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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전 14:1~13 2010-10-31
너희가 다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각종 은사가 풍성했던 고린도 교회는 그 풍성한 은사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분열되고 서로 대적하고 반목하는 이유를 바울 사도는 신령한 것들을 육신의 수준으로 잘 못 사용한 것에서 원인을 지적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신령한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늘 문제는 이 거룩한 기관이 아직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고 분명히 구별되어야 함에도 끊임없이 세상의 방법이나 관습이 교회 속에 흘러 들어오는 것을 방지 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

지난 시간에 가장 귀중한 사랑의 은사를 권하면서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13:8~10)는 말씀을 나눈 바 있다.

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13:13) 하여 은사의 사용의 자세가 사랑이어야 함을 강조한바 있다. 오늘 교회 속에서 은사의 사용에 대해서 조심성을 가르치면서도 시작은 역시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1) 라고 권면한다.

물론 온전한 것, 즉 구원의 계시가 확정되고 정리 되어 각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성경이고 오순절 날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는 이미 이 땅에 세워져서 혼란 없이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고 부분적인 것들은 온전한 것이 되어서 보다 완전한 계시로 주어졌다. 또 육신에 갇혀 사는 부분적인 것들도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날 완전히 변화를 받아 주님의 약속 안에 완성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여기서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예언과 방언의 필요성도 오늘의 교회 속에서는 더 이상 선택의 혼란을 겪지 않아도 되므로 이러한 원리들만 교회 속에 이해하고 적용한다면 일세기의 혼란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앞의 12장에 수많은 은사가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지혜의 말씀을, 지식의 말씀을, 믿음을, 병 고치는 은사를, 능력 행함을, 예언함을, 영들 분별함을, 각종 방언 말함을,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12:8~10)

이 14장에서는 당시에 교회 속에 가장 많은 혼란을 야기시켰을 것으로 여겨지는 예언과 방언의 부분에 집중되고 그러면서도 모든 은사가 그렇겠지만 이 은사들이 개인의 자랑이나 유익을 넘어서서 교회에 유익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이 은사들의 사용의 방법과 유용성을 가르치고 있다.

오늘 우리가 교회 속에서의 직분은 은사를 따라 맡겨지고 사용되는 입장에서도 이런 원리는 역시 같은 이치로 역할하고 움직여져야 함을 배우게 된다. 우리 각자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와 역할을 교회의 덕을 위해 주님의 뜻대로 사용됨으로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교회에는 유익이 되며 일하는 각자에게는 큰 감격과 기쁨이 되는 …



Ⅰ.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은사를 사용하라.(1~5)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오늘 이 14장의 시작도 역시 지난 13장과 연결되면서 바울 사도의 호소는 더욱 간절함을 깨닫는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1f) 이 시작의 내용에서 벌써 이 14장의 바울 사도의 가르치려는 바를 알게 한다.

“사랑을 추구하며[헬, 디오코(dioko), 추적하다, 박해하다]” 라는 말은 오늘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랑을 좇아, 따라 구하라’는 표현이고 “신령한 것들[헬, 프뉴마티코스(pneumatikos), 육체적이 아닌]을 사모하되” 라는 의미는 ‘육신적인 것이 아닌 영적이고 신령한 것들을 향해서 열을 내라’는 의미로 신령한 은사를 구해야 하는 자세를 가르치고 있다.

두 번째 절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2)고 하여 방언이 사람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 대상의 기도임을 말씀한다. 그럼에도 고린도 교회는 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방언을 사람들에게 하려고 했던 것 같고 이것은 신비한 언어를 할 수 있다는 자랑을 위한 것으로 들려지기 때문에 문제였던 것 같다.

특히 여기 v3에서 계속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말이 [덕, 헬, 오이코도메(oikodome), 건축, 건물]이라는 말에 우리의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3)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4)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5b)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12)

여기에 ‘자기의 덕을 세우고’(4f)는 표현이 한 번, ‘사람에게 덕을 세우며 한번’(3),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4b),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5b),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12m)

결국 방언은 자신의 덕을 세우는 것인 반면에 모든 사람이 알아 듣는 예언은 사람들과 교회에 덕을 세우게 되므로 예언을 하기 위해서 애쓰라는 바울 사도의 당부를 읽게 된다. 자신의 자랑거리인 방언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대신에 신앙적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경계를 주고 권면과 위로를 줄 수 있는 예언을 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한 마디로 교회의 유익과 덕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는 당부임을 이해하게 된다.



Ⅱ. 모두가 이해 가능한 말을 하라!(6~8)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바울 사도는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가르치고 교훈 한 사실을 예로 들어 각자의 신앙적 자세를 권면한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6) 어떤 교훈보다도 자신이 경험하고 끼친 영향들이 더욱 호소력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자신이 사람들에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한다면 무슨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가 하는 예를 들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역시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방언으로 자신을 들어내는 이기적인 자세를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을 당부한다.

결국 신앙에 있어서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답게 살 것과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귀중성을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듣는 사람들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더 잘 하는 것이 될 것이다.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7) 이 말씀은 마치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13:1)라는 말씀과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심지어 가장 비극적인 전쟁 조차도 신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더 많은 사람이 상하게 되고 사상자를 낼 수 있다는 비유에서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8) 라고 안타까운 표현을 하고 있다.

결국 영적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듣고 깨달아 경계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받들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데서 바울은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9)고 가르치고 있다.

신앙에 있어서 의사 소통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보다 영적인 것이다.



Ⅲ. 허공에다가 말하는 것처럼, 외국인처럼 하지 말아라!(9~13)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만약에 같은 말을 하면서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마치 듣는 사람이 없는 허공에다 혼잣말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까지 말한다.

세상의 많은 소리는 다 뜻을 가지고 있고 의사전달을 위한 것들이다. 비록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지만 짐승들의 짖는 소리들 까지도 다 자신들끼리는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이런 입장에서 만약에 대상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인다면 마치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과 같은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외국어라고 하는 것이 꼭 다른 언어만이 아님을 실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분명히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연령 계층이나 문화의 차이에 따라서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외국어처럼 생소한 표현들이 많고 그럴 때 우리는 자주 답답함을 느낀다. [허~ㄹ!]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12) 신령한 하늘의 세계를 사모하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더 알아 듣는 말과 서로의 의사소통이 잘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당부이다. 만약에 교회 속에서 어떤 사람이 전혀 다른 이방인의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 역시 주님 앞에 올바른 모습이 아닌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비록 주님께서 알아듣지 못할 방언을 주셨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통역하는 것까지 구하는 자세야 말로 교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13) 이런 여유 속에 서로가 통하고 더불어 아멘 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다면 꼭 언어가 아닐지라도 이방인과 같은 감정을 느낄 정도로 고독함을 느낀다면 결코 잘된 것은 아닐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열어놓고 생각을 열어놓고 하나님의 뜻과 교제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

오늘 제목으로 잡았지만 본문에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1)거나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5f)는 표현이 두 번씩이나 쓰이고 있음을 읽게 되는데 ‘왜 예언을 해야 하는가’는 그것이 교회의 유익이 되기 때문임을 보게 된다.

결국 모두가 서로가 알아듣는 말을 하고 교제를 위하여 애쓰는 것은 우리를 같은 피로 사셔서 같은 공동체 속에 있게 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선하신 뜻임을 잊지 말고 교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