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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4:8~11 2006-12-24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한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참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주님의 은혜를 인하여 매일매일 주님과 함께 걷는 능력의 삶을 사는 거듭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냥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종교적으로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오순절날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는 사람들은 어떤 권세조차도 어찌해 볼 수 없을 정도로 능력을 충만이 가지고 죄와 어두움의 세력과 담대하게 싸웠다.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핍박과 삶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으로 그런 것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AD 313년 이후 그리스도교에 대한 핍박이 중단되고 인간적이고 미신적인 요소가 신앙에 들어오게 되면서 人間理性과 感情的인 요소들이 더 많은 신앙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초대교회가 가졌던 성령의 능력은 점점 감소하게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 중단 이전에도, 더 정확하게 바울 사도께서 이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일세기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거슬리고 과거의 종교적 삶과 타협하는 잘못된 종교의 요소들은 곳곳에 건전한 신앙에 파고 들었던 것 같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 사도는 이러한 안타까운 경계를 주게 되는 것을 본다.

바울 사도께서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 골로새 교회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의 안타까움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로, 어떤 사람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런 것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골2:16~17-표준새)]

구약의 율법 아래에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관한 그림자 같은 교훈들에 있었던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으로 완성된 광명한 복음 속에 산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유치한 것이므로 그런 유치한 종교행위로 인하여 비판을 받는 어리석음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경계이다.

오늘 본문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 속에 산다고 하면서 아직도 유대 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유대적 절기와 예식의 습관에 따라서 종교생활을 하는 온전히 자유하지 못한 갈라디아 교회의 교우들에게 안타까움으로 탄식하는 모습이다.

대개의 경우 매일매일의 삶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날에 치중하는 것이 사실이고 사람들은 “우리가 항상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날에라도 그렇게 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으로 사는 Christianity 즉,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런 정도에 머무를 수 없는 삶의 변화이다.

바울의 안타까운 탄식이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 모두의 삶을 점검하고 보다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삶에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점검하는 계기다 되었으면 한다.



Ⅰ.복음에 산다고 하면서 과거의 종교적 삶의 반복이어서는 안된다.(8~9)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사람들의 문제는 매였던 것에서 빠져 나와 자유를 얻은 후에도 과거와 다름이 없이 여전히 종 노릇 하는 것이다. 애급의 종살이에서 빠져 나온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는 자신의 정욕에 사로 잡혀 자유하지 못했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다시 가나안의 우상숭배에 잡혀 버려서 결국 하나님께서 귀하게 찾아 주신 자유를 잃어 버리고 또 다시 앗수르와 바벨론의 종으로 잡혀가고 만다.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하는 인간은 어디엔가 종 노릇할 수 밖에 없고 신앙의 역사 속에서도 이러한 일은 수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인데, 그러나 많지는 않았지만 그 붙잡힌 것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고 그러한 사람들이 바로 신앙의 용사들이며 이런 사람들은 어떤 것으로도 얽맬 수 없는 사람들로 히브리서 11장에 대표적으로 몇 사람이 거론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오늘 본문의 갈라디아 교우들도 같은 전처를 밟고 있기 때문에 바울로부터 지적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유치한 상태에 있을 때에야 힘이 없어서 종 노릇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진리안에서 자라고 장성해서도 여전히 같은 종노릇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슬픈 모습이다. 바울은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5)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대가로 종이 아닌 아들의 명분을 얻어 자유 하게 되었다는 증거와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종의 자리로 돌아가는 안타까움을 탄식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8) 이 8~9절에 반복되는 단어는 ‘종 노릇’이다. 과거의 종 노릇도 지긋지긋 한데 “…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벧후2:19~21)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세상의 유치함에 돌아간 자들에 대해 안타까워 하고 있다.

이러한 안타까움은 예수께서 당시의 유대인들을 향해서 진정한 자유가 어떤 것임을 보임으로써 주셨던 말씀으로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진리만이 참 자유를 주고 담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유를 약속해도 진리에 바탕하지 않는 것은 거짓 맹세일 뿐이고 이런 입장에서 다른 모든 종교는 사실상 종 노릇 하는 것이다.

우리를 모든 얽매임에 서 끌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복음에 산다고 하는 것은 종 노릇 하던 데서 자유 하는 것이다. 바울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고 증거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다른 종교를 모방하고 타협하는 것은 자유치 못한 삶의 모습이다.

분명히 자유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과거의 유치한 굴레에 스스로 매이는 것은 갈라디아 교회뿐만 아니라 구원의 역사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악순환이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 속에 들어와 산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종교의 모습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과거의 삶의 방법이든지 율법이든지 다시 돌아가는 모습은 진정으로 거듭난 삶이 되지 못한다.

거듭난 삶은 과거의 삶의 어떤 나쁜 부분만 고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삶은 완전히 죽고 하늘로부터 거듭남을 의미한다. 하늘의 방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고 어떤 세상의 종교나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삶이 비로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는 선언에 합당한 삶이다.

