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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4:1~7 2008-11-23
주께서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으로 내려온 두 사도는 역시 그 자신들에게 익숙한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의 진리를 말하고 결과로 역시 유대인과 헬라인의 많은 믿는 사람들을 얻게 되지만 역시 여기에서도 자기 동족들에 의해서 방해를 받고 루스드라로 피신하는 내용을 본다.

나중에 바울이 로마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을 청하여 말씀을 전할 때 그들이 증언하는 것처럼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행28:22)는 내용은 바울이 복음을 들고 가는 어디서든지 어찌 보면 자연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죄의 사람들을 구원하는 도구가 아니었다면 방해를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지만 로마의 유대인들의 증언처럼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는 내용처럼 어두움의 하수인들인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역사를 절대로 좋아할 리가 없다.

또 어떤 경우 어두움의 세력은 마치 복음을 위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순도 100%의 생명의 복음에 다른 온 갓 것들을 뒤섞고 빼버려서 결국 효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순도 낮은 복음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도도 수없이 이 역사 속에서 감행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어떤 의약품의 처방이나 투약도 처방의 비율을 무시하고 사용하면 100%의 효력을 기대할 수 없다. 복음은 죄와 사망의 불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처방이다. 그럼에도 처음 하나님께서 주신 대로가 아니라 사람의 입장이나 편리를 위하여 어떤 것은 강화하고 어떤 것은 약화시키는 그래서 나중에는 전혀 죄인을 구원하는데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들도 분명 어두움의 세력들의 사악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바른 복음의 진리를 전하면서 어두움의 세력들로부터 칭찬과 좋은 반응을 기대하는 자체가 모순이다.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창세전부터 계획된 역사는 분명히 하늘의 능력이 함께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 만큼 저항도 많은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역사의 어두움이 짙을수록 생명의 빛으로 살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려고 한다면 처음부터 고난이나 반대는 각오하고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고난이나 역경과 반대에서도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는 성령의 약속은 복음을 반대하는 어두움의 세력과 비교될 수 없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하여 모든 하나님의 종들은 계속되는 어두움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계속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이고니온에서도 복음을 듣고 감격하고 순종하는 복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는 내용처럼 마귀의 일을 멸하려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능력의 종들인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역사도 함께 열매를 맺어서, 가는 곳마다 전하는 복음이 열매를 맺는 사랑의 역사가 지속됨을 본다.

복음이 증거되는 이고니온의 순종 자와 반대자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 각자의 삶을 살피고 이 두 사도의 열정처럼 진리의 대항자들 앞에서도 하나님의 성령과 더불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을 감당하는 우리 교회와 …



Ⅰ.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모습.(1~2, 5)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이고니온의 회당에서 바울 일행이 어떤 내용으로 복음을 전했는지는 안디옥에서처럼 분명히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두 사도는 역시 십자가에 죄인을 위하여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전했을 것이고[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처럼 독특한 역사는 1세기에는 물론 모든 역사에 前無後無한 사건이라는 데서 특이하다.] 그 결과로 허다한 무리가 믿는 좋은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이런 좋은 반응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1)는 아름다운 하늘의 열매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2) 이라는 안타까움이 뒤따라 오고 있다. 모두가 복음을 듣고 변화 받아서 하나님의 성령의 도구역할을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지 말씀을 듣는 자들은 나뉘고 반대편에 서서 대항해 오는 자들도 분명히 있다.

오늘 첫 부분에서 우리가 살필 수 있는 것은 [순종치 않는, , 불신하다, (의지적으로) 불순종하다] 복음의 반대 자들의 행동이 어떤 것인가를 볼 수 있는데 그 방법 자체가 졸렬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범함이 아니라 세상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은 비록 반대자의 대항에 부딪힐지라도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생명의 진리는 목표만이 아니라 방법도 선하고 의로워야 함을 배우는 것이다.

