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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26:24~32 2009-09-06
모든 사람도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이다!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있다고 큰소리치는 누구에게나 주님 믿는 감격을 환경과 처지에 관계없이 자신 있게 자랑하고 고백할 수 있는가? 오늘 바울 사도의 모습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이 없는 가운데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왕과 버니게 그리고 가이사랴의 유지들 앞에서 거리낌없이 자신의 경험과 함께 구원의 복음을 전했다. 오늘은 이 복음증거의 결과와 반응이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생명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이 모든 사람의 것이 되지 못함을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바라시지만 대부분의 사람, 특히 재물이나 지위나 학문이 높은 사람들은 그 복음이 생명의 음성으로 들려지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 막10:25; 눅18:25)고 말씀하신 것 같다.

부자는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중 무엇이든지 많이 가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세상의 것을 많이 가졌다 하더라도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다만 자신이 임시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의식을 갖고 마음이 겸손하고 가난하다면 많이 가진 것이 장애가 되지 않고 오히려 유익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그렇게도 힘 드는데 우리가 이 복음 속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를 일이다. 로마의 총독이라는 오늘의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같이 길지 못한 자리임에도 그것 자리를 지키기 위해 천국의 장애가 된다면 사실 얼마나 불행한가!

우리는 오히려 그들보다 못하기 때문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약2:5)는 위로를 주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음을 감사하는 …

오늘 읽은 말씀은 가이사랴에서 바울의 최후의 복음증거라고 하는 데도 의의가 있다. 바울은 자신의 안타까움을 가이사에게 호소했고 이제 다음 시간에는 로마로 호송되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 내용은 바울의 증거에 대한 베스도와 아그립바의 반응과 그들이 보기에는 처량하고 안되 보이지만 그 부정적인 반응에 오히려 자신의 복음으로 인한 기쁨과 감격으로 이들을 권면해 보는 바울 사도의 호소와 만약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않았더라면 놓아줄 수 있을 정도로 무죄한 바울을 자신들의 결론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자유 하는 것보다는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보여주신 비전대로 가이사에 상소했던 것이고, 그런 이유에서 비록 죄수의 모양으로 로마를 가지만 개의치 않고 묵묵히 자신의 역할과 갈 길에 순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Ⅰ.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24, 28)

사실 이 변론의 기회는 베스도의 황제에 대한 바울의 상소를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를 찾고자 아그립바의 조언을 구하는 자리이긴 해도 사실에 있어서 베스도 뿐만 아니라 아그립바를 향한 복음의 증거였다.

그럼에도 유대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들의 종교나 관습에 익숙하지 못한 베스도는 바울의 말을 가로막고 바울을 미친자로 몰아 세우고 있다. 앞에서 계속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절에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 하노라 …” 했고 2절에 “아그립바 왕이여; V13 왕이여; V19 아그립바 왕이여”한 것처럼 아그립바 왕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오히려 옆에서 계속 듣고 있던 베스도가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24)고 소리를 지르며 가로 막는 모습을 본다.

앞의 13:4~12에서 구브로 섬 바보에서는 총독이 오히려 바울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만 박수무당인 엘루마 라는 사람이 방해 함에도 그의 말씀을 경청했던 서기오 바울이라는 총독을 본 바 있는데 여기서는 정 반대의 모습을 본다.(7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12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하나님의 계시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을 처음 듣는 베스도는 열정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바울이 많은 공부로 인하여 미쳤다고 몰아 부치면서 아그립바로 하여금 더 들을 필요가 없다는 의도로 바울의 증거를 가로막고 나선다.

이렇게 결국 바울 사도는 복음을 증거하다가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기 까지 하지만 바울 사도 자신이 이런 사실에 대해 더 적극적임을 고백하는 내용을 고후5:13에서 듣는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사람이 사실 무엇엔가 미치지 않고는 맨 정신으로 살 수 없는 비극적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미쳤다고 하는 표현이 긍정적으로는 어떤 일에 빠져 있을 것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듣기에 거슬리는 표현일지라도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현이 진실이라면 과히 나쁘지 않은 표현이다.

죄의 사람이 죄와 저주에서 해방되어서 진리에 붙잡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다른 잘못된 것들에 빠지고 붙잡혀서 탈이지 복음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요즘 이성적인 사람들은 쉽게 이런 말을 한다. ‘종교를 하나 가지는 것은 좋지만 너무 거기에 빠져 사는 것은 좋지 못하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베스도의 반론에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29)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육신이 누명을 쓰고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영혼과 마음은 천상을 오가는 무한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바울 자신 같기를 바란다는 선언을 보면 복음에 미친 자들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도들을 향해서 천하 각지로부터 자신들의 종교적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그 광경을 보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행2:12~13)는 표현도 맨 정신이 아니라는 빈정거림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풍습과 종교를 잘 아는 아그립바왕 역시 다르지 않음을 본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28) 여기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한다는 표현은 사실에 있어서 좋은 표현이 아니라 당시에는 비웃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희생과 순교로 인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자랑스러운 이름이 되었지만, 당시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가 정상적이지 못한 사람들로 취급되는 때였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이단자들로, 이방인들에게서는 사람의 살과 피를 나눠먹는 이상한 사람들로 취급되었던 때였기 때문에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한다는 의미는 오늘 우리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오늘 우리가 참으로 바울 사도처럼 복음에 미친 자들이 되어서 하늘의 소망과 기쁨 그리고 진리의 확신으로 충만한 …



Ⅱ.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이다.(25~27, 29)

미친 취급을 당하는 바울 사도는 더욱 진지하게 자신과 복음의 확신을 증거한다.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25) 분명히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미친 짓이고(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 지는 것 보다는 이기는 것),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정상적이 아닌 사람들로 보이는 것이 어두움의 영에 사로잡힌 자들의 눈에는 당연한 것일 것이다.

