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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12:1~2 2007-09-30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주님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하여 ‘이 죄악이 범람하는 역사 속에서 죄를 진 사람이 어떤 방법으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긴 論理를 전계해 오셨다. 이방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하는 유대인들도 역시 하나님 앞에 다르지 않은 죄인이다.

결국 죄의 대가로 모든 사람은 사망에 바쳐지고 있으며, 아담의 범죄로 시작하여 이 역사 속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사망의 제물이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동일한 죄인의 형상으로 보내시고 모든 인류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저주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담당하게 하시고 그 희생제사에 하나가 되게 하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할 뿐만 아니라 거듭난 자들은 더 이상 율법의 저주아래 있지않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통한 영의 사람이 되게 하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셨다.

이것은 결코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지시에 넘치는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것이며 아담 이후 각각의 사람을 이미 미리 아신 하나님은 그들의 성향대로 택하시고 영원에 이르도록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셔서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실 절대 주권자이시다.

그럼에도 이 복음을 통한 구원은 선택하신 이스라엘보다 이방인들을 먼저 받아들이시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되었을 때 다시 불신하는 이스라엘에게서 불경건을 제하시고 언약의 대상이기 때문에 구원으로 다시 불러 들이신다는 내용이 1장에서 지난 11장까지의 말씀이었다면 오늘부터 마지막 까지(12:~16장)는 그러한 구원의 논리를 가진 믿음의 사람들과 공동체인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여러 가지 모형에서 제시하고 결론을 맺게 된다.

이러한 실천 편이라고 하는 이 12장 서두에서 먼저 말씀하고 있는 부분이 “제사”이고 그 제사에 있어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한번의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지만 오늘 그 완성된 제사를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본 받을 것인가를 가르치는 바로 우리 몸을 드림으로 라는 명령에서 대단히 중요함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실천을 당부하는 시작에서의 이 단 두절에 불과한 오늘 본문 말씀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내용이 믿음으로 사는 우리 모두의 삶의 자세라고 하는 데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라면 이제는 우리 거듭난 생명은 당연히 드려진 생명이 되어야 하고 그 무서운 저주의 십자가로 얻어진 생명이라면, 이제 죄의 절망의 늪에서 피를 지불하고 사 주신 주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거듭 난 하늘에 속한 생명의 사람들로서 오늘 바울 사도의 첫번째 당부인 우리의 삶으로서 드리는 영광의 제사를 우리 일생 다하도록 우리를 죄의 저주에서 사주신 사랑의 주님께 돌려 드리는 …



Ⅰ.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역시 제사이다.(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죄의 기쁨과 천국의 소망을 가진 자들이라면 어떠해야 할 것인가!’ 라는 이제까지의 1~11장의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받은 모든 자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당부로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그러므로”이다.

1.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공적예배에만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몸을 예배에 있어서 제물로 드린다는 이론이 물론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바울이 당부하는 이 말씀을 그렇게만 한정해 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직접 당부하신 대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는 말씀과 함께 이해 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가 새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영적인 생명에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우리의 걸음 걸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야 말로 공식 예배 못지않게 우리의 움직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산 제사가 될 것이다. “네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사람들로 알게 하라!”시는 당부를 잊지 말아야 한다.

2.이 당부는 단순한 바울의 권면이 아니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1f) 바울은 분열된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당부하면서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고전1:10) 한 것처럼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모든 불쌍히 여기심을 빌어 바울 사도는 권면을 하고 있다.

바울은 언제나 명령할 권한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권면 하는 겸손으로 형제들에게 호소함을 본다. 말년에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에베소 교우들을 향하여 애절한 호소를 하는 모습도 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엡4:1)

이방인의 사도로서 당연히 명령할 수도 있지마는 늘 겸손으로 호소하는 바울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피흘림으로 지배되고 십자가의 희생이 바탕이 된 하나님의 백성이요, 교회라면 당연히 이래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를 표현하고 있다. 권면이라고 할 때는 물론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절하는 선택은 이 권면을 듣는 당사자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바울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비를 힘입고 권면하는 당부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그러므로 선택에 대한 책임은 그 권면을 듣는 당사자에게 있다.

