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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15:1~7 2007-11-25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들간에 비판하거나 걸려 넘어지게 해서는 안된다는 경계들을 생각했었다. 모든 것들을 영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육신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처리하려 한다면 대상의 행동에 따라 나도 그를 대해야 하겠지만, 우리 모두가 온전치 못한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오히려 우리 모두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감당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심 같이 우리 모두가 또한 서로 용납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 같은 긍휼을 입은 자들로서 마땅하다는 권면이다.

그렇게 되지 못하는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바로 앞에서 살펴본 대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믿음으로 행치 않기 때문에 죄를 짓고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정죄하고 판단하는 옳지 못한 행동들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다음 주까지 신앙에 먼저 된 자로서 어떤 자세를 가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를 가르치고 있는 말씀이다.

늘 이야기 해 오는 것처럼 믿음이 허약한 자들은 절대로 강한 자들을 받아드릴 수 없기 때문에 신앙에 성숙한 사람, 즉 믿음이 강하다는 사람이 약한 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성장하지 못한 유치한 모습은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끄러운 모습만을 보일 뿐이다.

진정으로 강한 자라면 마땅히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해 주는 데까지 성숙한 모습을 보일 것이고 성경은 바로 이런 점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교훈 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 주님께서 죄 덩어리인 우리를 받으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심 같이 우리도 서도 약점을 받아주고 감추어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Ⅰ.자신보다 남을 기쁘게 할 때 그리스도의 법이 성취된다.(1~3)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책임은 언제나 약한 자에게 돌아 가는 것이 아니라 강한 자에게 돌아간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18:6)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1f) 했는데 여기의 [마땅히, 헬, 오페일로(opheilo), 빚지다, 매여있다, 당연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자신이 강한 자라고 생각한다면 ‘믿음이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할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강한 자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다른 면에서 설명하는 것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이웃을 기쁘게 할 것이라”(1b~2f)는 말씀이다. 어린 아이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만족이나 기쁨을 찾기 보다는 자신의 기쁨을 찾는 것이 먼저 인 것은 당연하다. 만약에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벌써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사람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당부하기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마찬가지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언제나 상대의 기쁨을 구하려고 할 때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만족과 기쁨을 찾는 것이야말로 이기적이고 그런 자세에서는 절대로 덕을 세우거나 선을 이룰 수 없다. 다른 이들의 만족과 유익을 위하려고 애쓸 때 비로소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울’ 수 있다는 말씀이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살전5:14~15)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3) 했는데 이것이 모범이다. 만약에 주님께서 자신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다면 절대로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을 것이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언제나 “…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요5:30b~31f)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 이유에서 시편69:9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께 미칠 비방까지도 자신이 기쁘게 감당하셨다는 고백을 드리고 계시는 것이다. 진정으로 믿음이 강한 자란 남에게 가는 비방까지도 스스로 감당하려고 그의 욕먹어야 할 약점까지도 스스로 짊어지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형제애이고 신령한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의 하늘의 가족 사랑이다.



(1)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됩니다. (2)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3)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시69:9)한 것과 같습니다.



Ⅱ.성경의 교훈은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다.(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그 당시의 사람들을 위해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 나를 위해 기록된 말씀이다. 그러므로 모든 말씀을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그 말씀이 우리 심령에 역사하여 빛을 공급하시고 생명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전에 기록한 바, 헬, 프로그라포(prographo)” 라는 말씀은 ‘미리 기록한’ 또는 ‘먼저 기록한’ 이라는 등등의 의미를 가지는 낱말이다. 그러므로 이천년 전에 기록한 말씀도 6천년 전에 기록한 말씀도 다 나를 위하여 기록된 말씀이다. 아담에게 하신 말씀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도 다 나를 위해 기록된 말씀이시다.

그래서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그 말씀이 역사 하시기 때문에 몸은 죄악 된 세상에 살지만 심령은 벌써 하늘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씀을 하시면서 과거의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그 결과들을 계속 이야기 하다가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11)고 확인 시킨다.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고 말씀의 은혜로운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꼭 같이 말씀 앞에 있지만 그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2:13)

