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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12:1~2 2018-03-18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 중에서 무엇을 가장 기뻐하실까? OT의 미가 선지자도 스스로 이런 질문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6~8)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것을 가장 기뻐하실까?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주저 없이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자신의 “몸[σῶμα, (건강한 총체로서)신체, 인격체로서의 몸]”이다. 단순한 “육신, 고기[σάρξ, ]로서의 피와 몸”이 아닌 영혼이 함께 하는 ‘몸’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 드림에 왜곡된 가르침은 무엇인가 우리의 가진 부차적인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가르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가르침이다. 하나님께 물질을 드린다고 해도 기뻐하시는 드림은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8:5)라는 바울의 고백 속에 나타난다.

또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죄에서 산 것이 되고 죄에서 자유 하는 존재가 되었다면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당연하고 모든 것의 주인인 자신이 주님의 것이 되었다면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은 당연히 주님의 것으로 여김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죄를 짓는 고린도 교우들을 향하여 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는 이치는 오늘 본문의 권면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오늘 본문을 대신하는 같은 구절을 뽑는다면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는 주님의 말씀과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라는 바울의 고백이 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권면에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 할 수 있는 …



Ⅰ.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권면을 받고 있다.(1f)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

바울 사도는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친 다음에 그 모든 논리로 행해가야 할 실제적인 교훈을 시작하면서 이런 당부를 주고 있다. 오늘 말씀의 시작은 역시 ‘그러므로’이다. 과연 이 ‘그러므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앞의 11:35~36의 내용을 전제로 한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 사람이 현재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

이렇게 보이는 세계 속에 오늘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인생의 감당할 수 없는 죄의 채무(債務)까지 해결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고 그런 ‘영육의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면’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말이 바로 이 ‘그러므로’이다. 이렇게 우리의 몸을 당연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정당성을 증거하고 있다.

이 호소하는 대상도 분명히 하고 있다. ‘형제들아’ 바울은 지금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와 관련 없는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이러한 호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을 받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의 일원이 된 성도들에게 이 호소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드림의 문제조차도 주님의 성품을 따라 강제적이 아닌 각자의 선택에 맡기는 바울의 자세를 배운다. “…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b)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들의 희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누구보다도 충분히 억지로나 강제적으로 요구하실 수 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절대로 이런 것을 강요하시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기뻐하시지도 않으신다.

바울의 이런 표현은 다른 곳에서도 종종 나타나는데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는 비슷한 표현들을 읽을 수 있다. 바울은 충분히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 내가 권하노니’라고 당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함으로써 더 큰 호소력을 주고 있다.

하나님의 자비가 없으셨다면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광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비[οἰκτιρμός, 동정, 연민, 긍휼,]”는 쉽게 이해한다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 무한하신 연민과 함께 이런 호소를 하고 있다.

우리가 각자에게 부탁하고 호소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그럼에도 가장 호소력 있는 부탁은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과 불쌍히 여기심을 의지하여 호소하는 것이 더 사람들의 깊은 마음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자비도 단순한 자비가 아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면하고 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신 분이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3:22)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진멸되지 않았다면 그 자비의 응답으로 우리 몸을 하나님 아버지께 기꺼이 드릴 수 있어야 함을 바울은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의 은총으로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있다면 우리의 가진 것에 인색하지 않는 …



Ⅱ. 너희 몸을 드려라!(1b)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b) 우리에게 자신의 가장 귀한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몸을 드리기 전까지는 어떤 것으로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고 만족하시지 않으신다.

무엇을 드려야 하는가! 우리는 이 당부를 상당히 넓은 의미로 또는 추상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당부는 그렇게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당부는 우리 삶의 모든 주체로서의 자신을 드리는 것으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 “드리라[παρίστημι, 옆에 놓다, 맡기다, 바치다, 헌신하다]”는 표현은 억지나 마지못해서가 아닌 기꺼이 선물로 드린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 이유에서 영어로는 “present” 번역하고 있고 또 이런 드림이 되어야 하나님께서도 기뻐 받으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로마서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는 말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아들을 주신 것은 사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아들을 주셨기 때문에 계속해서 주실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전부를 받았다면 거기에 따른 응답으로 당연히 우리의 전부를 드려야만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헌신이며 드림이다. ‘이것은 이런 이유로 제외해 놓고,’라고 하는 것은 은혜 받은 자로서 합당하지 않다.

드리지 못할 정도의 몸은 없다. 하나님은 OT에서처럼 ‘어떤 것은 안되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드릴 것이 없다거나 건강이 좋지 않아 들릴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는 당부에 합당하지 않다.

