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골 3:5~11 2018-03-04
죽이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모든 죄인을 살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와는 정 반대되는 ‘죽이라’는 명령이 주어지고 있다. 신앙의 사람들이라면 죽여야 할 것이 분명히 있고 그것은 자신의 육신적인 행동이나 습관 등 하나님 영광의 나라에 합당치 않은 것들이다. “죽이라!”고 할 때 그것은 역시 영원한 영광에서 없어져야 할 것들과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죽은 영혼을 살리는 데는 최선을 다하여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육신적인 요소들 죄와 관계된 세상적인 모습이 죽지 않고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주님의 나라에 각자가 갈 때까지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합당치 않고 다른 이들을 실족시키는 죄의 삶을 끊임없이 정복해 나가는 것이 신앙의 삶이다.

나를 죽이고 남을 살리는 것이 주님께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다. 예수께서는 계명의 말씀뿐이 아닌 자신이 이러한 구원을 위한 모범을 친히 보이셨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는 선언이고 주님께서 오셔서 이 말씀을 실증하셨다.

그럼에도 주님을 따른다는 나(우리)는 여전히 내가 아닌 주님과 다른 사람들을 죽여가면서 나를 살리려고 복음을 거꾸로 살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하나님 보시기에 안타깝고 가련한 나를 위하여 오늘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죽었듯이 너 자신을 죽여서 너도 영원히 살고 다른 사람을 살리라!”고 오늘 명령하신다.

내가 살아있는 한 여전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으므로 많은 주변의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역할만 하게 될 것이고 주님의 희생은 나와는 상관없는 역사가 되고 말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의 최고를 바라고 찾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과제이지만 우리가 이 골로새서 3장을 시작하면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1~2)는 바울의 당부에 합당한 위의 것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달라야 한다.

다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격려하고 돌보는 것 못지 않게 우리 각자의 천국을 향해가는 여행에 합당한 나그네로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살아나려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대되는 속성들을 죽이며 살아가야만 한다.



Ⅰ. 죽여야 할 것들,(5~7)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믿음의 사람들이면 누구나 고백해 오는 갈라디아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때로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 죽었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나, 당연히 시체로 무덤에 누어 있어야만 할 나 자신이 불쑥 불쑥 무덤 밖으로 튀어나와 나와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한다.

바로 앞의 3:3에서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한 것처럼 죄에 대하여나 세상에 대하여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또 다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5f)는 것으로 봐서 아직 죽여야만 할 천국에 합당하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이런 당부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살아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나열하고 있다. “…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5b)라고 구체적으로 지적을 하고 있다.

‘음란[πορνεία, 비정상적인 性關係]’ ‘부정[ἀκαθαρσία, 불순, 불결]’ ‘사욕[πάθος, 정욕, 색욕]’ ‘악한 정욕[κακός 무가치한, 악한, 해로운, ἐπιθυμία, 동경, (금지된 것을)욕망, 갈망]’ ‘탐심[πλεονεξία, 사기, 강탈, 욕심]’ 이런 항목들은 대개 감춰진 내적인 것들로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 하나님을 부정해 버린 삶 속에서 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런 것들을 치워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이루어질 수 있음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다음절에서는 좀더 적극적으로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6)고 경계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며 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는 것은 어린아이라도 다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반대로 이런 것들이 나타난 곳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로 유황불이 내려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 같은 죄악의 도성들이었기 때문에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6)는 말씀은 당연한 두려운 경계이다. 오늘 이런 항목들이 우리의 삶에 살아있다면 은혜와 복이 아닌 심판의 대상에게 나타나는 진노가 임한다고 하면 당연히 없어져야 하는 항목들이다.

그럼에도 이것들이 또한 생소한 것이 아니었음을 다음 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7) 이것이 우리가 과거에 주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 속에 묻혀 살 때에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즉, 불신자들에게나 있을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럼에 이 명령은 이제는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주고 있다.

사실 이런 모습들이 좋은 상황 속에서나 평상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각자의 마음이 상하거나 원하는 것이 아닐 때 순간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경계해야 하는 것은 극단적인 상황이나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이런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 나의 사실적인 모습이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진노의 대상이 죽고 말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나로 더불어 사신다면 같은 상황일지라도 그런 돌발적인 행동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신앙하는 기간이 오래된 것은 이런 과거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행동을 죽이는 기간이 많았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과거 죽이지 못한 자아(自我)가 튀어나오는 일이 아직도 나타난다면 자신의 죽음을 의심해 보고 주님께 죽여달라고 회개하며 매달려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쓴 열매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 진노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Ⅱ. 벗어야 할 것들,(8~9)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죽을 뿐만 아니라 벗어 버렸어야 할 옷을 그대로 입은 체로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서는 안 된다. 이런 항목들은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옆의 지체와의 관계성의 문제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3:27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는 귀중한 신앙적 논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당연히 우리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하는 약속을 가지고 있음에도 아직도 죽어야 할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옷 입은 것이 아니라 세상 그대로를 옷 입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벗어야 할 의복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모자라거나 빗나간 것은 아니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8f) 아직도 미련 때문에 라도 걸치고 있는 세상적인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교우 한 사람이 예배를 드리러 오면서 빨지도 않고 남루한 더러운 옷을 입고 왔다면 ‘어째서 저런 옷은 입고 예배를 드리러 왔을까!’ 생각하면서 아마도 잘 아는 관계라면 이유를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입은 영적인 옷을 불꽃 같은 눈으로 보고 계신 주님께서 보실 때에 나는 과연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주님께서 보실 때에 벗어야 할 옷을 입고 있지나 않은지 자신들을 들여다 봐야 할 것이다.