①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복음을 순종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다.[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복음의 반대편에 서는 자들은 불신자들(외국사람, 이교도)의 마음을 선동하고[행13:50f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헬, epegeiro, 흥분시키다, 일으키다)하여…]

하나님은 절대로 이 선동하는 방법을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선동하는 것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어두움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②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믿음의 사람들끼리 악한 감정을 품게 한다. [악감을 품게[헬, kakoo, 해를 끼치다, 노하게 하다, 악한 영양을 미치다, 악하게 대하다, 괴롭게 하다(행7:6)]

③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때로 선동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꾼들을 죽이려고 까지 달려든다. [능욕하다, 헬,hybrizo, 폭력을 행하다, 남용하다, 무례하게 대우하다, 비난하다, 부끄럽게 취급하다] 돌로 치는 것은 유대인의 오랜 관습이지만 죽을 죄를 진 자들에게 증인들이 돌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하여 죽이는 참담한 사형제도이다.

④달려드니, [헬,horme, 격동, 습격]

이 모든 것들은 분명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 그의 종들이 쓰는 방법이 아닌 죄악 된 세상과 어두움의 세상주관 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선치 못한 방법들이다.

결국 주님께서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7~20) 시는 교훈에 “아멘” 할 수 밖에 없다.

이래서 또한 빛과 어두움은 분명하게 구분이 된다. 진리의 복음에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들어 환영하지 않는다. 진리이기 때문에 반드시 환영 받을 것이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접어야 한다.

결국 주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 말씀하신 “…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마23:34)는 예언은 좋은 것이 아니지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어두움의 모습을 벗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이므로 이러한 불신의 사실들을 구분하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는 주님께 속한 자들의 분명한 모습으로 사는 …



Ⅱ.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하는 모습.(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그렇다면 애당초 모두에게 환영 받지 못하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십자가를 삶 속에 증거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도 본문의 이어지는 바울 일행의 모습에서 배우게 된다.

1.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하나님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거역하고 범죄 하는 인류와 자기 백성들에게 수천 년을 기다리며 참으셨다. 그래서 믿음의 다른 표현은 “인내” 라고 하고 성령의 열매에서도 “오래 참음”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 가장 적절한 비유가 집 나간 아들의 비유이고, 예수께서 베드로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는 물음에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18:21~22)는 말씀은 사실 하나님의 참으심의 모델을 그대로 제시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류를 부르시고 기다리다가 마음이 시커멓게 다 타버렸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명을 전하는데도 불신의 사람들의 마음을 선동하고 믿음의 사람들 간에 악한 감정을 품게 만들고 비난하고 격동하고 습격하는 순종치 못하는 자들에 대하여 같은 모양과 방법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인내로서 기다림이 필요함을 교훈해 주신다.

2. 주를 힘입어야 한다. “주를 힘입어” 이런 모습으로 대항해 오는 사람에게 인간의 마음으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주를 의지할 때” “주님의 편에 서서” “주의 입장에서” 감당해야 한다.

3. 담대 해야 한다. “[담대히, 헬, parhesia, 확신, 자신감, 기탄없이, 분명하게] 말하니” 세상에서는 상대가 강하게 나오면 기어들어가고 처세술로는 [강대 약, 약대 강] 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다가 위축될 필요가 없는 것은 진리의 배경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힘없고 연약하지만 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담대하라”고 명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세상에서 위축되는 것처럼 느낄 때마다 더욱 담대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하나님은 그러한 대적자들을 친히 상대해 주실 것이다.

그러한 결과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4. 그럴 때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일하신다.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기적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생명을 걸고, 상황에 관계없이 말씀을 의심 없이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오래 인내하면서 주님을 의지하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주님을 증거해도 믿지 않지만, 이러한 믿음을 뒤 따르는 표적과 기사를 인하여 믿게 되는 일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일반적인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앞의 내용(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을 행해지지 않으면서 표적과 기적을 기대하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두 사도와 같이 믿음을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게 되는 순서로 가는데 그것은 결국 여기 나타나는 표현대로

5. 결국 주께서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신다.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하나님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말씀께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사람을 통하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신다.’

