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행 14:8~18 2008-11-30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비시디아 안디옥으로부터 유대인들의 박해로 이고니온에 왔지만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복음증거를 방해하는 그들을 피해서 다시 루가오니아 지방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를 거치면서 전도할 대상을 찾다가 성문입구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고 그 중의 나면서부터 걸어보지 못한 한 지체장애자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고 마침내 그를 불러 일으키면서 이 지방 전체가 뒤집히는 놀라운 役事가 일어나고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바른 진리를 증거하는 바울과 바나바 일행을 보게 된다.

어찌 보면 이 사건은 3장의 미문이라는 성전문의 지체장애자를 일으켜 세운 베드로와 요한의 역사와 비교되는 이방세계에서 일어난 같은 하나님의 역사라는 데서 유대인의 사도라고 하는 베드로와 바울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사건이지만 두 사건의 다른 면들도 없지 않음을 본다.

유대인의 성전 출입구에서 드나드는 종교인들의 연민의 감정을 이용해서 구걸하려는 지체장애자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6)해서 일으켜 세움으로 그의 인생이 뒤집히고 사도들은 오히려 이 일로 핍박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방인인 루스드라의 장애자는 바울이 보기에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9)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10)는 명령으로 치료하는 기적의 역사를 일으켰다.

베드로는 성전미문의 치료로 인하여 유대인들에게 더욱 미움의 대상이 되었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일로 당시 로마와 헬라 세계에서 가장 추앙하는 신들의 대우를 받을뻔한 경우가 되어서 자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을 겨우 말리느라고 진땀을 흘린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의 대상자들인 두 지체 장애자는 한결같이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8)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10)는 같은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이 역사를 통해서 허황된 우상숭배를 그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증거 함으로서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그리스도를 소개하였고 유대 사회든 이방 사회든 대한민국이든 구원받을 믿음을 가짐이 중요함을 일깨우고 있다.

특히 오늘날 복음 속에 있다고 하면서도 세상 불신의 사람들과 어떤 것들을 꼭 같이 행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경계를 받아야만 할 중요한 교훈의 메시지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15b)는 요청이다.



Ⅰ. 어디든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있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세상 어디나 장애자는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 더 애절하고 안타까운 것을 본다. 그러나 이러한 육신의 장애보다 심각한 것은 영적인 장애가 더 치명적이다. 육신의 장애는 길어야 1세기에 끝나지만 영혼의 장애는 영원까지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8)는 우리 보편적인 사람들의 영혼의 상태를 비유할 수 있다. 육신은 건강하다고 큰소리 치고, 할 것 안 할 것을 다 하면서도 적어도 영적으로는 스스로 한 걸음도 내디디지 못하는 심각한 장애의 상태를 이르는 표현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라는 선언이다.

그러나 이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은 육신으로는 한 발짝도 걸어본 적이 없는 장애인이지만 그런 장애의 설움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남다른 갈급함이 있었다.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9f)이 소망을 가지게 한다.

자기 동족 유대인들은 생명의 복음을 전해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돌을 던지지만, 비록 이방인의 세상에 율법도 복음도 들어본바 없는 이 장애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아직 들어본 바 없는 소리를 들었고 거기에 마음을 집중하여 듣게 되는 것이 복 받을 준비자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그러므로 말씀이 들려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첫출발이다. 그래서 이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다.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9f) 이러한 영혼을 들여다보는 바울의 모습을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9b) 라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각자를 보실 때 과연 우리 각자에게서 무엇을 보실까? 이 지체 장애인에게서는 그에게 있는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그에게서 보게 되었다.

신약성경 속에 기적을 경험하는 당사자들은 항상 믿음이 있음으로 그 기적이 자신의 것이 되었음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기적의 역사를 일으키시면서 한결같이 선언하시기를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9:22; 막5:34; 눅8:48)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 )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10:5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7:50)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9)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8:42)

주님께서 능력을 베푸시면서도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는 표현보다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증거하셨다. 주님은 모든 좋은 것들을 다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가 받을 믿음이 없어서 받지 못하는 것 투성이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렘5:25)

바울은 루스드라에 발은 쓰지 못하지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10) 고 선언했더니 그 선언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고 오늘 본문은 기록되고 있다.

오늘 이 이름없는 루스르라의 지체장애자는 누구고 나는 누구인가! 우리 각자도 말씀을 듣고 지겹도록 앉아있던 죄악과 불평의 자리를 믿음으로 박차고 일어서야만 한다. 뛰어 걷는 행동은 대개 급하거나 아니면 흥겨움을 표현하는 모습으로 이 사도행전 3장이나 오늘 본문 모두가 동일하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감격을 표현하는 모습니다.

성전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친 후 베드로 사도는 그러한 모습을 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라고 증거하고 있음을 듣는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도 같은 믿음으로 반응하여 불편한 영육의 모든 문제를 치료 받는 …



Ⅱ. 하나님의 역사에 일반적인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의 반응.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전혀 만나본 경험이 없는 이 루스드라의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일어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자신들의 문화적인 경험과 종교를 통해서 나름대로 해석을 하고 있다.

