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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1:19~30 2008-10-05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비록 사람들의 변화와 차이가 세월 속에 묻혀 흘러가는 것 같지만 그것조차도 이 역사를 움직이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이다. 지금까지의 복음과 성령의 행전은 베드로를 중심 한 유대인들의 세계 속에 주로 편중되고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해서 전해졌다면 이제는 이스라엘 근방과 새로운 복음의 중심지와 그 복음을 가지고 나갈 인물들이 바통(baton)을 이어받는다.

이미 유대인 중심의 복음 확산 속에서도 복음을 들고 달릴 새로운 주자(走者)로 사울을 준비시키시고 베드로를 통한 이방인 구원의 논란을 잠재운 하나님은 복음을 발생시킨 예루살렘 대신에 새로운 이방을 위한 복음 증거의 중심지인 안디옥을 선택하신다.

이제 유대인들에게 예언된 [메시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이 당시 그리스 시대의 같은 의미인 [그리스도] 라는 기름부음을 받은 구세주로 소개되고,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나 사람, 또는 성도(聖徒)로 불려지던 새로운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것으로 선택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것이 된 사람’들이란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도 바로 이 이방인의 복음의 전진기지인 안디옥에서부터 임을 오늘 본문에서 듣게 된다.

요즘 [인프라(infrastructure)]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는데 주로 ‘기본적 시설, 기반(基盤)’을 의미 하는 말이다. 우리가 복음을 여기에 빗대어 말한다면 바로 하나님께서 ‘율법’이나 ‘이스라엘’ 그리고 예루살렘을 복음의 인프라로 구축하셨다면 이제 이 새로운 생명의 IT(information technology) 인 복음을 보다 널리 확산 시키시기 위하여 안디옥에 또 하나의 인프라를 구축하심을 오늘 본문에서 본다.

이렇게 구성된 복음의 인프라는 준비된 새로운 인물인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안디옥을 기점으로 당시의 로마의 모든 행정관할을 포함해서 주님의 약속대로 땅끝을 향하여 나아가는 보다 활기찬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한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생명의 복음의 탄생지인 예루살렘과 유대가 이방세계의 하나님 백성들로 말미암아 육신적인 도움을 받게 될 운명적 역사가 예견(豫見)되어지면서 비로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영육(靈肉)의 교제가 이루어짐을 보게 된다.

우리 모두도 이방인이었다가 복음에 들어온 사람들로서 이 이방인 중심의 선교역사와 함께 좀더 사실적이고 실감나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Ⅰ. 이방인의 세계에도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는 모습이 나타난다.(19~21)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오늘 본문의 시작이 어찌 보면 스데반의 순교 후에 있어졌던 핍박의 소용돌이 때문에 이방 세계로 튕겨 나가는 8장 첫 부분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19)

‘베니게’는 이스라엘의 북부 해안로를 통틀어서 ‘페니키아’ 라는 명칭으로 불렸던 곳이고 ‘구브로’ 역시 길리기아와 이스라엘 위쪽에 위치해 있는 ‘키프러스’섬을 말하는 것이다. 나중에 이방 복음의 전진기지가 된 ‘안디옥’은 다윗의 고향인 다소를 포함한 길리기아의 안디옥이다. 당시 로마시대에 ‘안디옥’이라는 이름의 도시나 지명은 나중에 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비시디아의 안디옥(행13:14)을 비롯해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것으로 전한다.(당시에는 유명한 정복자들이 자신이나 자신의 아버지, 또는 아내의 이름을 정복된 지면에 붙여지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즉, 정복자들이 부르는 것이 이름이 되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순교와 더불어 일어난 박해는 8장에서 보듯이 단순히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이방세계를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고 다만 제한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것이고 지난 10장과 11장 서두에 있었던 베드로에게 주신 변화를 모르는 상태에서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대상하는 것으로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도 거둬지는 것을 오늘 20절에서 본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20) 비록 이스라엘 본토인들은 아니었지만 애굽의 북쪽 지역인 구레네와 키프러스 섬 출신의 유대인들이 드디어 안디옥의 헬라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조차도 당시로서는 대단한 도전이었던 같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을 위한 도전자들과 성령께서는 함께 하심을 배운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21) 과거에 유대와 사마리아 안에서도 믿는 사람들의 수가 더하는 역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말씀과 성령과 더불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을 때 가능했다.

당시에 유대본토인 출신들은 아직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헬라인들을 향한 복음증거의 도전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져서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하신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게 될 것이다.

