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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눅 7:41~50 2013-09-22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신 후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에 다시 고기잡이 하러 가있는 베드로에게 오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21:15) 물으셨던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오셔서 같이 물으신다면 나는 과연 어떤 대답을 드릴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고 그러한 내용의 실제적인 모델이 오늘 읽은 말씀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의 이야기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의 이야기가 3복음서에 기록되어 있고[마26:6~13; 막14:3~9; 요12:1~8] 오늘 우리가 읽은 이 기록은 오직 이 누가복음에만 기록되고 있는 내용이다.

주님을 식사에 초대했으면서도 기본적인 예우도 해 드리지 않은 바리새인인 시몬이라는 사람의 식사 자리에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로는 그 동내에서 가장 험한 죄인이라고 알려진 한 여인의 주님께 대한 사랑이 이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오늘도 주님을 사랑 하노라고 하면서도 이 사람처럼 주님을 대우하는 우리들에게 귀한 교훈의 모델이 되고 있다.

오늘 나(우리)의 주님을 사랑함이 과연 이 시몬과 여인 두 사람 중에 어느 사람과 닮아 있는가는 영생을 약속 받은 사람들로서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주님께서는 기도의 모델도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기도 하셨다.(눅18:9~14)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은 각각 다를 수 밖에 없고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나타나는 행동은 언제나 각자의 마음과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바른 선택을 위한 교훈을 주시고자 하신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생각한 후에 우리 각자의 주님께 대한 사랑의 모습도 바로 판단하고 이해해서 사랑한다면 더욱 사랑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회개하는 사랑의 사람들 되시기를



Ⅰ. 비유를 드셨다.(41~43)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사실 여기의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라는 데서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렵지 않은 비유였을 것이다. 한 사람은 일년 반여를 먹지도 않고 쓰지도 않고 모아야 가능한 액수이고 또 한 사람은 두어 달 가까이 모은 액수로 큰 차이를 가지는 액수의 돈이다.

사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사랑의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로 부모님이 아니면 주변 사람들과 사회에 빚지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얼마가 되었든 물질이나 가지고 있는 지식도 어느 것 하나 없이 각자는 빈손 쥐고 알몸으로 이 세상에 왔기 때문이며 우리 각자는 삶의 상황에 따라서 빚을 진 액수가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6:12에 보는 거처럼 [죄]가 [빚]과 같이[헬, ofeilema]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과 사람의 죄는 절대로 스스로 씻을 수 없고 하나님께로부터 탕감 받아야 하는 즉, 은혜로 처리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 말씀은 주님을 청한 시몬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39)는 생각을 읽으신 주님께서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자 “선생님 말씀하소서!”라는 이 사람의 반응에 대한 가르침이다.

빚을 갚을 수 없는 사람이 탕감을 받았다면 ‘많이 받은 사람이냐, 적게 받은 사람이냐?’는 질문이셨고 이 바리새인 역시 자신의 행동이나 자세에 관계없이 머뭇거림 없이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43)라고 말씀 드렸고 주님께서도 “네 판단이 옳다.” 말씀하신다.

사실에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과 다르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믿는 사람으로 영적인 일을 먼저 해야 되는 것이 맞는 줄 알지만 …” 그렇기 때문에 [판단]보다 중요 한 것은 그 판단에 따른 바른 [행동]이다. 바리새인은 이런 바른 판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대한 대우는 옳지 않게 하였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 여인의 희생에는 정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계속 가르치는 것은 “그 바른 판단대로 행동하라!”는 도전이다.



Ⅱ. 행한 것과 그렇지 않음을 비교하신다.(44~46)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주님께서는 여기서 판단과 행동이 다른 이 두 사람을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우리에게 모범을 주고 계신다.

이 누가 복음 조금 뒤 10장에서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고 있는 율법사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10:28)고 말씀하신 것처럼 신앙의 중요한 점은 생각하고 알고 깨닫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삶에 옮겨지기 전에는 별 의미가 없음을 가르치신다.

주님께서는 시몬의 올바른 판단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바른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왜 현실 속에서 생각과 판단대로 행하지 못하여 그가 정죄한 죄 많은 이 여자보다 못한가를 지적하신다.