이러한 진리에 대해서 감긴 눈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거듭날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이 오직 하나의 방법 역시 공중권세 잡은 자들의 하수인이 된 사람들에게는 거절당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미친 것과 정신 차린 기준 자체가 하나님의 기준과 정 반대이기 때문에 바울의 논리 정연한 빛에 대한 계시의 진리는 영적인 일에 눈이 감기고 귀가 막힌 베스도에게 공부를 많이 해서 미친 것으로 보였고, 바울은 자신이야 말로 정신 차린 말을 하고 있노라고 공언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선언의 대상은 역시 아그립바로 되돌아 간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26) 아그립바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을 통하여 하신 일들을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아시기로,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사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물론 먼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알아야 믿을 수 있고 알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야 가능하다고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지적한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그 다음에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다윗의 혈통으로 오시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고발되어지고 빌라도에 의해 사형을 당한 것은 아무도 몰래 우리 나라로 말하면 중앙정보부의 안가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天下萬民이 아는 사실임을 확인하고 특히 빌라도의 보고에 의해서 로마 정부는 물론이고 온 세계가 아는 역사적 사실이다.

바울은 한 걸음 나아가서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27) 라는 표현이 아그립바에게는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에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28)려느냐고 분노했던 것 같다.

아그립바는 유대에 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았고 특히 성전과 제사 제물들까지 관장하는 자리에 있었다면 선지자들의 예언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모를 리 없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접근하지만 오히려 분을 내고 마는 것이 한계였다.

이러한 아그립바의 안타까운 반응에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갖는 행복을 소개하면서 모든 사람을 복음으로 초청하는 내용이 29절이다. “…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

바울의 이러한 말과 행동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을만한 도전이다. 적어도 이스라엘의 최고의 권력과 영예를 누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보기에는 억울해서 못살 것 같기도 하고 초라해 보일 법도 한데 오히려 그들 앞에서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자랑하고 있다.

사실 바로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보이는 모습에서는 온 갓 권위와 존귀를 걸치고 거드름을 피우는 자들을 향하여 “당신들 속에 나만한 감격과 기쁨이 있느냐?” 묻고 있는 모습이 저들의 눈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지만 이것은 믿음의 진실이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적으로 초라해져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영원을 보장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당당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지금 형통에서 나오는 고백이 아니다. 그는 동족에게 고발 당하고 쇠사슬에 매여서 당시 최고의 권력자들 앞에 선 것을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억울하기 이를 데 없고 세상적으로 따지면 억울해서 잠이 안 올 판국인데도 그의 보이는 모습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놀라운 평화와 감격을 품고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몸은 사슬에 매여 있을지라도 그의 영혼과 마음은 진전한 자유와 함께 이미 감격의 천국에 가 있는 고백이다. 육신으로는 매여 있으면서도 오히려 거드름을 피우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마음과 영혼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세도가들에게 영적인 자유로 초대하는 내용으로 바울의 증거는 마무리 되고 있다.

모르긴 해도 이러한 바울의 태도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고 이 후에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이들 중에서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의 고백과 삶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세상 사람들보다 초라하고 힘겨워 보일지라도,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영광을 확보해 둔 사람이라면 형편과 처지에 관계없이 자신의 행복을 나보다 낳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자신 만만하게 소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결코 우리가 세상의 보이는 영화에 꿀릴 필요가 없다. 믿으시기를 …



Ⅲ.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30~32)

저들은 분명 바울의 증거에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바울 앞에서가 아니라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바울이 의인임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렇다면 저들이 황제에게 자신들의 느낀 대로 상서를 올려서 구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 우두머리인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32)고 끝내고 만다.

이것이 세상의 알량한 인심이요 태도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이 땅에 정의가 실현 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의 정의에 기대를 걸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민주주의나 정의라고 하는 것은 거기서 거기일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이러한 절망적 상황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서도 이 땅에 기대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의롭고 죄가 없으면 놓아줘야 하는데 자신들의 입장이 고려되는 것이 이 세상 법이다.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31) 모두가 한결 같이 이런 판단을 했다면 바울을 더 이상 죄수로 로마로 보낼 필요가 없는 것이고 로마 시민인 그의 결박을 풀어야 당연함에도 이런 앞뒤가 맞지 않은 결론을 내고 있는 것이 당시뿐 아니라 현재의 사람들의 법 적용이다.

이런 세상에 더 이상 무슨 미련을 두려고 하는가!

Con. 세상은 복음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바르게 봐주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미쳤다고 판단한다.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고 경계하신 바와 같다. 아니 오히려 세상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진리에 미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세상과 천국을 저울에 올려 둘 때 세상의 것이 더 비중이 있어 보인다면 믿음을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최고의 권력자들 앞에서도 자신의 가진 행복을 당당하게 증거했다. 그것은 그들보다 형편이 나아서가 아니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라는 베드로 사도의 당부처럼 어떤 조건 속에서든지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가지게 된 영원한 소망을 당당히 자랑하는 …

세상에 기대할 것이 없다. 세상은 옳은 것을 옳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7) 신 주님의 당부를 실천하면서, 이 땅의 평가에 기대를 두지 말고 영원한 의의 통치자이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는 것으로 진정한 소망을 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