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눅 8:11~15 2013-12-01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할 때 이것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는 이 역사 속에 또 우리 모두에게 끊임없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뿌려지고 있다. 농부들이 씨를 뿌려 가꾸어 다시 열매를 거두는 일보다도 진리의 씨앗인 복음은 결실이 더 적은 것이 사실이고 오늘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라고 열매 맺기를 바라지만 농사에 자연재해보다 영적인 성장과 결실은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땅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농사 일은 절기에 맞게 씨를 심고 잡초를 뽑고 걸음을 주면 가끔은 태풍이나 폭풍우로 재해를 당하기도 하지만 다른 이변이 없는 한 결실의 때에는 그런대로 열매를 주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영적인 일이 농사 정도만 같아도 좋겠지만 그렇지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람과 결실에는 시샘을 하는 세력들에 의해 방해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사람들보다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말씀을 듣고 읽는데 우리의 삶에 말씀의 열매가 없다면 역시 들음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런 부분을 찾아 해결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주님과 자신의 안타까움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본래 천국의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신 병행구절인 마태복음13:18~23의 말씀을 함께 보도록 하겠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 있어서 본문의 네 가지 토양 중에 반드시 한 가지에 해당될 것인데 과연 어떤 자세로 말씀을 받고 소화하며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점거하여 먼저는 하나님 아버지 앞과 나 자신과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Ⅰ. 뿌려진 말씀을 빼앗기는 자가 있다.(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마13:19)

영적인 요소로 적극적인 방해를 받는 것을 이르는 가장 심각한 말씀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간다는 표현인데 그 이유를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우리에게 남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경계의 말씀이다. 누구에게보다도 이런 비유의 대상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전혀 그 씨가 남아있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악한 세력에 의해서라는데 두려움과 안타까움을 가져야 한다.

생명을 가진 씨는 심어진다면 반드시 싹이 나고 떡잎이 자라 잎이 나서 자라고 꽃이 피어 열매 맺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자라지 못하도록 빼앗아 가려는 악한 자 마귀[막4:15-사탄]의 사악한 생명의 씨앗의 탈취를 우리는 막아야만 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귀한 독생자를 이 어두움의 역사 속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제물을 삼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그럼에도 바른 교훈인 생명의 말씀에서 되도록이면 때어 놓으려는 간교한 수단에서부터 들은 말씀조차 강탈하여 자라지 못하게 하고 열매 맺지 못하게 하려는 악한 자 마귀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누가복음에서 길가에 뿌려진 씨를 해설하시기 전의 비유말씀에서는 “…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8:5b) 하였는데 공중의 새는 그만큼 흔한 것을 의미하는 데서 말씀을 빼앗으려는 세력들이 공중의 새처럼 흔하다는 말씀에 경계를 가져야만 한다.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주신 경계를 생각나게 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말씀을 잃지 않으려는 싸움은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말씀을 빼앗기고도 별로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이다. 적어도 오늘 이순간부터는 말씀을 빼앗기는 것이 곧 생명을 빼앗기는 것이라는 의식으로 여러분의 심령에 뿌려진 씨를 지키는 생명의 수호자들이 되시기를 …



Ⅱ. 뿌려진 말씀이 막히는 자가 있다.(13~14)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세상적인 요소로 역시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말씀은 세상에서 육신의 삶이 가로막는 영적인 안타까움을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하시는 내용이다. 여기 누가복음에서는 ‘바위 위에[헬, petra]’ 라고 하였지만 병행구절인 마태나 마가는 다 같이 ‘돌밭[헬, petrodes]’으로 기록되고 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13:20~22)

①바위나 돌밭 같은 마음이 문제이다.(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

일반적인 경계는 흙 심 없는 바위나 돌밭은 굳은 마음 밭을 비유하기에 무리가 없고 굳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것은 흙덩이에 짓눌린 씨앗과 같이 생명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사람의 육신적인 구성요소가 흙이라는 데서 육신이 영혼의 짐이 되는 일이 자주 있는 것처럼 영으로 육신을 지배하지 못하는 폐단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여기의 표현을 보는 대로는 ‘기쁨으로 받으나’ 오래가지 못하는 이유를 “뿌리가 없어” 라는 표현으로 마치 밭의 어느 부분에 밑에는 돌이 갈려있고 흙 살이 깊지 못해 곡식이 나기는 하지만 조금만 가물어도 시들고 마는 척박한 농토로 비유하면서 사람의 마음 밭을 적절히 말씀하고 계시다.