오늘도 그리스도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이 귀한 당부가 우리 각자의 심령을 감동하고 움직여서 순종함으로 아름다운 열매로 결실 할 수 있기를 …

3.몸을 드려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1m) 바울 사도는 이미 앞에서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고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릴 것을 당부한 바 있다.

사실 이 부분은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되도록 이면 몸이 아닌 가진 것으로 대신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효도도 돈으로 다하고 의무적인 조항들을 대부분 돈으로 해결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래서 몸을 드린다고 하는 것을 가장 어려워 하는 것이 사실이다. 부모님들을 좋은 실버 타운에 모셔두고 필요로 할 때 비용과 용돈을 채워 주는 것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습성들은 하나님께 대해서도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바쁘니까 적당히 연보나 많이 내면 하나님께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팽배해 있다.

그러나 중요한 나눔은 반드시 몸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돈을 요구하지 않고 우리의 몸을 요구하신다. 주님은 그러실 만한 권리가 있으신 이유는 그분은 우리에게 친히 몸을 대속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고 당부하고 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눅22:33)라고 큰소리쳤던 베드로였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이유는 이런 이유에서 였었고, 사실 그렇지 못했더 베드로는 계면적인 답변을 드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6:21) 하셨지만 사실 진정으로 마음이 있는 곳에만 몸이 가게 되어 있다. 사람이 마음 만으로 안되는 것이 더러 있는데 그러한 것들은 다 중요한 것들이다. 남녀가 사랑하는 것은 마음만 가지고는 안된다. 그런 이유에서 사랑하는 남녀는 항상 보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만나고 몸이 함께 있다.

하나님과의 사랑도 마찬가지도 입으로 골백번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육체가 움직여 지지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요구하시는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12:26)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당부하신다. “나는 다른 것 보다도 너희들의 몸으로 드리는 순종을 바란다.” 이 주님의 요청에 머뭇거림이 없기를 …

4.이것이 영적 예배다.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1b) 여기서 “너희 몸을 … 드리라” 하시고서 하시는 말씀이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 라는 것이 조금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영적, 헬, 로기코스(logikos), 합리적인, 논리적인]이라는 말의 본래적인 의미를 이해 할 때 이것 역시 앞에서 드렸던 말씀과 관련이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더 쉽게 이해를 한다면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합리적인 논리가 된다는(말이 되는) 말씀이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공동)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표준새) 몸을 주님께 드리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에 맞지않는다는 이론이다.

이런 입장에서 성경에서 주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늘 그 주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을 몸소 섬긴 사람들의 사랑이 증명이 되는 샘이고, 오늘도 어떤 것 보다도 연보나 물질이 아닌 몸으로 드리는 것은 예배이든, 청소이든지, 전도이든지, 모임이든지 가장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늘의 백성으로서 합리적인 섬김이다.



Ⅱ.하나님께 드릴 영적 제사의 조건을 말씀하신다.(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합당한 신앙의 사람으로서의 면모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우리의 살아 숨쉬는 모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을 말씀하시는 부분이 둘째 부분이다.

1.이 세대를 본 받지 말아야 가능하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여기서 말씀하는 본받지 말 아야 할 “이 세대”란 [세대, 헬,아이온(aion), 시대, 세상, 과정, 영원한] 흐르는 시간 속에 끝임 없이 변화를 거듭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천국의 비유를 드시면서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공동) 결실치 못하는 자요”(마13:22) 라고 하셨을 때 바로 있다가 없어지는 유행이나 재물이나 바뀌는 지식들로 하늘의 영원한 가치와 반대되는 것들을 의미한다.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상태로 묘사를 하면서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벧전1:14) 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담의 범죄 이후부터 이 세대는 끝임 없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항하는 그런 시간들로 흘러가고 있다.

때문에 이 세대에 마구 떠밀려가는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1:4) 라고 고백한다.

