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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살전 3:6~10 2009-12-27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과연 우리가 변화무상한 이 세상의 흐름에 파도처럼 그대로 떠밀려 다닌다면 참으로 감사할 조건이 있을까 생각해 보게 한다. 그러나 믿음의 선진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감사를 찾고 다시 제자리를 회복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암비볼리,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의 박해로 베뢰아를 거쳐 아덴에서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염려되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보내어 오래되지 않은 복음을 받은 성도들을 염려하다가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의 소식을 가지고 온 디모데를 만나서 그들의 사정을 전해 듣고 감사의 고백을 드리고 있는 내용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원치 않는 일들을 만나고 그로 인하여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감사조차 잊어버리고 힘겨워 할 데가 많다. 지난 주에도 원치 않은 일을 당한 사랑하시는 한 가정의 이야기를 오늘은 구체적으로 하게 된다.

바울은 디모데를 통해서 안타까움으로 기도하며 애타하던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핍박과 환란 가운데서도, 길지 못한 신앙적 연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을 통해서 받은 믿음을 버리지 않고 지키고 있는 그들의 믿음이 너무나 가상해서 복 받히는 감격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을 오늘 우리는 읽는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세속적인 기준에서가 아니라 진리로부터 오는 감사를 누릴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올무에 걸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진리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바탕이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의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사람들의 감사는 언제나 순탄하고 평안한 것 때문에만 드리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너무나 힘겹고 변화무쌍해서 조그만 평안에도 더 큰 감사를 드리게 되는 그런 가격의 표현이 오늘 바울의 고백과 같은 감사이다.

오늘 내용에서 바울은 어떻게 보면 아주 사소한 감사를 고백하는 동시에 또 다른 감사의 이유를 찾고 있는데 사실 우리 주변에 감사를 찾는다면 참 감사할 일이 많고 반대로 원망할 일을 찾는다고 해도 많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를 찾으며 사느냐, 염려와 불평을 찾으며 사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모습을 결정하는 중요한 바탕이 된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나(우리)는 과연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우리는 한 해를 지내면서 과연 무엇을 감사의 제목으로 주님 앞에 감사할 것인가를 오늘 이 바울의 고백과 함께 찾을 수 있는 그런 모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말씀을 나누었으면 한다.



Ⅰ. 항상 그리워하는 대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으로…(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1.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박해 중에 있으면서도 믿음과 사랑의 신앙적 모습을 디모데를 통해서 듣게 되니 얼마나 감사했겠는가.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신앙의 사람들에게 신앙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 충분히 감사할 일이다.[Valenzuela]

2.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또 여러분이 우리를 늘 좋게 생각하고 있어서-표준 새] 오랜 세월을 지난 것도 아닌 짧은 시간을 지냈어도 좋은 기억으로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3.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서로를 그리워하는 관계는 분명히 사랑의 관계이다. 그것도 일방적인 짝사랑보다는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소망이다. 그렇다! 보고 싶은 것 자체가 소망이다. 잘 하고 있다가 만나는 사람은 만남을 기대하게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만남이 두려운 것은 이 역사 속에 두 번째 오실 주님을 맞음에도 그럴 것이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눅12:37~38)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눅12:42~43)

바울은 그렇지 못한 만남의 안타까움을 걱정한다.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고후12:20)

우리 서로의 관계도 그와 같은 것을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은 관계 그것은 비단 연인의 관계만이 아니라 관계가 원만한 부모 자식이나 형제간도 마찬가지이다. 각자가 자신의 자리를 충실히 지킨 사람들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빨리 보고 싶은 것이 사실이고 우리 믿음의 가족 간에서도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한다. [초등학교 들어간 아이가 학교에서 조그만 상이라도 받으면 부모를 기다리게 되는 것처럼]

오늘 이 말씀을 나누는 우리 모두가 서로 볼 것을 기대할 수 있는 보는 것이 기대되고 감사되는 그런 형제자매의 관계와 주님 다시 오심을 흠모하는 …



Ⅱ.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데서…(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서 장막을 만들면서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물질적으로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모자라서 참으로 핍절한 가운데서도 비록 유대인들의 방해는 있었지만 꿈같이 지나온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믿음으로 지탱하고 있다는 소식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고 고백하고 있다.