우리 교회의 역사 속에서 범전동이 내실을 다지는 예루살렘과 같은 기반이 되었다면 이제 이 양정동은 세계를 위한 안디옥 같은 복음의 전진기지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좋은 인프라를 구축해 주셨다고 믿는다.



Ⅱ. 준비된 바나바와 사울이 복음에 일선에 세워진다.(22~26)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은 심중한 면은 있었어도 언제나 자신들의 역할을 잊지 않고 중요한 시기마다 손길을 내미는 모습을 앞에서도 보았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행8:14)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22) 라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우리)를 필요로 할 때 머뭇거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도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된 사도들과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버림을 당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이들은 아직 편견이 가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안디옥이 하나님의 복음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주저앉아 있지 않고 가장 친화력이 뛰어난 바나바를 그들에게 보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나바는 안디옥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격하고 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23f) 만약에 유대주의적 편견이 많은 다른 사도였다면 이 경계되는 이방인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었을까 하는 의아심(疑訝心)도 가지게 된다.

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기쁨’은 헬라어의 어근이 같다.[헬,카이로(chairo)] 결국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물 즉, 은혜를 인하여 기쁨을 누리게 되고 구원의 은혜를 맛보는 자들만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감격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23b) 하나님 앞에 일주일 동안 진설 되어 사람이 물려낼 때까지 하나님 앞에 진열되어 있는 진설병(굳은, 헬, 프로데시스(prothesis) 처럼 (붙어, 헬, 프로스메노(prosmeno)- ~곁에 ~가까이에+머문다) 꾸준히 믿음에 있으라는 당부를 주고 있다.

새로이 신앙을 시작하는 이방 세계의 사람들이 생기발랄하긴 하지만 아직 깊이가 없는 신앙이기 때문에 세상의 유혹에 약할 수도 있다는 데서 바나바는 이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는 이 바나바의 아름다운 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이미 이 사람의 자세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4:36~37)고 소개했고 사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도 믿지 못하는 사도들에게 사울을 중보 한 것도 (행9:27, …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기록했지만 이 사람의 아름다운 품성을 다시 한번 거론하고 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24) 바탕이 착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참으로 좋은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을 바나바에게서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사람은 열두 사도의 수에 드는 사람도 아니었고 구제를 위해 따로 선출된 일곱 사람의 수에 드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를 위해서 선발되었던 7사람들의 신앙적 덕목을 그 이상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6:3)

이런 신앙적 덕목을 가진 사람이 안디옥에 가게 됨으로써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는 바람직한 결과를 이루었다. 오늘도 우리 각자의 신앙적 덕목과 역할을 인하여 안디옥 교회의 바나바와 같은 아름다운 결과가 우리의 교회 속에 나타날 수 있기를 …

그러나 바나바의 역할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음을 다음 절에서 본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25) 이 말은 단순하게 들리지만 말이 의미하는 바는 대단히 힘겨운 내용을 읽게 된다. 여기 [찾으러, 헬, 아나제테오(anazeteo), 반복해서(again) + 원하다, 바라다, 조사하다, 얻으려고 노력하다, 애쓰다, 기다리다=뒤쫓다, 추적하다, 파헤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누가복음2:44에 같이 쓰여지고 있다.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구브로 태생인 바나바에게 사울의 고향 다소는 생소한 것이었고 찾기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복음에 불탄 이 착하고 순진한 하나님의 종에게 어떤 어려움이라도 능히 감당 할만 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이 두 사람은 착한 바나바나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본 사울 조차도 이때까지는 자신의 고향에 다소에 돌아가 때를 기다리는 입장에 있었지만 하나님은 바탕이 좋고 도전적인 이 사람들을 역사의 일선으로 불러 들이심을 본다.

이미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그를 소개한 바 있는 바나바는 그를 만나 새로운 복음의 중심지가 될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진리에 헌신한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26f) 이 두 사람은 어찌 보면 쉽게 어울릴 수 없는 성격임에도 복음 속에 녹아져서 서로의 특성을 나누어 합친다.[사울(정의감, 논리적, 과격하고 저돌적)-바나바(온순하고 친화적) - 나중에 서로의 특성으로 인해서 나눠지기도 하지만; 행15:39~40,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26m) 아무래도 두 사람의 조화가 이러한 일을 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간격은 일년이라는 세월 동안 조화를 이루어 갔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쳤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이 다 필요하다. 다만 이 두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붙잡힌 사람들이 되었을 때 쓰임 받게 된다.