말씀을 그때 그들의 말씀으로만 듣는 사람들과, 그 때 그들에게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은 동일하게 오늘 나에게 주시기 위해서 기록된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꼭 같은 말씀이 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는가 하면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4:2)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4f) 어떤 특정한 말씀만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하는 기록으로 봐서 ‘모든 성경’ 전체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느 말씀만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말씀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헬, 호소스(hosos), everything that, 모두, 어디든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먼저 기록해 주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4b) 성경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압력을 견디게 한다. 요즘 표현으로 스트레스를 견디게 하고, 또한 성경은 우리를 위로하여 소망을 가지게 한다. [안위, 헬, 파라클레시스(paraklesis)-보혜사와 같은 어근, comfort, encouragement; 애원, 충고, 위로, 간청]

531:1“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구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내 친구 나를 위로 못할 때 날 돕는 주여 함께 하소서”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으로 나를 위로하신다. 이 칠흑 같이 어두운 역사의 밤 가운데서 절망하는 나에게 소망을 끼치신다. 하나님의 말씀들은 그의 백성들을 향한 위로로 가득 차 있다.

창세기 13장에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조카 롯에게 제안 했더니 물이 넉넉한 요단 들을 택해버리고, 자신은 척박하게 보이는 서쪽 땅에 덩그러니 서있는 아브람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4b~15)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는 아브람보다 바로 오늘 믿음 때문에 세상의 좋은 것을 다 빼앗기고 서글퍼 하는 나를 위로하시는 음성임을 확신하고 들을 필요가 있다.

믿음으로 세상의 위로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고 격려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주님께서 위로와 소망을 주신다.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사51:12) 이 위로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왜 사람에게 위로를 구하여 하는가! 말씀 속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구하십시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표준 새] 라는 음성을 여러분 각자의 음성으로 들으시기를 …



Ⅲ.형제를 받아드림에도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야 한다.(5~7)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우리 나약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끝없이 인내하시면서 위로를 주신다. 이제나저제나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고, 한없이 격려를 주시면서 기대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게 하여서 같은 뜻과 생각을 가지게 되기를 원하신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종을 본받지 못하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뜻을 받들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지 않으면 믿음의 사람들끼리도 뜻을 같이 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는, 하나님께서 증언해 주십니다.”(빌1:8-표준 새) 라고 빌립보 교우들과 우리를 향해서 고백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스도를 본 받지 않고서는 절대로 뜻을 같이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일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셨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1~23)

이렇게 뜻이 같아졌을 때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6)는 주님의 선하신 의도가 비로소 이루어질 때 하나님 아버지께 합당한 영광이 돌려질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대통령 후보들의 공약처럼 너무 막연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되 뇌이곤 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 같은 진리 안에서 한 마음과 한 입 즉, 같은 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은 구호에 그칠 뿐 막연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두려운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들어야만 할 것이다.

영광은 다음절에도 연이어 지고 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 그리스도께서는 죄 투성이인 우리를 받으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미 앞장에서도 바울 사도께서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롬14:1)는 당부를 주신 바 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을 진실되게 들려다 본다면 서로 받지 못할 대상이 없을 것이다. 죄 투성이인 나를 하나님께서 받아 주셨다면 우리가 못 받아 줄 사람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생각보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여 자신을 높은 경지에 두고 다른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할 사람으로 착각해서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가 없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스라엘 땅에 계실 때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그와 같았기 때문에 실 랄 한 책망을 받았던 이유와 다르지 않다.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다. 법은 이렇게 강한 자로부터 약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세상은 오히려 강자들이 그 법을 악용해서 여전히 약한 자들을 빼앗고 수탈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범죄 하여 동물화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밀림의 동물에게는 법의 논리보다는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콘크리트 정글에서 구별해 내어 자신의 피로 씻기시고 하늘의 사랑의 법에 눈을 뜬 하나님의 백성들 곧 교회는 달라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법대로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한 자들의 약점을 받아주고 돌보아 주어야 하는 곳이 교회이다. 그것이 바로 모두를 유익하게 하고 덕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에게 올 비방까지도 모두 십자가에서 감당하신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성경은 바로 이를 위하여 기록된 것인데 구약의 모세나 여호수아 사무엘, 이사야 뿐만 아니라 전혀 나를 위하여 나를 교훈 하시려고 기록하여 위로와 소망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인내로 지속적으로 우리 각자를 향하여 말씀하시고 계신다.

인내와 위로를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같은 생각과 뜻을 품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게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허물 많은 우리들을 받으셔서 죄를 씻으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기 때문에 이 놀라운 은혜를 누리는 우리들이라면 당연히 서로를 약점과 허물에 관계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

막연히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연약한 형제를 받아 약점을 함께 감당하고 같은 뜻을 품어 한 목소리를 내므로 이 땅의 교회에서부터 주님의 영광을 맛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