이제 벗어버려야 할 옷들의 목록을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8b) 이 항목들 역시 옷이라고 보기에는 아닌 것 같은데도 믿음의 사람에게 이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벗어버려야 할 옷으로 취급되고 있다.

‘분함[ὀργήν, 흥분으로 난폭해진]’ ‘노여움[θυμός, (거친 숨을 쉬며) 격노, 격분]’ ‘악의[κακία, 악한, 비행, 원한, 해악, 무가치 한]’ ‘비방[βλασφημία, 중상, 참람, 악담, 조롱]’ ‘부끄러운 말[αἰσχρολογία, 추악한, 추잡한, 외설적인]’ 이 모든 것들은 역시 요즘 흔히 어린 학생들에게서 조차 들을 수 있는 거룩과 반대되는 하나님의 경외감을 갖고 있지 못한 육의 사람들의 언어 활동으로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여 한마디로 표현하면 상대를 상하게 하는 말들이다.

로마서에 보는 대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롬1:29)

두려운 것은 이 모든 단어들 앞에 붙여진 ‘τὰ πάντα,’로 ‘이 모든 것’이다. 이런 비슷한 말 즉, 상대를 상하게 하는 말의 표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이다. [살전5: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적어도 죄를 씻음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를 옷 입은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나를 대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9) 이 말씀은 이미 앞의 죽여야 할 항목들의 말미에 말하였던 표현과 연관된 표현이다.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7) 이 역시 옛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진노의 대상으로 있을 때의 행동을 버려야 함을 명령하고 있다.

여기서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진리를 바탕하고 사는 그리스도인 간에 서로 거짓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우리끼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중보자로 세우고 나누는 대화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는 자신이 거짓된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행하는 경우도 있게 되는데 이것은 물론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이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12:3)는 수치스러운 모습의 공개를 의식하고 두려워해야만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조금은 소극적으로 이런 당부를 하고 있는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라고 하였지만 같은 옥중에서 쓴 에베소서에서는 좀더 적극적으로 당부하는 명령을 듣게 된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29~32)

우리 각자가 죽이고 벗어야 할 것들을 아직 가지고 있다면 주님을 의지하고 이런 명령을 순종하여 광명한 영광의 나라에 합당하도록 변화 받는 …



Ⅲ. 우리가 입은 것,(10~11)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입은 옷은 우리의 외적인 모습으로 신분과 지위를 나타낸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 얼마나 귀중한 옷인가를 다시 확인해 주면서 죽이고, 벗고, 입어야 할 사람의 범위를 마지막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죽이고 벗어야 할 것들과 비교될 수 없는 우리의 입은 옷을 확인해 주고 있다. ‘왜 합당하지 못한 옷을 입을까!’ 그것은 틀림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의 귀중성을 모르거나 이미 준비해두고 있으면서도 어디에 있는가를 알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바울은 우리게 확인시켜주고 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10f) ‘너희가 새 사람을 입을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새 사람을 입었으니 …”라고 우리가 잊어버리거나 감춰 두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최상의 옷이 무엇인가를 확인 시켜주고 있다.

우리에게 새로움을 입혀주신 대상이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10m) 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시고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구세주인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최고의 가치로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영광을 입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이렇게 입은 새 사람의 내용이 어디에까지인가를 일깨워 주고 있는데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10b) 이것은 다른 표현으로는 가치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었다는 표현으로 바울의 빌립보서의 내용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3:7~9f)

다메섹에 가기까지는 최고의 존경 받는 종교지도자로 이스라엘의 종파의 양대 산맥이었던 바리세파의 최고의 지도자까지도 꿈꾸었던 바울 자신의 목표와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면서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바울뿐이겠는가! 우리 또한 같은 경험을 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10b)는 표현은 가치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고백이다. 그 동안 내가 되고자 했던 것과 가졌던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완전히 뒤집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번에 경주에서 모였던 ‘어부들의 모임’에서 19살짜리 아직 어린 고등학생이 성경과 바른 신앙을 찾고 자신의 삶을 정신지체장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결심하게 되었다는 놀라운 고백을 들었다. 아직 젊은, 아니 아직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미래의 꿈이 또 바뀔 수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떻게 고등학생의 신분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여기 마지막에 거론하는 것은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제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만 하면 인생이 뒤집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성경을 한번만 바로 읽어도 인생이 바뀔 수 있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11) 이 인종의 나열은 인종뿐만 아니라 종교와 모든 신분과 직업을 망라한 것이다.

앞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까지는 다른 성경들에서도 볼 수 있는 표현들이지만 ‘야만인[βάρβαρος, 외국인, 원주민 NT에 6번]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스구디아인[Σκύθης, 가장 미개한 야만인으로 로마시대에 검투사로 취급되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렇게 문명과 미개한 사람과 같이 출신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만나기만 하면 인생이 바뀌고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는 사실들이지만 중요한 것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기까지 하고 있는 우리 각자의 문제가 어쩌면 더 중요하다.

“…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11b) ‘만유[πᾶς, 모든 것, 온, 전체]’는 어떤 것도 제외되지 않는 전체 모두를 의미한다. 특이 여기 맨 앞에 ‘오직’이 중요하다.

여기서 의미는 더욱 분명해 진다. 인종이나 종교나 계급이나 직업이나 신분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기만 하면 그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어져 버리고 다른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전락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과거의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것들은 다 죽게 되고 뿐만 아니라 과거의 세상 속에서 나를 치장했던 과장되기까지 한 옷과 같은 겉치레는 벗어 던지게 되고 새사람을 입은 그리스도의 형상만이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나는 과연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