마찬가지로 요한 사도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라고 직접 표현하고 있다.

이 세상의 아무리 좋은 방법을 가진다고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한다. 하나님≒세상

이 세대를 따르는 방법으로는 절대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릴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2.변화를 받아야 가능하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이래서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은 옛 사람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하는 것이고 역시 우리를 구원하신 방법도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방법에 있어서 “오직 마음을 새롭게[헬, 아나카이노시스(anakainosis), 재생, 회복; 고후4:16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함으로” 모든 우리의 행동은 마음에서부터 나오는데 이 마음이 옛 죄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변화를 받을 수 없다. 특히 스스로의 노력으로 ‘변화하라!’가 아니라 “변화를 받아” 즉 이 변화는 인간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만 가능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의 모든 명령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데 그 중심을 주님께로부터 변화 받지 못하면 불가능함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옛모습이 변화 받지 않으면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릴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치 못하다.

3.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가능하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되는 데 ①선하시고, ②기뻐하시고, ③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야 만이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에베소 교우들을 향하여 당부하기를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5:7~11)고 지적한다.

언제나 우리 인간의 뜻은 의롭게 보이는 경우에도 선치 못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온전할 수 없다. 좋은 뜻으로 시작했던 일들도 시간이 가면서 죄와 타협으로 기울어지고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들을 더러 볼 수 있다.

이래서 이런 입장에서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8~39)

우리의 목표를 선하게 세워보지만 그것은 이내 퇴색되고 말고 우리 자신이 어느새 중심이 되어 있는 경우를 경험하곤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우들을 향하여 기도하기를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1:9) 하였다.

우리 각자가 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진다면 그러한 삶은 매 순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리는 삶이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오늘 본문에서 빠뜨릴 수 없는 귀중한 말씀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즉, “하나님의 … 기뻐하시는[헬, 유아레스토스(euarestos), 완전히 일치하는, 용납할만한]”이다.[하나님과 완전히 일치하는, 하나님의 용납할만한]

오늘 우리의 신앙의 문제는 늘 우리가 기쁘고자 하는 일들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라는 경건의 우려 보다면 우리 인간이 좋으면 굿치고 장구치고 끝내고 만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절대로 하나님께 인정 받을 수 없다.

모든 예배나 성찬이나 찬양이나 기도나 연보나 말씀이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해야 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 이라면 매 순간 삶의 선택이 우리 각자의 원하는 선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택을 하는 것이 필요하고 당연한 것이다.



Ⅲ.오늘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참으로 모리아 산으로 장작을 짊어지고 올라가는 이삭처럼 ‘이젠 하나님께 붙잡혀 죽은 목숨이다.’ 생각하고 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이 시간도 드리러 왔는가! 아니면 단순히 지옥 가는 것 무서워서 교인이 되고 예배에 참여하는가! 그렇다면 바울의 권면을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는 당부를 들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인하여 거듭난 목숨이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드려야 할 영적인 예배로 공적인 예배에서 무엇보다도 자신의 몸을 드리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그리스도인다운 영광을 주님께 돌려드리려고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심심 당부를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어쩌면 이 세상이 하나님보다 더 가깝다. 그런 삶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더 익숙한 사람이라고 할 때 참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감당할 수 없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 없다.

매 순간 하늘로부터 새롭게 변화 받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각오하고 주님의 성령께 의지하고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면 숨막힐 것 같은가? 그러나 그러한 삶이 될 때 비로소 온전히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그 주님의 영광에 나 자신이 참여하게 되어 하늘의 위로의 생수가 넘치게 될 것이다. 나 자신의 뜻과 의지에 의해서 행하는 믿음의 삶은 아무리 해도 주님의 위로가 없기 때문에 늘 한계에 부딪히게 될 수 밖에 없다.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시도보다 주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이 되면 세상으로부터 받을 수 없는 느낄 수 없는 은혜의 생수가 넘치게 될 줄 믿는다.

이왕에 하는 믿음생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자신을 드리는 영적 예배의 삶이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