즉, 생명의 말씀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 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진리는 자기의 말씀이요, 거저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은혜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더욱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은 거기에 적절한 사람을 통해 주님께서 친히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적절한 도구가 되었을 때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은혜의 역사다.

이것은 비단 바울과 바나바에 국한 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제 자신의 자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진리에 순종치 않는 사람들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방해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같은 방법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하나님의 방법으로 대하는 자세가 필요하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비로소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신다.” 믿으시기를 …



Ⅲ. 때로는 뒤로 물러서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해야 할 때가 있다.(4~7)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이러한 은혜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님을 마지막에서 본다.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4) 이것은 어쩌면 복음이 가는 곳에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결과요 반응이다. 두 사도의 충실하고 믿을만한 자세,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 이 정도면 모두가 두 사도를 좇아야 할 것 같은데 결과는 그렇게 되질 않는다.

또 성령이 충만한 사도들에게도 반응이 이랬다면 부족한 오늘 우리에게는 더 그렇지 않을까 하는 스스로의 위로를 해보기도 한다. 연이어지는 모습은 더욱 포악하였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5) 불신의 이방인들과 반대의 명수들인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여기에 관원들까지 힘을 합하여 무례하게 사도들에게 달려 들었다.

다른 때 같으면 그냥 그 돌멩이를 다 맞을 법도 한데 여기서는 그런 방법이 좋은 방법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6~7)고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마무리가 되고 있다.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때로는 물러나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지혜일 수도 있다. 때로는 물러나는 것이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버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존심은 자신과 상대를 상하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물러날 때를 바로 판단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자존심이 우리를 버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영원까지 지탱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도들의 올바른 판단과 자세 때문에 루스드라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짐을 다음 시간에 보게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봐야 될 것은 마지막 절이다. “…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6~7)는 말씀이다. 우리는 크게 패배하고 위기를 겪은 다음에는 어쩌면 열왕기상 19장의 엘리야와 같이 낙담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19:4)

그러나 이 두 사도들에게서 보는 중요한 것은 물러난 곳에서도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것이 구약의 율법 속에 일꾼과 새 언약의 복음 속의 일꾼의 차이일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고백하기를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7:18~19)

복음 속에서 보는 예수 그리스도나 이 사도행전 속의 성령의 사람들은 죽을 위기를 겪고서도 다시 물러난 곳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물러나는 것이 패배가 아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Conclusions. 유대인들의 방해로 옮겨온 도시 이고니온에서도 복음을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전하고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기도 하였지만,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교도들의 마음을 선동하고 믿음의 사람들에게까지 이간을 붙이고 폭력을 행사하고 마침내는 죽이려고까지 습격을 하는 그야말로 믿음의 사람들로서는 사용할 수 없는 죄악 된 세상의 온 갓 방법을 다 동원해서 사도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두 사도는 인내를 가지고 오래 버티며 주님 편에 서서 보다 복음에 큰 확신으로 증거할 때 하나님은 표적과 기적을 통하여 주님 자신의 복음을 증거했다.

그럼에도 대상은 믿음의 사람들과 불신의 사람들로 갈려서 관원들까지 한통속이 되어 두 사도를 죽이려고 위협함을 알고 루스드라로 잠시 물러나 그곳에서도 역시 동일한 모습으로 낙심치 않고 복음을 증거하였다.

이것은 오늘 복음으로 사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과 우리들에게 귀한 도전을 주고 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다가 반대에 부딪히면 절망하고 낙담하게 되지만 그럴수록 인내하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더욱 확신에 거할 때 반드시 주님께서 역사하셔서 표적과 기적을 주시고 ‘주께서 자기…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므로 영광을 거두실 것이다.

이런 일을 수없이 경험한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살후3:13) 당부하고 있다.

때로는 목숨을 내걸고 저돌적으로 나아가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가능한 주님의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지속됨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