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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전 13:1~7 2010-10-17
사랑은 …  
바울은 교회 속의 은사의 다양성과 그 은사를 따라서 맡겨진 직임의 차이와 중요성을 다음 14장에까지 다루게 되는데 그 사이에 어떤 은사보다도 중요한 사랑의 은사를 소개하기 위하여 12장을 끝내면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12:31)고 운을 띠운바 있다.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감성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나 기술적으로 풀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가장 사랑의 아름다운 모범이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는 영광과 위엄의 자리에 계시면서 낮고 천한 자리 저주받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것은 세상의 어떤 사랑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사랑의 절정” 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이 구절을 읽고 묵상할 때마다 감동이 되고 로마서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해서 종의 형상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 십자가에서 짊어지신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사랑의 화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바울 사도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고 사랑의 강한 능력에 의해 자신이 사랑의 사람으로 살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사랑의 장을 대하면서 먼저는 사랑의 필요성과 특성을 오늘 먼저 다루고 다음 시간에는 사랑의 위대성과 영원성을 다루고자 한다. 감히 주님의 사랑을 놀랍도록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받은 사랑의 감동으로 사랑이 전달되기를 바라고 기대한다.

사실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깊은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바울의 말씀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7~19)했다.

사실 사랑에 굶주려 있는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늘 제가 이렇게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것 역시 인간적인 사랑에 굶주렸던 제게[早失父母와 흩어져 살았던 형제 간들로 해체되어 버린 가족관계] 넘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도의 사랑을 받게 하셨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줄 수도 없고 사랑할 줄도 모르지만 놀라우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은 감격을 가진 우리들은 이제는 그 사랑을 나누고 베풂으로 사랑을 넓혀가고 키워가는 …



Ⅰ. 사랑이 없으면 …(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없는 인생은 가치 없는 인생이고 육신적인 가치가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불쌍한 한 인생일 뿐이다. 사랑 받음이 인생을 바꿔 좋은 고백은 생명 없는 세상에서 들리는 것들 조차도 아름답기만 하니 분명하다.

먼저는 사랑만이 우리를 사람 되게 하고 우리에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갖게 하는 놀라운 역사를 첫 부분에서 배우게 된다. 이것은 이 문구의 아름다움만큼이나 그냥 거칠 수 없는 사랑이 없는 인생의 비극을 세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세 번씩이나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쓰면서 앞의 12장에서 다루었던 은사의 무의미함을 지적해 주고 있다.

1.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신비하고 자랑스러울까 만 역시 사랑 없이 그것을 하는 것은 구리와 꽹과리와 같이 두들기면 소리 나는 생명 없는 것이 불과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2.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든 신령한 하늘의 신비를 다 이해하고 통달했을지라도 …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도 사랑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두려운 말씀이다.

사실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라고 주님께는 말씀하신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3.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 사실 주는 것 자체는 육신적으로 볼 때는 손해나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 주고 자신의 몸까지 죽음에 내어 주는 일들은 대단한 일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주는 것의 가치를 사랑으로 주는 것과 그냥 주는 것과 크게 다르게 평가를 하고 있다. 주는 것 자체가 사랑이고 헌신임에도 이렇게 구별하는 것이 특이하고 세상에도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주는 데 헌신적인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떠할까? 물론 주님께서 평가하실 것이라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도 진정 사랑 때문에 주는 것일 것이고 세상사람들로부터도 대단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만큼 주고 나누고 있는가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고 주는 것은 의무에 의해서 줄 때는 주님께서는 그것을 절대로 가치 있게 평가하지 않으신다.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자신의 몸까지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자신에게 아무 이익이 없다는 교훈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주님은 의무에 의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우리가 주고 받을 때 이것은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영광과 유익이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 앞으로는 우리의 관계도 이러한 관계 속에서 절대로 의무 때문에 주는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Ⅱ. 사랑은 …(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사랑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갖게 함을 배운다. 여기서도 사랑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앞뒤와 중간에 배열하면서 사랑의 깊이를 말씀하고 있다.

사랑의 적극적인 일곱 속성과 여덟 가지의 소극적인 면을 제시 하는 데 이것을 통해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은 일관되고 이중적이지 않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1. 사랑의 적극적인 면 일곱 가지들.(4f; 6b~7)

“사랑은 ①오래 참고ⓐ, 사랑은 ②온유하며ⓑ 4f, ③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④모든 것을 참으며ⓐ, ⑤모든 것을 믿으며, ⑥모든 것을 바라며, ⑦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6b~7”

이것을 성령의 열매와 함께 비교하는 것도 묘미가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성령의 역사로 사랑의 역사로 나타나는 것들이니 금지할 법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인내]를 세가지로 말하면서[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의 속성이 오래 참음이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1:16)

그 사이 사이에다 2가지씩의 사랑의 속성을 끼워 놓은 상태로 증거하고 있다. [온유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자신 속에 평화를 가진 자라야 비로소 온유할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이 혼란과 방황하고 있는 한 옆에 사람에게 온유를 보일 여유가 전혀 없다.

사랑은 거짓과 어두움과는 역시 상관이 없다. 사랑은 진리인 참과 더불어 지속될 수 있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인 진리의 행함이 곧 사랑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사랑은 긍휼이고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

사랑은 하나님을 믿는 것 같이 모든 것을 믿는다. 누가복음의 탕자의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이것을 배운다. 둘째 아들의 방탕을 알았을 것이지만 그를 믿고 모든 것을 내어줬고 최종적으로는 그러한 아버지를 믿고 돌아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이다.

“모든 것을 바라며(헬, 엘피조(elpizo), 기대하다, 또는 자신하다, 희망하다, 확신하다)” 이것은 의의 소망을 의미한다. 원수의 망함을 바라거나 자신의 형통과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모든 것을 바라며”이다.

2. 사랑의 소극적인 면 여덟 가지들.(4b, 5~6f)

“①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②자랑하지 아니하며, ③교만하지 아니하며4b, ④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⑤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⑥성내지 아니하며, ⑦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5, ⑧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6f”

세례 요한은 대단히 난폭한 사람처럼 보였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3:7; 눅3:7)

그럼에도 날로 자신보다 늘어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기를 제자들이 전해 주는 데도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요3:26) 하지만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29~30)는 고백을 보면서 역사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임을 확신하게 된다.

사랑의 사람이; 자랑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자로 인해서 하기 때문이라는 고백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내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교만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사랑 받은 감격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무례히(헬, 아스케모네오(aschemoneo), 격이 맞지 않게, 사납게) 행할 수 없는 것이다.

나에게 모든 것을 사랑으로 채워주신 주님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챙기지 않는 것이고 사랑의 온유를 맛보았기 때문에 아니 난폭한 자신이 사랑의 온유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성낼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감정이라 했고 사랑 받음으로 심장이 충만해 있는 상태로 악한 것을 생각한다면 그 것 역시 앞과 뒤가 맞지 않는 것이고 거룩한 사랑 속에 갇혀있는 자신이 불의를 좋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모두 사랑 받음이 바탕일 때 가능한 것이다. 사랑 받지 못한 사람은 난폭해 질 수 밖에 없다.

결국 결론은 당연한 것으로 나온다. 빛의 사랑을 받고 맛본 사람은 당연히 어두움 가운데서 행해 지는 일과 행위들을 싫어하고 거부할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번이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맛본 사람은 어두움의 측면의 일들에 몸서리 쳐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2)



나는(우리는) 어떻게 사랑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