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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2:14~18 2018-03-25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가지는 공포나 두려움은 죽음일 것이다. 번개만 쳐도 놀라는 이유도 ‘죽을까 봐’이고 ‘목숨만 살려 주셔요!’ 그것이 또 일생에 지속되고 정복하고자 하는 최고의 적이지만 인간의 이성인 과학이나 의학으로는 이김이나 정복이 불가능한 영원한 숙적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죽음이라는 인류의 영원한 적도 근원적인 해결이 없이는 정복이 불가능하고 이것이 비록 사람의 범죄로 왔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죽음의 원인인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죄인 된 사람은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풀어야 할 숙제였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께서 이 문제에 직접 개입하시고 사람으로 불가능한 이 죽음의 문제는 마침내 정복하게 하셨다. ‘아직도 죽음은 여전히 지속되는데 정복되었다고 하느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사람에게 한번 정한 죽음은 죄악의 환경이 완전히 바뀌는 새하늘과 새땅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들로만 채워질 예정된 시기까지는 여전히 정복되지 못한 모습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죽음의 원인은 죄이고 이 죄를 제거하지 않는 이상은 죽음은 여전히 인류를 향하여 큰소리치고 정복자로서 호령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 죄는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으로 정복되었고 죽음은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죽음을 이기는 죄의 정복이야말로 이 인류역사의 영원한 복음이며 이제는 죽음을 향하여 큰 소리 칠 수 있게 되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5~57)

이 승리의 약속이 인간의 힘과 방법으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독생자의 희생을 통해 가능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5:17)라고 모든 사람이 생명의 선물을 받아 누릴 수 있음을 약속하고 있다.

이 약속이 분명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약속을 반복하고 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5:18)

이제 죽음은 정복되었지만 그럼에도 그 효과가 각 사람에게 미칠 수 있는 방법은 죄를 정복해 주신 하나님의 방법을 순종할 때만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것임을 믿고 그 십자가에 함께 죽고 사는 침례를 통해서 유효하게 된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이제 이 놀라운 약속이 우리의 것이 된 은혜의 사실들을 확인해 보도록 하자.



Ⅰ.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멸하셨다.(14~15)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 말씀은 무엇보다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몸을 입은 사실을 증거하고 그 혈육(血肉)을 입으신 이유를 확인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와 꼭 같은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이 사실 자체가 엄청난 희생이고 고난이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6~7)

사람도 권세나 부유(富有)에서 쫓겨나 초라함과 가난으로 내려가는 것이 가장 어렵다. 거기에는 불편함과 수치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는 묘사는 이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14f) 믿음의 후손들을 일컫는 표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순종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혈과 육’ 그것은 낡아지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14m) 앞에서 말한 대로 죽을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의 존재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물 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죽어야만 하는 혈육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최고의 희생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 모든 일반 사람들과 꼭 같이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10개월을 태중에서 자라서 이 땅에 나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의 삶 그대로를 친히 맛 보시며 사셨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의 완벽함을 선언하는 동시에 인류를 위해서 흠 없는 제물이 되실 수 있는 조건을 선언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시면서 ‘죄는 없으시니라’는 확인이다.

물론 오늘 본문 18절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고 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이렇게 되심의 이유를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이다.

1. 죽음의 원인인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서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14b)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 바로 죽음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죄에 잡혀 사는 인생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본 괘도로 되돌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한이 이에 대해 잘 표현하고 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

범죄직후에 옛 뱀이요 사탄을 형벌하실 방법을 선언하셨는데 거기는 이미 독생자의 희생을 통해서임을 포함하고 있어서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범죄 사실을 아시고 그 저주를 회복하시고자 희생제물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실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실제적으로 죽은 것은 마귀 사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14b) 죽음을 통해서만 죽음을 멸하고 생명을 심을 수 있기 때문에 죽게 된 모든 인류를 살리시기 위해 생명이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죽으러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죽음을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어 장사 지낸 것이다.

2. 모든 사람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15) 우리 주님은 무엇보다도 모든 인류를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케 해 주시려고 오셨다.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인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역시 죽음이었다. 병드는 것도, 먹지 못하는 것도 최종적으로는 죽는 것이 두려워서다.

죄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일평생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뿌리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6:23f) 하였기 때문에 죄를 반복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히브리서 9:27에서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여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결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임에도 하나같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죽음의 뒤편을 아무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극에서 이제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15)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참으로 복음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약속과 함께 주님은 그를 순종하고 따르는 자들에게 보다 확실한 약속을 주시고 계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이 질문은 유독 병든 형제를 죽음에 잃고 절망하고 낙담하는 마르다에게만 주신 질문이 아니라 우리 모든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물음이다.