하나님은 언제나 없는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드리면 만족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2) 그것이 물질이든지 시간이든지 음성이든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지 않는다면 즉,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한 달란트 받은 것을 그대로 감추어 두는 것이 되고 만다.(마25:24~28)

우리가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고 두면 그것이 남을 것 같은데,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나중에는 빼앗기게 된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이 원리는 항상 그대로 적용된다. 주님의 어떤 일은 비효율적인 것 같아서 자신이 빠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일이 망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됨을 거절하고 요셉이 약혼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지 않았다고 해서 때가 차서 이 땅에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일은 중단되지 않겠지만 요셉이나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뒤로 물러나고 하나님은 또 다른 사람을 통하여 일하게 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쓰임 받는 다는 사실 자체가 복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전을 지어드리려고 재료를 준비하던 다윗은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29:11) 고백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 몸을 드리는 대신 다른 드리는 것으로는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요즘 나타나는 신앙적 병폐는 자신의 몸을 드리지 않고 물질이나 다른 무엇을 대신하여 드리려고 하는 자세들이다. 자신의 몸은 관광이나 다른 것을 위해 쓰면서 그 대신에 물질을 드리려 한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당부는 단순히 함께 모여서 예배드릴 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다. 우리가 공적인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할 때는 오히려 그 예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중심이다.

나(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셔서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그 희생을 중심에 두고 영광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그 희생 앞에 자신을 비추고 그 희생의 가치로 다시 자신을 새롭게 세우는 더불어 드리는 영적인 예배에서 각자의 몸과 함께 드리는 영과 진리의 회복이, 드려진 우리 삶 속에 지속적으로 우리 몸을 드리는 것을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삶이 단절된 예배는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당부는 이러한 공예배를 시작으로 우리의 전 삶의 영역에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새롭게 회복된 자신을 하나님과 세상에 전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공적인 예배에만 참여하고 우리의 삶과 움직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온전한 예배의 삶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전시하는 것을 가리켜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확인하고 있다. 삶의 보다 근본적인 원리와 목표가 우리의 삶의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은 우리의 삶이 영적인지 육신적인지를 구분하는 데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의 삶의 중심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자세가 되어 있다면 세상에서도 나타날 것이고 그것을 바로 “영적 예배”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함께 몸을 드리며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이 감동과 확신으로 세상에 나가서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나타내는 산 제사로 드려질 수 있기를 …



Ⅲ. 이 세상의 판단이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렇게 공적인 예배를 통해서나 세상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은 육신적인 판단이나 계산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함을 붙여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항상 이 세대는 믿음의 사람들이 본받지 말아야 할 하나님을 안타깝게 하고 아프게 하는 것들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1:4) 라고 증거하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 이런 이유 때문에 야고보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약4:4)고 경계한다. 요한 사도 역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라는 같은 교훈을 주고 있다.

범죄한 ‘이 세대’는 항상 타산적이고 이권적이고 자신(自身) 우선주의(優先主義)이기 때문에[≠하나님 우선주의]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세대’의 방법대로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이렇게 이 세대와 다른, 사랑과 희생과 긍휼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삼으셨다면 그 은혜를 입은 우리도 당연히 그러한 하나님의 방법을 본 받는 것이 당연하다.

“…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을 순종할 때만 가능하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는 겉으로의 변화가 아닌 중심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5~16)고 증거하면서 이런 새로운 가치를 가지는 사람을 바로 “새로운 피조물”(17)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역시 세상의 이치로서는 “…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가 불가능하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매주 첫(日, 주님의)날에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며 자신의 세상에서의 부족된 삶을 주님의 희생에 비추어 새롭게 하고 그 새롭게 된 마음과 믿음으로 세상과 다시 만나는 예배로 “변화를 받아” 시작하는 지속적인 삶이 우리를 매 주 새롭게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주님의 희생을 매 주 당면하는 예배가 중요함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세대를 본받는 것과는 반대로 “…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가는 우리 사람들에게 과연 무엇이 중요함을 바로 배울 필요가 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하늘의 백성 된 사람들이 늘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이상(理想)이나 뜻이 하나님의 뜻을 앞서는 것이 문제가 된다. 자신의 욕심이나 뜻이 우선 되는 한 절대로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지 못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미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은 우리의 움직이는 육신이 죽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의 욕망과 뜻을 그리스도께 다 맡기고 자신의 의지 즉, 뜻은 죽어버린 존재들이라는 의미다. ‘나는 진정 죽었는가!’ 이러한 이치(理致)에 “아멘”이 되지 않으면 나는 참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뜻은 언제나 죄성(罪性) 때문에 ‘선하고 기쁘며 온전한 뜻’이 될 수 없다. 이 죄악 된 욕망으로 가득 찬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바꾸는 것이 죽은 것이고 그리스도의 것이 된 것이고 하나님의 거듭난 피조물이 된 것이다.

우리가 가장 쉽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자신의 욕망’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이 가르침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기준이다. 어떤 것을 하려고 할 때 그것이 심지어는 ‘말 한마디’까지도 ‘모두에게 선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온전한 것’인가를 구분한다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이런 판단 없이 말이나 일이나 해 버리는데 문제가 생긴다.[말로 상처를 입히고 절망 시킨다.] 이런 자세를 바울은 자신의 경험과 함께 우리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기” 원한다면 이런 영적인 판단이 바로 되어야만이 가능함을 이해하게 된다.

바울은 오늘도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귀중한 당부를 주고 있다. 우리의 어떤 부분들로만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보다 우리가 가진 모들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 그래야만 이것이 영적인 삶이며 예배일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치는 이 세대적인 판단과 가치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항상 속 사람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의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므로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