당시 통용되는 말이 세 개 정도였다고 이해되는데 당시 로마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라틴어]는 공통적으로 사용했을 것이고 [헬라어]도 일반적으로 쓰는 말로 바울의 경우에도 이 그리스어로 주로 말씀을 전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각 지역마다 토속적으로 쓰고 있는 방언도 있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11) 사람들의 습성이 대개 급하거나 놀라운 일이 생기면 자신들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본다. 제주도(하영 놀랬쪄 이) 사람들이나, 전라도(겁나게, 허불나게 놀래뿔었당께)는 물론이고 경상도(억수로 놀랬다임니꺼) 사람들도 다른 곳의 사람들과는 애써 표준말을 써보다가도 급하면 자기 방언이 튀어나오는 모습들을 더러 본다.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12) 일반적으로 [그리스 신화]를 보면 신들이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들을 더러 보게 되는데 당시 [쓰스-제우스] 또는 [쥬피터]는 신들 중에 가장 우두머리 신으로 존경되고 있어서 [벤허]같은 영화를 보면 [쥬피터]를 찬양하는 모습들을 더러 볼 수 있다. [사랑과 미의 여신-아프로디테(비너스)]

또 웅변의 신으로 여겨지는 [허메-헤르메스] 또는 [머큐리]라고 불렀고 제우스 신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주로 말씀을 증거하는 바울을 이 [헤르메스]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바나바를 바울보다 높은 신으로 대우하는 것은 아무래도 외형적으로 바울보다 바나바가 풍체나 위엄이 있어 보이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 봄직하다.

그러나 아무래도 바울 일행은 이 사람들의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할 때에야 겨우 말린 것으로 보여진다.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13)

[제우스]나 [헤르메스] 신들을 섬기고 제사 하면서도 한번도 이런 능력의 역사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전설 속의 신화로만 듣던 신전의 제사장들은, 바울 일행을 통해서 나타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보면서 자신들의 생각으로 이 믿지 못할 일을 이해해보려고 애쓰면서 그것이 자신들이 위하고 섬기는 신들이 자신들의 정성을 받아줘서 땅에 내려온 것으로 나름대로 이해를 한다.

그러나 이들만 어리석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들을 스스로의 노력의 결과로 이해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의 특별한 수고나 공로로 돌리는 것도 아니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모두는 사실 세상의 일반적인 사고에 익숙해 있는 모습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를 은혜로 여길 줄 아는 것도 또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이 본문 17절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고 결코 사람과 멀리 있지 않은 하나님의 존재를 소개하고 있는데 다음 항목에서 좀더 생각하고자 한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11:6)고 바울은 경계해 주고 있다. 죄에 죽을 인생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오르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은혜로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완전히 구원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구세주의 은혜로부터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 성령으로 함께 하셔서 나타나는 모든 일들을 은혜와 믿음으로 감사하는 …



Ⅲ.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두 사도의 행동을 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본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방언으로 흥분하며 행하는 일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점점 행해지는 모습들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이방 신들과 자신들에게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놀란 반응 못지 않게 자신들의 몸을 던진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14) 유대인들은 물론 일반적으로 참담한 일을 당할 때 옷을 찢는 관습은 동양적 사고의 사람들에게는 더러 있는 일반적인 행동일 것이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15f) ‘우리도 당신들과 꼭 같은 사람들인데 왜 우리의 능력으로 이런 일을 한 것처럼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려는 어리석은 일을 하려 하는가?’

베드로도 같은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고 경계했었다.

결국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신이 받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종이라면 누구나 경계하는 자세이다. 때로 주님께 드려져야 할 영광을 사람이 가로챈다면 결코 용서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이 경건한 사람들은 그러한 행동에 대해서는 두 손을 들고 온몸으로 소리를 질러서 거절하는 것이다.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15b)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전하는 일이 결국 이러한 허무에 굴복하는 잘못됨을 돌이키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초청하는 과정에 있어지는 능력들을 잘못 이해하는 일조차도 경계하는 모습을 오늘 많은 하나님의 종들과 백성들이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복음은 바로 헛된 인생을 가치 있게 하고, 가치 없는 삶에 하늘의 가치를 부어주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런 경계를 주신바 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사55:1~3)

16~17의 말씀은 나중에 아테네에서 철학자들에 했던 설교와 다르지 않음을 듣는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17:30~31)

모든 인류에게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전에는 자기의 방법과 양심과 관습을 따라 살도록 허락 하셨지만(롬2:14~15) 그때에도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19~20) 하셨다.

뿐만 아니라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다고 증거 하는가 하면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17:26~27) 라고 증거했다.

때문에 이제는 변명할 수 없을 정도의 구원의 진리를 증거하심으로 핑계치 못하게 하셨다는 교훈이다.

하나님은 주신만큼 찾으시고, 아는 만큼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8) 이런 입장에서 많이 받은 것을 활용치 못하면 오히려 받지 않음만 못하고 많이 깨닫고도 실천치 못하면 알지 못한 것보다 낳을 것이 없다는 두려운 음성이다.

Conclusions 어디든지 말씀을 전하는 데는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있고 그들이 허락하신 은혜를 누리게 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조차도 자신들의 입장에서 소화하고 이해하려고 든다. 그런 실수로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가로 채거나 다른 우상들에게 돌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좋아도 감격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좋음 뒤에 따라 오리라는 비극을 걱정하는 자유 하지 못하는 인생들이라서 좋은 일에는 감사보다도 액운을 막기 위하여 자신이 섬기는 신들에게 제사를 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인하여 복음 속에 있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런 허황됨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로 하나님의 역사나 은혜를 헤아리려는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잘못됨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제는 천하를 명하여 회개하라 하셨고 믿을만한 증거들을 주셨기 때문에 핑계치 못할 것이고 그런 이유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한사코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18)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짐짓 교만하기 쉽다. 하나님의 역사를 두고도 자신을 내세우려는 유혹을 많이 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고 구원의 십자가를 주신 것이다. 믿으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