“…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26b)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사실에 있어서 처음에는 비웃는 이름이었던 것으로 역사가들은 전한다. 다른 표현으로는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사람들, 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들’ 이라는 비웃음으로 불렀던 이름으로 스스로 지은 이름이 아니라 불신자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심지어 이 이름에는 여러 가지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고 한다. ‘사람의 살과 피를 나눠먹는 사람들,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 세상의 제물에 흥미를 가지지 않는 사람들, 어른 아이를 모르는 사람들’ 법을 모르는 사람들, 등등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외향적으로 나타나는 모습들 때문에 붙여진 별명들이다.

분명한 것은 당시의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저들은 그리스도의 것이 된 사람들’ 이란 분명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많다. ‘사람들은 오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를 보면서 무어라고 평가하고 부르고 있는가? 아니 나 개인을 무엇이라고 평가하는가?’ 심중하게 생각해야 할 제목들이다.

또 오늘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싶은가?’ 하는 것도 우리의 삶의 중심에 무엇을 더 귀중하게 여기는가 하는 것의 바램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어떤 평가를 받을까에 대한 긴장된 자세도 필요하다.

이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늘 우리 모두의 꾸밈없는 자세에 사람들이 붙이는 별명과 오늘날 불신의 세계 속에 비쳐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평가에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안디옥에서 비로소 붙여진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이름이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이 오늘처럼 단지 비웃는 별명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 나와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 있는가에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세상은 죄와 어둠 속에 신음하면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자신들과 달라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고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못한 무리의 일원이 되는 것을 결코 원지 않음도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 각자의 입장이나 형편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나치지 않고 조건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변함없이 귀중하게 받들고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에 욕 돌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때 성령께서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하실 것이고 비로소 이러한 구별된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더해지고 주님께서는 영광을 거두실 것이다.

우리 모두의 헌신과 순종이 우리 모두의 미래와 영원을 결정한다는 사실에 경성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



Ⅲ.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복음 속의 교제.(27~30)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이 마지막 부분은 정확한 연대를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이방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귀중한 신앙적 교제를 기록하고 있다는 데서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내용이다. 바나바 뿐만 아니라 후에 몇몇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왔는데 그 중에 ‘사랑한다’ 라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짐작되는 [아가보-21:10~11] 라는 선지자가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큰 흉년을 예언했고 로마의 제 4대 황제인 글라우디오 때에 실제로 이 예언은 이루어져서, 이방의 제자들이 자신들에게 신령한 복음의 은혜를 끼친 유대의 형제들에게 [부조, 헬, 디아코니아(diakonia), 교제, 나눔, 봉사-고후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에게 보냄을 본다.

당시에는 세상에 있어질 일들을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선지자들이 미리 알 수 있었고[말하되, 헬, 세마이노(semaino), - 특별한 지시, 표적을 행하다.] 이러한 일은 역사 속에서도 분명히 이루어 졌었다. 이러한 일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자세가 중요한대 [1]“그 힘대로”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몇몇 가지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말씀이다. ①억지(강제)가 아니었다. ②회피하지 않았다. ③할 수 있는 힘을 다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과 그의 사람들을 섬기는 자세이다.

[2]“이를 실행하여” 계획에 그치지 않고 실천에 옮겼다. 신앙은 실천할 때 비로소 영광과 기쁨이 된다. [3]“장로들에게 보내니라” 가장 신앙적 모범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일이 구체화 되게 하였다.

이방 교회는 유대로부터 신령한 복음을 받았고 여기에 대한 사랑의 보답으로 그들의 생계의 어려움에 동참했다. 이것은 예루살렘 초기 교회에서부터 있어왔던 유무상통(有無相通)의 모습이 복음의 확산과 함께 이방으로 확대된 모습이었다.

바울은 이 일을 로마서에서 직접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15:25~27)

또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러한 사실을 증거한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전9:11)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의 가진 것의 나눔이다.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에만 머무를 수 없었다. 그것은 만민의 구원의 소식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어디서든지 주의 손이 함께 하시면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당연한 역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적시적소(適時適所)에 필요한 일꾼을 준비하시고 주신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되 사람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불러 들이시기 때문에 바나바 같은 인물들이 필요하고 모두가 하나님의 부름에 진심으로 응답한다면 극과 극의 사람들일 지라도 복음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 갈 수 있는 것도 하나님 나라의 신비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평가에도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한다. 비록 자신들이 죄악에 살지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구별된 삶을 살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성별 된 삶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과 성령을 따라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 어떤 이름으로 불려지기를 바라는가? ‘그리스도의 것이 된 사람들,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 이라는 뜻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복된 이름보다 영광스러운 이름은 없다.

복음 속에 진정한 나눔이 있다. 그것은 강제적이어도 안되고 회피해서도 안되며 서로가 힘대로 섬길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서로가 기뻐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