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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15:22~33 2007-12-16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  
바울 사도는 지난 시간에 이방인의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는 각오와 자세의 과거적인 모습을 돌아보며 그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과 자신의 직무가 유대인들을 대상한 사도들과는 다른, 이방인을 대상한 사역에 대한 확신과 함께 복음을 전함에도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명예에 손상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였다는 고백을 하였다.

이제 바울은 이 로마서를 마무리하는 문안에 앞서서 아직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로마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비교적 자세히 밝히면서 자신의 남은 이 사역을 위하여 기도를 요청하고 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사도행전에서 그의 사실적인 행동을 통해서도 누가가 기록하고 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행19:21)

뿐만 아니라 이미 이 로마서의 시작부분에서도 이러한 의견을 들어낸바 있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1:12~13) 라는 내용은 오늘 본문 22절과 24절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읽을 수 있다. 한절을 지나서 15절에서도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는 고백을 한바 있다.

위대한 믿음의 사도인 바울도 자신의 계획을 비록 얼굴은 모를지라도 같은 복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밝히고 기도를 요청하는 나눔을 통해서 사랑과 협력을 의논하고 있다. 하물며 연약한 우리는 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기쁨과 고통을 부담 없이 주고 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교회에서부터 시작하는 …



Ⅰ.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고 싶어하는 바울.(22~24, 28~29)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 …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모든 길은 로마로’라고 하는 유행어가 말해 주듯이 당시 온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는 로마를 가보고 싶어하는 열망들을 가지고 있었다.[우리 말에도, 사람이 나면 서울로, 말이 나면 제주도로] 오늘 우리가 서울이 이 나라의 수도이기 때문에 모든 경제와 행정의 중심이라고 하는 데서 크게 되려면 가보고 싶어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지만,

바울의 로마를 보고싶어 하는 기대와 소망은 일반 사람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바울은 잘 닦인 도로나 골로세움 같은 웅장한 건축물의 위용이나 원로원과 같은 정치나 군사력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바울의 로마에 가고자 하는 소망은 한 이유 밖에 없었다.

소아시아와 당시 그리스의 계획 도시라고 하는 마케도니아나 아가야에 까지도 이미 복음을 전했지만 그 로마의 세계를 향하여 잘 닦여진 도로를 통해서 로마로부터 복음을 세계로 흘려 보내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였다.

오늘 본문의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말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너희에게를 지나,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등등 오로지 로마의 형제, 자매들을 만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가 하면 여기에 연결되는 이유들을 직접 들고 있는데;

①‘여러 번 막혔더니(22b) 이제는 때가 된 것 같아서, 바울은 철저하게 모든 일을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었다. 많은 곳에서 이를 강조하고 있다. “때가 차매…” (그러나 그토록 열망하던 기대의 실현은 역시 죄수의 몸으로 고통스러운 여정으로 이루어 진다.)

②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23f)(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③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23), 서바나로 가리라(28b)(당시에 서쪽의 끝이라고 하는 스페인까지 가고자 하는, 사도행전1:8),

④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24)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1:12) 이 하늘의 용기를 가진 사도조차도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그리스도 인들로부터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고, 땅 끝을 향해 복음을 가지고 가는 데 있어서 로마 교회의 영적, 물질적 참여를 기대하였다.

⑤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28) 그러나 아직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교회의 연보를 복음을 준 예루살렘에 전달하기 위해 로마의 반대쪽을 가면서 이 일을 마무리 하고 라야 로마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⑥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29)(1: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영적인 복을 나누기 위해서)’ 등등



Ⅱ.마게도냐와 아가야 그리스도인들의 연보를 예루살렘에 가져가는 바울.(25~27)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바울은 자신의 남은 생애를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를 거처서 서쪽의 땅끝이라고 생각되는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채우겠다는 계획을 가지면서도, 지금 당장은 유럽의 교회들이 복음의 발생지인 예루살렘 교회의 물질적인 어려움을 돕기 위하여 모은 연보들을 전하기 위해 먼저 예루살렘에 다녀 와야 한다는 사실을, 로마엘 가기 전에 먼저 수행해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을 역시 밝히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고린도후서 8~9장에서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고 있다. 다만 이 이방교회가 복음을 나눠준 예루살렘 교회를 물질적으로 돕고자 하는데 있어서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25) 이 일을 함께 쓰고 있는 고린도후서에서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고후9:1) 했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의 백성들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실제적이어야 한다. 다만 그것이 영적인 말씀이든지 아니면 육적인 물질의 나눔이든지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야고보는 이러한 실제적인 섬김이 산 믿음에 관련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약2:15~1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26) 했는데 마게도냐와 아가야는 당시 그리스의 두 행정구역으로 마게도냐의 수도가 빌립보, 아가야의 수도가 고린도였고 이 두 교회의 바울에 대한 섬김은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들에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이 되고 있다.

