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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눅 15:11~16 0000-00-00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어느 시대나 자녀를 신앙으로 이끄는 일은 어렵지만 지금 만큼이나 힘겨운 때는 없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성경은 늘 하나님을 섬기는 부모에게 신앙교육을 최고에 위치에 두도록 당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6:4~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주신 이 비유의 교훈 속에서도 남다른 사랑과 인내를 가진 아버지 즉,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말씀하고 계시지만 완악하고 어리석음을 거르지 않고 그대로 말씀하고 계심을 읽는다.

성경 속에서의 많은 믿음의 조상들조차도 하나님께 순종하고 잘못되면 회개하면서 주님의 다스리심을 자신들은 철저하게 받아 들이고 있지만 자녀들에게는 철저하지 못해서 다음 세대가 은혜를 잃는 모습은 우리가 최근에 상고하고 있는 역대기에서조차 너무나 흔한 모습으로 본다.

사무엘 시대에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있던 엘리의 모습은 자신의 후손은 물론 이스라엘 전체에게 까지 비극을 가져오는 모습을 사무엘 상 2장에서부터 기록되면서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12) 하였고 그들의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범죄 사실을 기록하면서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17)고 이유를 증거하고 있다.

늙은 엘리 제사장은 23~25f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였음에도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25b)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다시 V29f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라고 하시면서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30b) 말씀하셨다.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삼상3:13b~14)고 선언해 버린다.

삼상8:1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V3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되어 있고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이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5f)

다윗 역시 압살롬(삼하14:25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과 아도니야(왕상1:6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같은 준수한 아들들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분명히 자녀교육은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과제이고 신앙으로 키운다고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과제이지만 오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당부와 이 주님의 교훈을 통해서 우리가 할 바를 다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심정을 본받을 뿐 아니라 나타나는 부정적인 일들에 너무 낙심치 말고 안타까운 이 교육의 암흑기를 잘 감당하는 …



Ⅰ. 부모의 가르침의 권위는 한계가 있다.(11~12)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어찌 보면 이 두 아들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메시야를 보내시기 위하여 먼저 택하신 이스라엘과 모든 구원의 대상인 이방인들을 비유하는 교훈으로도 들린다. 마태복음21:28~31 두 아들의 비유[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 맞아들-가겠다→가지 않고; 둘째-실소이다→후에 뉘우치고 감]와 비슷한 것으로 봐서 그렇게 보인다.

여태까지의 은혜를 마음에 두지 않고 자기 권리만 주장한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둘째는 자기 분깃을 요구하는가 하면 첫째 아들도 나중에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29f)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12b) 어찌 보면 낳아서 여태껏 키워주고 교육시켜주고 한 아버지가 작은 아들의 요구 때문에 자신의 소유를 두 아들에게 나눠주고 만다.

나신의 분깃을 다 챙겨 나가는 둘째 아들을 말리지도 못하고, 객지에 나간 아들이 행여 돌아올까 속을 끓이며 기다리는 것 만이 아버지의 할 수 있는 전부였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둘째가 자신의 것을 탕진하고 돌아오리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부모는 언제나 자식을 생각하고 속으로 고통 하지만 자녀들은 그것을 결코 알아주지 못하고 자신이 같은 부모가 되었을 때 알게 되지만 이미 그 때는 너무 늦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과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빈손 쥐고 이 땅에 태어난 각자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시고 지식을 갖게 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필요를 다 주심에도 언제나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과 다름이 없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과 부모로부터 이렇게 받았기 때문에 속이 상해도 그것을 참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않으신 아버지께 무엇을 달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지금 우리 자신의 모습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늘 져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당하면서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Ⅱ. 자식은 부모를 떠나봐야 귀함을 알게 된다.(13~14)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사실 정신 차리지 못한 자식에게는 재물을 줘도 그에게 오래 머물지 못한다. “며칠이 안 되어…” 자신의 소유라고 확신한 재물을 조금도 남겨두지 않고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자신의 의지를 펼치게 되는 데 이것이 그렇게 위험한 것을 절대로 모르기 때문에 이럴 수 있었을 것이다.

“먼 나라에 가”는 익숙하지 못한 상황과 시간임을 비유하고 있는 표현이다. 깨닫지 못하면 모든 것은 자신의 생각대로 되어 질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깊이 헤아린다면 하지 않아야 할 일을 너무나 쉽게 감행해 버리는 것이 어설픈 우리 인생들이다.