기쁨으로 말씀을 듣는 것은 첫째로 중요하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되고 말씀에 대한 기쁨과 감격이 일상의 삶에까지도 평강과 은혜를 누리게 하는 깊은 신앙은 반드시 필요한 말씀의 진전일 것이다.

바위 위에건 돌밭이건 씨를 받을 때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들은 말씀을 인하여 겪게 되는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씨를 뿌릴 때는 흙 심이 깊은 좋은 땅이나 바닥에 돌이 깔린 척박한 땅이나 차이가 없다.

“시련을 당할 때”(13b)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마, 막) 즉 신앙으로 인한 어려움이 오게 되면 그때는 ‘배반하는 자’ ‘곧 넘어지는 자’로 돌아서게 된다는 것이다. 역시 깊은 신앙과 옅은 신앙의 차이를 잘 비유해주고 있는 모습이다.

이래서 신앙의 사람이 자신을 신뢰하는 것보다 은혜 때문이라는 확신과 고백이 중요하다. 자주 인용하는 말씀이지만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②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이 문제이다.(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

사실 이런 문제가 가장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믿음생활 하는데 어려움이 된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사는 이상 이런 상황에 노출되지 않는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여기에 대한 장치도 분명히 주셨으므로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신뢰한다면 여기에 대한 보호도 확실히 누릴 수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서도 이런 문제들이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잃게 만드는 요소들로 작용하고 있을지 모른다. 몸은 이 자리에 와 있지만 육신의 많은 문제(죽음, 질병, 경제, 관계, 진로, 가정)들이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생명의 은혜를 자라지 못하게 방해할 수도 있다.

예전에 먹고 살기 어려울 때는 없었던 문제들이다. 과거에는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 되도 감사해서 충성하고 주님을 깊이 사랑했는데 낳아지면 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역시 그렇지 않다고 하는 데서도 안타깝게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일 수밖에 없다.

생활이 편리해지고 복지를 추구하게 되면서 과거에는 그다지 문제되지 않았던 것들이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생명의 씨앗인 말씀을 가로막아 결실치 못하게 하는 문제가 이 시대에 너무나 사실적인 문제가 되는 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주님께서는 직접 약속하시기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말씀하셨다. 이 시간 행여라도 주님의 말씀을 가로막는 요소들이 있다면 주님의 약속을 확신하고 자유 할 수 있기를 …



Ⅲ.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하는 자가 있다.(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13:23)

사실 인간 관계에서도 착하고 좋은 마음은 사람들의 환심을 산다. 말씀 앞에서도 가치가 있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 하였다. 마치 곡식을 갈려고 흙덩이를 다 부수고 돌을 골라낸 부드러운 흙 살 같은 마음은 생명의 말씀을 받는 데도 가치가 있다고 가르치신다.

“착하고[헬, kalos, 아름다운, 가치 있는, 덕스러운, 좋은 정직한] 좋은[헬, agathos, 악에 반대하는, 선한] 마음[하나님을 모신 자리]”이란 사람에 있어서는 제일 좋은 표현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씻겨진 회복된 영의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열매 맺는 사람의 자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 옥토 같은 자세로 말씀을 듣고 거기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지키는 모습이다. 자신의 인생의 경험이나 세상의 지식보다도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려는 자세에서 벌써 하나님의 평화와 능력은 함께하실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또 하나의 희생이 함께 하는데 그것은 “인내[헬, hypomone, 밑에 머무르다. 압력을 견딘다. 겸손하다]로 결실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들은 바 말씀이 결실할 때까지 난관을 견디며 이겨내는 모습이다. 이러한 자세 자체가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가능한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을 움트게 하고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은 자신에게든 다른 사람에게든 거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도 또한 사람의 노력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만으로 불가능하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함으로 가능할 것이다.

오늘도 말씀의 씨는 계속 뿌려지고 있다. 그러나 자라서 열매 맺기 위해서는 악한 세력에게 말씀을 빼앗기지 않아야 하고 거친 돌작밭 같은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정리하고 말씀을 듣는데 가로막는 세상의 염려나 재물의 유혹과 향락의 잡초들을 걷어내야만 한다.

아름답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삶에 실천하면서 열매 맺기까지의 온 갓 스트레스와 같은 어려움을 기도로 맡기고 견디며 겸손으로 말씀을 순종할 때 100, 60, 3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