만다.

주님께서는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들을 주셨다.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 모든 인류의 염려와 고민을 모두 감당하셨다. 그렇게 기쁨을 찾아 주셨는데도 고민과 염려에 붙잡혀 있는 안타까운 사람들을 보면서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고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찾아 주신 기쁨을 허락하신 대로 누리는 …



Ⅲ.주님의 명령들이 삶에 구체화 될 때 이 약속도 사실화 된다.(8~9)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많은 신앙한다는 사람들의 문제, 믿음생활을 한다고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의 과제들을 대단히 관념적으로 다루고 실제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와 세상의 삶이 이중적인 경우가 많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 생활은 더러 잘 한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세상 속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 교회 생활만 잘하면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것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빛은 어두움을 위해서 필요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가치는 죄로 어둔 세상을 밝히는 빛의 사명을 감당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기쁨과 감사를 성경에서 많이 가르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유도 이러한 부분의 말씀도 삶에 응용하지 못하고 대단히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처리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오늘 본문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런 다분히 관념적일 수 있는 부분을 현실로 가져오게 하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실적인 믿음에 관한 당부의 말씀으로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이다. 마지막을 앞두고 그리스도인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성별 된 삶을 살아야 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할 만하며, 칭찬할 만해야 하는데 이런 과제들이 적용되어야 하는 영역을 [무엇에든지, 헬, 호소스(hosos), 만큼, 모두, 더 많이, 일들, 어디든지] 라고 가르치고 있다.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불신자들 가운데서도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할 만하며, 칭찬할 만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당연한 것이라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이다. 이런 이유에서 교회의 중책을 맡은 사람들의 자격기준에서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딤전3:7f) 라는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다.

기쁨이나 감사가 모든 만나지는 상황마다 에서 사실적 이려고 한다면 마땅히 이래야만 한다는 논리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 조차 이해가 되지 않을까봐서 바울은 덧붙이기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9)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빌립보 교우들이 바울로부터 배운 것, 들은 것, 본 것 모두를 기억하고 있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행하라!”고 주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이 배우든 듣든 신앙의 모범으로 본 것들은 반드시 삶의 현장 속에서 행해야 할 과제들이다.

우리가 값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믿고 순종하여 많은 물에서 세례를 받고 약속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 됨으로 어두운 세력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부활의 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33~34)고 경고하면서 신앙의 삶을 지속하기 위하여 영적으로 늘 깨어 있어야 함을 당부하고 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9)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은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지 감격의 삶이 되게 하고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한다. 즉 기쁨과 감사의 삶이 된다. 그러나 이 약속을 우리 각자의 것으로 삶기 위해서는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는 명령에 순종하는 삶이다. 믿으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