신앙하면서도 어디에도 얽매임이 없이 다만 그리스도께만 종노릇 하는 생명의 종으로 사시기를…



Ⅱ.“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8~9)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같은 말씀이지만 두 번째로 이 내용에서 반복되는 것은 “알지 못하여, 알 뿐더러, & 아신 바 되었거늘” 즉, [안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앎에 대한 양면이 다 강조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바른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종노릇 하였다면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즉,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인류가 다 아는 것이 아님에도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가! 이 사실 자체가 인간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큰 福이다. 어떤 사람들은 손에 들려주듯 가르쳐 줘도 알지 못하는 공공연한 비밀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보혈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감추고 싶어서가 아니라 에덴동산의 범죄 한 아담과 하와처럼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꼭꼭 숨기고 싶은 죄의 영향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거듭나지 아으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십자가의 보혈을 쏟아 부어도 그 피가 생명의 능력임을 알지 못하니 얼마나 불쌍한가?

하나님은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17:27) 라고 한 것처럼 얼마나 사람들이 주님을 알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신가!

그러한 이 죄악의 비극 속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영원에 있어서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른다. 그러나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1:21) 라는 비극은 오늘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 만연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 그의 사랑을 안다고 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알고, 나의 사죄를 위하여 죽으심을 알고, 나로 하여금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시려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승천하시고,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 두시지 않으시려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의 기도를 드리실 뿐 아니라 고달픈 세상에서도 죄와 타협치 않고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백성들을 완전히 죄와 구별하시기 위하여 심판주로 다시 오실 주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과거 다른 세상의 어리석은 종교에 기대를 걸고 온 갓 것에 종 노릇하던 나에게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란 사실은 분명 우리 각자의 인생에 최고의 가치이다. 믿습니까?

우리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를 안 것보다 귀중한 것이 있는가!

그러나 이것보다 한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가! 먼지만도 못한 인생, 벌레만도 못한 인생, 그대로 두어도 멸망으로 갈 만물의 찌끼만도 못한 죄 덩어리의 인생, 마귀 사단의 수하에서 종노릇 하던 인생, 그 비참하고 가련한 인생이 하나님의 눈에 마음에 아신 바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가!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8:3에서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하였지만 사실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심 없이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서 아실 의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이 지구 상의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먼저 이고 그 사랑에 응답하여 그의 말씀을 순종하고 사랑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아신 바 된 자들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말을 알아 들을 중 아는 모든 사람에게 이것을 자랑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신다!” 이것보다 큰 자랑거리는 없다. 유명한 변호사가 나를 아는 것 보다도 판사가 나를 아는 것 보다도 장관이나 대통령이 나를 안다고 하는 것 보다도, 이 우주와 만물의 창조자 되시고 주관자 되시는 모든 권세를 친히 주시는 그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함부로 살 수 없고 되는대로 인생을 허비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시는 바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늘 이 사실을 의식하며 감격으로 사는 …

그러나 여기에 바울의 안타까움과 탄식이 있다.



Ⅲ.복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10~11)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이것이 무슨 말인가? 바로 유대주의적인 종교 생활이다. 또는 세상의 다른 종교의 관습으로 종교생활 하는 모습이다. Christianity는 종교가 아니라 삶이라고 곧잘 이야기 한다. 과거의 별빛 시대라고 하는 족장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나, 달빛 시대라고 하는 율법 시대의 유대교를 비롯해서 세상의 대부분의 종교는 날과 달과 해에 의해서 종교생활 한다.[2007황금돼지해]

사도행전14:8~13 루스드라에서 바울 일행이 지체 장애자 하나를 주님의 능력으로 치료했더니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한다고 난리 법썩 이었다. 그래서 두 사도는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15)고 겨우 말려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다.

왜 사람들은 특정한 날이나 달, 해를 기다리고 좋아 하는가?[Jubilee] 매일 매 순간을 충실히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떤 특별한 날이 필요하고 행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행사는 더 감동을 받을 수 있는 더 큰 것을 요구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유에서 사실 하나님은 특별한 날과 달과 해를 정해서 치르는 행사를 좋아 하시지 않으신다. 그런대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행사를 해 드린다고 난리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람의 범주에 맞추어 생각하는 유치한 모습이다.

과거 율법 시대에 익숙해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모든 그림자의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다 완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복음도 과거의 율법의 범주에서 이해하려고 했고 이러한 모습들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영향을 받은 갈라디아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한 복음을 자신들의 관습이나 다른 종교와 비슷한 것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생명을 이해해서는 안된다.

구원의 복음을 인류가 받았지만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안타까운 사실은 바른 진리로 회복한다고 종교 개혁을 통해서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해놓고도 시간이 지나면 여전히 과거의 모습으로 그대로 되돌아 간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것은 구약으로 돌아가는, 이 광명한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에도 달빛시대, 별빛시대의 그림자와 같은 어두움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이요, 그리스도의 희생을 헛되게 하는 것이요 목숨을 바쳐 복음을 전한 바울 사도 같은 신앙 선진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행사화 된 절기적인 행사를 기뻐하시는 분 이시라면 이미 하나님이실 수 없다. 더 심각하게 말하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것은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된다. 하나님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사람정도로 취급하지 않는 특정한 날과 달과 절기에 매이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된 하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매일 매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는 임마누엘을 사는 하나님의 아시는바 된 삶을 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