죽음은 절대로 찬양할 수 없는 섬뜩하고 차가운 어두움의 공포이긴 하지만 생명의 주님께서 모든 사람이 가야만 할 그 저주의 음부를 대신 다녀오시고 죽음의 세력인 마귀를 십자가에서 멸하심으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죽어야 할 그 비극의 문을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출구로 바꾸신 주님의 희생 때문에 평생의 두려움도 해결 받은 영원의 사람들이 되었다.

그럼에도 한가지 경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생명의 확보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사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생명의 문을 열어 놓으시고 들어가도록 명령하심에도 그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으면서 같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완벽한 약속이라도 그 약속의 상대되는 당사자가 상대의 약속을 따르지 않으면 그 약속은 그러한 대상에게는 효력을 가질 수 없는데 다만 착각으로 자신에게도 그 약속이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경계는 가져야 한다. 그런 이유에서 중요한 것은 생명의 주님께서 생명을 얻도록 명령하신 것을 순종하고 받아들이는가 우리 각자를 살필 필요가 있다.



Ⅱ. 믿음의 자손들을 붙들어 주시려고 오셨다.(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복음의 효력은 절대적인 능력으로 물론 이 온 우주의 영적인 역사의 변화를 가져 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완성하기 위해서이다.

1.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

복음은 근본부터 하나님께서 부리시기 위한 영적인 시종들인 천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아브라함 즉, 약속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1:14)

오히려 범죄한 천사들에 대한 형벌을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2:4)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1:6)

2.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면서 약속하시기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 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이 효력을 나타낼 것이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혈육인 유대인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다. 갈라디아 3:7~9에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붙들어 주다[ἐπιλαμβάνομαι, 굳게 하다, 붙잡다, 구제하다]”라는 의미를 볼 때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구원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죽음에서 구원하려 하심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표를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 확인이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현실적으로는 천사들보다 못한 존재들이지만 약속에 있어서는 분명함을 확신할 수 있다.



Ⅲ. 죽음의 쓴 맛을 그대로 맛보셨다.(17~18)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주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한결같이 우리와 같이 되셨다. 앞의 11절에서도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철저히 낮아지시고 더 낮아지셨다. 그 낮아지심으로 우리를 살리셨고 죽음을 정복하셨으며 이 주님의 희생을 가지고 죄와 사망을 이기려고 하는 교회는 이러한 주님의 본연의 모습을 당연히 본받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더 많은 사람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17f)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심을 의미하고, 어쩌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지만 육신을 입으셨음에도 마귀의 정죄에 빠지지 않고 죄를 범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의 모범을 보이심이 당연하셨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2~23) 속죄제가 아니라도 대제사장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으신 우리 주님의 완벽함을 선언한다.

이 히브리서 기자는 다시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히7:26)고 확인한다.

이러한 완벽한 주님의 성품은 “…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17b)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되심과 사죄를 위한 대제사장 되심을 감당하기 위해서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과거 율법 속의 대제사장은 자신들도 연약에 쌓여 있기 때문에 백성들을 위한다고 하지만 자신마저도 죽음의 공포를 가지고 먼저 자신을 위한 속죄제사를 드리고서라야 백성들을 위한 사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모습에 비교하면 비교될 수 없는 대제사장이시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히5:1~3)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당연히 땅에서 난 대제사장이 아닌 하늘에서 오신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18)는 증거에서 더 큰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가장 일반적인 굶주림과 영광스러움과 부귀를 통한 시험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이미 받으셨다.(마4:1~11; 눅4:1~13) 그럼에도 그러한 시험은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받으셨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하는 유혹들은 40일간의 금식후의 유혹보다 결코 못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27:40)

전지전능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그러면서도 죄로 고난에 신음하는 인간 실존을 지식으로 충분히 아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먼 하늘 위에서 막연히 내려다 보시고 단순히 동정하시는 분이 아니라 탄생에서부터 십자가까지의 모든 일생에서 인생의 삶을 철저하게 경험하심으로 우리 인생을 친히 체험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고난과 시험에 처해 있는 우리 인생을 도우실 수 있는 낮아지신 주님을 확인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생을 죽음의 공포에 잡혀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죽음의 권세를 잡은 마귀를 멸하심으로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유 하게 해 주시려고 그냥 전지전능의 권세가 아닌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죽음을 멸하셨다.

그것은 천사와 같은 어떤 다른 자신의 피조물들을 위해서가 아닌 언약의 백성 즉,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구원의 약속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온 갓 고난과 유혹을 다 견뎌 보셨기 때문에 오늘도 같은 고통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