다른 데가 아닌 ‘예루살렘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라고 연보의 목적이 분명히 기록이 되고 있고 이들의 물질적 헌신은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26b),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27f)”고 드림의 자세를 또한 분명히 하고 있다. 특히 우리 말에 “동정”으로 번역된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고 연이어 그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동정, 코이노니아(koinonia), 참여, 나눔, 분배 등등]

“…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27)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에 동참하고 배고픔을 나눠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예루살렘교회의 복음을 ‘나눠 가졌[코이노네오(koinoneo), ]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눔의 원리는 오늘날에도 영적인 것을 공급하는 자의 육적인 것을 공급하는 교역자와 교우들 간의 나눔에서 그대로 응용되는 원리이다.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왔고 역시 값없이 받았다면 이제 물질적인 부족에서 힘겨워 하는 그들에게 신령한 것을 받은 이방인들은 그 고난에도 함께 참여하는 의미에서 기꺼이 그들의 지갑을 열었던 것을 바울이 증거하면서, 그것은 오히려 빚을 갚는 것이라고 까지 표현하고 있다. “…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빚을 졌다면 그것을 갚는 것은 법적인 의무이다.

한 사람의 교역자로서 이런 말씀을 증거 하는 것이 어색하기는 하지만, 사실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는 교역자는 ‘참된 양식(하늘의 진리의 메시지)’을 공급해야 할 의무가 있고(생명의 양식이 아닌 것의 질 낮은 세상의 것으로 공급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신령한 양식을 받아먹으며 영적인 삶을 사는 교우들은 대신 교역자의 육적인 핍절을 채워 물질에 연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역시 의무이다.

바울 사도는 때로 이러한 부분을 분명히 한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전9:11)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9:14)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6:6)

바울은 이렇게 이방과 예루살렘의 교제를 가능케 하는 것 자체가 “성도를 섬기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영육의 교제가 완벽하게 이루어 지는 교회와 교회 그리고 교역자와 교우들 간에 기쁨과 아픔의 나눔이 되는 …



Ⅲ.이 두 가지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하는 바울.(30~33)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 두 가지 일 자체가 사람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기도가 필요함을 알고 역시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이들에게 이 일들의 성취를 위하여 기도를 요청하고 있다. 바울은 어느 교회를 위해서나 기도를 하고 또 기도를 요청 함으로서 기도에서도 교제를 나누고자 했다.

바울은 서신마다 “내가 기도하노라”거나,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물론이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6:19)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골4:3)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살후3:1)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히13:18)

기도가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일꾼은 있을 수 없음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참으로 합당한 기도를 가르치는 것도 눈 여겨 봐야 할 부분이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30)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비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는 기도나 축복은 허황된 것이고 성령께 의탁 되지 않은 기도 역시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듣지 않으신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7)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사랑으로 기도함은 능력 있는 기도가 된다.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간절함과 사랑이 묻어있는 감정이 묻어난다.

이제 31~32절은 3가지 기도할 제목을 말하고 있다.

첫째로는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31f) 이방인들의 지역 어디를 가든 사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공격하고 괴롭힌 사람들은 불신의 유대인들이었다. 사실 자신이 거기에 속했던 사람으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게 되면서 회개하게 되었고, 어찌 보면 자존심 강한 불신의 유대인들이 예전에 자신과 함께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대항할 수 있고 이러한 우려는 그대로 사실이 되었고 사실 이 로마 교회의 기도의 응답인지 모르지만 그 유대인들의 간악한 발악으로 죽을뻔한 바울은 죄수의 몸이 되어 가이사랴에서 2년을 허비한 후에 역시 기구한 죄수의 모습으로 로마로 가게 되었다.

두 번째의 기도의 제목은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31b)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사랑 속에서 이방인들의 부조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고 바울에게는 이것이 영육(靈肉)을 나누는 성도의 사랑이 분명하지만 자존심 강한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이러한 이방인의 사랑을 순수하게 받아 줄까?가 바울 사도의 또 다른 고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일도 기도를 요청하는 것이다.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31b)

셋째로는 좀 더 로마의 형제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이다.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32)

바울은 비록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지만 로마를 거쳐 서바나까지 복음을 들고 가는 것이 단순한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를 바라고 그래서 이 일이 기쁨으로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다.

특히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32)는 기도는 앞에서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24)라는 내용과 다르지 않다.

바울의 이러한 소원과 기도의 요청은 이루어지긴 하지만 역시 역경 속에 이루어지고 그 역경 속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요청대로 로마의 형제들의 기도로 가능하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의 습관대로 축복하고 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33)

5절에서는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라고 했고 다시 13절에서는 “소망의 하나님이”었고 마지막으로는 “평강의 하나님께서”(롬16:20) 라고 표현 했다. 그리스도인의 평강은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든지 모든 주변과 평화를 누리게 하는 이유가 된다.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것에서든지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역사(歷史)나 시간(時間) 거리에 관계없이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하다. 하나님 아버지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

신령한 말씀과 육의 삶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부분들이 자신에게는 확신과 섬김일지라도 대상들의 믿음의 형태에 의해서 나눠짐이 꼭 같지 만은 않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부터 하늘의 거룩한 나눔이 훈련되어져야 하므로 영과 육의 나눔을 온전히 나누는 …

미래의 아직 이루어 지지 않은 일들은 성취가 우리의 계획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있기 때문에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로의 기도에도 일에서도 나눔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