주님께서는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①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라는 도저히 선생에 대한 대접을 하지 않은 시몬에게 그가 정죄하고 있는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라고 이 바리새인이 하지 않은 것을 대신한 이 여인을 오히려 칭찬하신다.

손님을 청해 놓고도 유대인의 관례적인 인사조차 하지 않은 시몬에게 “너는 ②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라고 지적하신 후에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라고 칭찬하신다. 마지막으로는 “너는 내 ③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라고 안타까워하신 후에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고 만족해 하신다.

이러한 세가지는 단순한 순서의 나열이 아니라 누가 만의 독특한 표현법으로 일반적인 것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덜 귀중한 것에서 귀중한 것으로 이끌어 가는 논리를 엿볼 수 있고 이것은 오늘 우리게 대한 적용도 마찬가지이다.

손님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하인들이 해 주는 것임에도 시몬은 하지 않았고 이런 것에서 마음을 쓰지 않은 자세는 당연히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는 입맞춤도 없었었고 가장 귀중한 의식인 기름부음도 하지 않은 것이다.

오늘 우리도 죄 씻음에 대한 감사가 없다면 자신의 시간을 드려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곳에 참여할 수 없고 당연히 그러한 자세는 귀중하게 여기는 시간과 물질을 주님을 위해 드릴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마지막을 예언하시면서 그 때 이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자신에게 한 것이며 하찮게 생각하고 하지 않은 것에 곧 자신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 말씀하신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5)

어쩌면 이만큼 생각과 판단의 실천이 중요함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믿음의 실천이 중요함을 가르치고 계시는 것이다.



Ⅲ. 사랑과 그렇지 못한 결과를 말씀하신다.(47~50)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받은 것이 많고 적음에 따라 관계의 깊이가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인데 하나님과 인간 관계에서도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인간적인 입장에서 말씀하신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으로 인해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라고 선언하신다. 물론 이러한 표현 때문에 49절에 보는 대로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리고 비아냥거리는 표현을 다른 데서도 볼 수 있다.(마9:3; 막2:7; 눅5:21)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실천이 사랑의 깊이에 근거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쉽게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적다, 크다 말하는데 주님께서는 이것을 그대로 표현하고 계신다. “…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b)

이런 이유에서 성경 속에 큰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역시 목숨 바쳐서 사랑하는 것을 본다. 구약의 다윗이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고[목동, 간음, 살인 등등에도 불구하고] 신약에서는 바울 사도가 그렇다.[딤전1:15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오늘 우리 자신은 어떤가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의 생명도 살려주면 [生命의 恩人]이라고 하며 평생을 섬기는 사람들을 더러 보는데 이것은 적어도 육신의 생명에 국한함에도 그렇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 모두의 영원한 생명의 은인이시다. 그것도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셨으니 생명의 은인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 마을의 모든 사람에게 가장 흉한 죄인 취급을 받던 이 여인은 자신의 그런 죄 때문에 여인으로서의 모든 자존심을 다 내어 던지고 주님께 눈물과 헌신을 드렸고 주님께서는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48) 선언하고 계신다.

이렇게 죄 사함 받은 여인에게 주님은 구체적으로 선언하신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50) 사람들의 편견과 눈치 속에서도 주님을 향한 긍휼의 간청이 받아들여졌고 주님께서 분명한 구원을 선언하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 그리고 구원 받은 결과가 바로 “평안히 가라!”는 것이었다. 사실 죄로 인한 자책감은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는 것 못지않게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인생이 괴로움뿐이었을 것이지만 이러한 비극의 인생에게 주님의 평안이 선포 되었고 이 여인은 그 때까지 맛볼 수 없었던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평안을 맛보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 믿음으로 사는 우리 또한 다르지 않다. 적어도 주님의 은혜를 맛본 사람이라면 이 여인 정도의 감격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믿음의 사람들의 이러한 사죄의 감격은 한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평생을 지속할 것이고 마지막 영원 속에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이방인이요 하나님도 없던 우상숭배자의 나라,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알지 못했던 이 대한민국의 가련한 죄의 종이었던 우리, 수없이 마귀로부터 참소 받았던 우리 각자는 이 예수 앞에 왔던 여인보다 결코 낳은 것이 없는, 우리 각자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어찌 이 여인의 그것만 못하겠는가!

오늘 주님께서 “너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너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시는 주님의 감격스런 음성을 들을 수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