다음 단계는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라는 표현으로 이 아들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는데 “허랑방탕”이 과연 무엇일까! 이것은 사실 ‘길들여지지 않은’, 또는 ‘제어되지 않는’ 야성의 상태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미약하고 작은 것은 제어되지 않아도 별로 위험하지 않지만, 제어하지 않으면 무서운 것은 강력한 힘을 가진 어떤 것이다. 요즘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고 있는 [원자력]이라는 것이 제어되지 못하면 엄청난 사람들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우주 가운데 제어되지 않으면 가장 위험한 존재는 사실 [사람]이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은 처음부터 제어봉을 주셨는데 에덴에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였고 온 인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제어봉으로 주셨고 더 구체적으로는 주체할 수 없는 죄를 다스리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8) (눅14:27 -는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막8:34; 눅9:23)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14) 이 세상은 사실 내 것 없으면 크게 흉년 든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둘째는 사실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이 얼마나 풍족한 것을 예전에는 미쳐 몰랐던 것이다.

사실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거하는 사람들은 다윗과 꼭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2)

결국 아버지 곁을 떠나 봐야 아버지 집에 풍족(靈肉)함을 비로소 깨닫게 되기 때문에 때로는 아버지 곁을 떠나보는 경험이 필요하기도 한 것이다.

행여라도 오늘 이 둘째처럼 방탕하고 싶은 자녀들이 있다면 부모의 한계를 느끼는 안타까움도 있겠지만 떠난 결과가 결코 행복함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너무 마음 상하지 않고 작게나마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해보는 …



Ⅲ. 방탕은 세상의 종 노릇밖에 없고 만족이 없다.(15~16)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결국 자신의 왕국을 꿈꾸며 나갔던 둘째는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15f) 라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붙여 산다.’는 모습은 무엇인가! 종 노릇이다. 자신의 영광과 존귀와 소유는 다 잃어버리고 타국의 종으로 저락하고 만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이 에굽의 종이 되었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독립선언을 하여 나가면 세상의 종 노릇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15b) 사실 아버지의 명령도 싫어서 집을 나간 이 둘째 아들은 알지도 못했던 사람에게 종 노릇하며 일 중에서도 선택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정하게 여겨지는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비참한 상태가 되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 다음 단계는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6) 여기에는 이미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부정하게 여기는 짐승의 모습으로 전락해 버린 비참한 인생을 보이고 있다.

나중에 깨닫기는 하지만 품꾼들조차 배터지도록 먹을 수 있는 진수성찬이 언제나 넘쳐나는 자신의 아버지 집의 온 갓 좋은 음식이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말씀을 맺으면서 몇 가지 정도의 교훈을 생각했으면 한다. 오늘 우리 자녀들의 만족과 행복을 모르는 안타까움이다. 스스로 생겨나고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배운 것처럼 영적으로는 물론이고 세상적으로도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자녀들이 있다면 오늘의 교훈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으면 한다.

또 부모의 입장에서는 본문에 나오는 두 아들 모두가 의미가 있다고 이해될 수 있었으면 한다. 자신의 것을 챙겨서 다 탕진해버리고 타국에서 알거지가 되어 종노릇 한 경험이 없었다면 과연 이 아들이 아버지 집의 행복을 깨달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집에서 아직까지는 그래도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는 큰 아들도 모양으로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지 사실에 있어서는 방탕하고 돌아온 둘째만큼도 못한 모습이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29) 라고 불만만 가득한 모습이다.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을 자랑한다.

그리고 돌아온 동생을 정죄한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30f) 자신이 보지도 못할 일을 상상으로 정죄하는 무서운 율법주의자일 뿐이었다.

오늘 자녀교육에서 우리는 본문의 아버지의 사랑과 기다림의 모범을 통해서 자녀를 교육하고 부모의 권위의 한계를 인정하고 안타까움이 없지는 않겠지만 기도로 맡기고 주어진 한계까지만 감당해야 한다.

만약에 신앙에나 삶에나 독립하려는 둘째 아들 같은 자녀가 있다면 빨리 깨달아야 한다. 이 둘째처럼 빨리 깨닫는 것이 복이다. 만약에 우리가 서두에서 언급했던 신앙의 지도자들의 자녀들처럼 멸망의 자리에서 깨닫는다면 인생과 영원을 망칠 수도 있다는 경계를 갖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