참으로 힘겹고 어려울 때는 좋은 소식, 특히 자신이 힘썼던 일이 잘 된다고 하는 소식만으로도 힘이 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바울은 고리도 교회에게 이러한 표현을 여러 번 고백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4)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후7:5~7)

빌립보 교회에도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0~13)

감사는 분명 풍요와 부요 속에서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핍절할 때 주님께서 나를 위해 피 흘려 주신 사실이 더욱 감사가 될 수 있다. “누가 과연 나 같은 자를 위해 대신 죽어 줄 수가 있는가!”를 생각하면 저절로 감사가 되고, 형편이 어떠하던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감사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 비로소 바울 같은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이것은 분명 믿음 안에서만 가능한 원리이다. 세상은 자신의 약함을 들어내거나 인정한지 않는다. 왜, 약육강식의 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에 약점을 알면 잡아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올해 잘 된 것들보단 못된 것들이 많다고 할지라도 서로 위를 나눌 수 있고 약하디 약한 우리를 위하여 절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어 주셨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큰 위로이며 감사가 되는가! 모두 이 사랑 때문에 감사를 올릴 수 있는 …



Ⅲ. 믿음으로 서 있는 모습을 인하여…(8~9)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1.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바울의 염려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우들이 자신을 그렇게 핍박했던 유대인들이 그들도 핍박했을 것이기 때문에 다 넘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는데 저들이 오히려 믿음에 굳게 서 있다는 사실을 들을 때 이제는 살 것 같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참으로 커다란 大 사도이면서도 저들의 복음 안에 서있다는 단순한 이 한가지를 인해서도 크게 기뻐할 수 있는 너무나 단순한 어린아이 같음을 보는 것이다.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그렇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이 신앙으로 서있는 것을 들으면서 “이제는 내가 살겠다!” 라는 고백으로 감사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올해가 다 가도록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같은 진리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는 고백으로 서로를 향하여 감사할 수 있는 …

2.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인하여 기뻐하고 감격하고 있다. 우리 모드도 서로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란다.

3.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바울은 데살로니까 교회를 마음에 두고 감사를 찾고 있다. 우리의 삶 속에 감사를 찾는 적극적인 감사자가 될 때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감사자가 될 수있을 것이다.

바울은 고리도 교회를 향하여 이것을 당부하고 있다.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후6:13)



Ⅳ. 주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줄 수 있을 때 …(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진정한 감사는 받을 때가 아니라 줄 수 있을 때, 줄 것이 있을 때 감사할 수 있다. 바울의 간절한 기도는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다시 믿음 안에서 보는 것과 그들의 부족한 것을 채워 주는 것이었다.

우리가 서로의 약함을 채워 줄 수 있는 관계임을 감사할 수 있다고 할 때 믿음의 연약함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가 충만하다면 내가 채워 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나보다 연약한 믿음의 사람을 주위에 가지고 있다는 것도 감사할 이유가 되고 또 자신이 부족하지만 대상에게 줄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아직 부족한 믿음이 우리를 인하여 온전케 된다고 할 때도 감사할 이유를 가지게 되는데 사실 교회라고 하는 공통체가 이것 때문에 있는 것이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대 일의 관계이지만 주님 오시기 까지 서로를 믿음으로 채워서 온전케 하기 위하여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완성시키기 위해서 한 지체로서 존재하는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항상 그리워하는 대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으로, 주님도 성도들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데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믿음으로 서 있는 모습을 인하여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주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줄 수 있을 때 감사할 수 있다면 이 중 한가지 정도는 가지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