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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민 21:4~9 2018-04-15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하나님께서는 항상 사람들에게 최고의 가치를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사람들은 항상 하찮은 것들로 그 하나님께 범죄하고 형벌을 받게 되는 일들을 성경은 우리에게 상당히 자주 전달해 주면서 오늘 우리의 경계로 삼을 것을 경계해 주고 있다. 바로 앞장 20:14~21에서는 에돔 땅을 거쳐서 지나 가겠다고 에돔에 요청했지만 이유나 조건 없이 거부를 당하고 어쩔 수 없이 에돔을 돌아가야 하는 입장에 놓였고 마침내 아론이 세상을 떠난 바로 후에 일어난 사건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내용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 첫 절에 보는 대로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4)는 기록을 읽게 되는데 일평생의 인생길이 험하고 힘겨워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길이 편치 못하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범하고 마는 모습을 보는데 어쩌면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서 만사형통을 주시면 좋겠는데 믿음생활 하는 것이 세상사람들과는 다르게 오히려 고난과 어려움을 각오해야 하는 것임을 우리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말씀하셨고 바울과 베드로 역시 다르지 않게 당부하는 것을 듣는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2~13, 16)

문제는 당연히 당할 수 밖에 없는 고난을 피하려다가 오히려 더 큰 안타까움을 만날 수도 있다는 교훈이다. 어려움을 피하려다가 더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를 더러 경험하게 되고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각오를 했다가도 또 같은 경험을 반복하는 것은 우리의 죄성 때문일 것이다.

불풀무 같은 이집트의 종살이 하던 데서 해방시켜 주신 사실과 이 광야의 행진이 끝나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미래의 약속을 생각하면 길이 좀 불편한 것쯤은 견디고도 남을 것 같은데 그렇지가 못하다.

이런 이유에서도 주님께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 하셨는데 원망과 불평이 언제나 본문의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는 것처럼 하찮은 것으로 범죄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대단하지 못한 것에서도 예수님을 팔고 신앙을 파는 경험들도 더러 한다. 이렇게 대단한 것이 아닌 별 것 아닌 것에서부터 신앙의 자세로 대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운다. 소소한 것들에서 신앙적이지 못하면 나중에 큰 과제 앞에서는 더욱이 신앙으로 대치하지 못할 경우가 생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하신 하나님께서 이 불평과 죄를 인하여도 저주와 죽음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만고불변(萬古不變)의 구원진리를 제시하신 놀라운 은혜를 감사하게 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이런 이유 때문에도 사람들은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b) 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6:1)고 경계를 주기도 한다.



Ⅰ. 불평하면 범죄하게 된다.(4~5)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대부분 사람들은 어떤 곳을 가든지 질러서 곧장 편하게 가는 것을 원한다. 좀 둘러간다 싶으면 쓸데 없는 에너지와 시간 낭비를 하는 것 같아 손해 보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때로는 천국을 향해 가는 것에까지 적용하려는 사람의 습성들이다. 그러나 사실 천국을 질러서 간다는 것은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생활 하다가 바로 세상을 뜨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원하면서도 지금 천국에 가자고 하면 머뭇거리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적으로 이집트 카이로에서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직선거리로는 500Km도 안 되는 거리라서 물론 당시에는 걸어서 가야 하는 입장이긴 했지만 요즘 같으면 자동차로 한나절 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길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40일간 가나안 땅 정탐한 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혹평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은 죄 때문에 40년을 넘어서야 이 길을 갈 수 있었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관건은 어떻게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귀하게 믿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지름길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에돔을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귀찮은 입장에서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는 모습을 먼 역사 뒤에야 우리는 보게 된다.

길을 걷는 것이나 어디를 가야 할 때 가는 목표가 행복을 향한 것이라면 어려운 길일지라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었을 터인데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향해 간다는 은혜의 목표를 잊어버린 듯 하다. 이런 입장에서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감사하며 천국을 향해가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목표를 잊지 말라는 당부를 하는 것이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목적지까지의 길이 험하고 힘겨워도 불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본문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자유케 하신 감격도 약속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조차 어느 것 하나 행복한 기색이 없는 데서 불평으로 발걸음이 천근 만근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4b)는 모습은 그들의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오늘 천국을 향해 간다고 하는 나(우리)는 어떤가!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천국을 향해가는 길이 평탄할 수만은 없다. 그 고난의 종류가 어떤 것이든 관계없이 죄를 인한 고난이 아니라면 고난을 겪을수록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향한 애착은 오히려 더 확실해 질 것이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이들은 길로 인해 마음이 상하자 말자 그들의 입에서는 즉각적으로 원망이 터져 나왔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5f) 항상 사람들의 불평은 예나 지금이나 ‘어찌하여’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어째서’이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이집트에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출2:24) 라는 기록을 봐도 자유를 모르고 가련하게 종노릇 하면서 탄식하는 언약의 백성들을 자유케 하셨고 비교될 수 없는 복된 곳으로 이끌어 가시는데 시마다 때마다 들리는 소리는 불평과 원망 뿐이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죄의 타성에 젖어서 그냥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미래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그곳에 주저앉아 버리려는 기질들이 더러 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아이들만이라도 이 고생 시키지 않으려면 공부시켜야 한다.”고 했던 우리 나라의 부모들은 참으로 존경 받을 만하다. 사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때에는 이런 불평조차도 못했으면서 ‘물에서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 하는 식으로 불평과 원망을 쏟는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5b) 불평하는 입술에서 계속 나올 수 있는 것은 원망밖에 없다. 감사가 없으면 불평과 원망이 지속되기 때문에 감사할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들이 광야 40년의 여정에서도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신8:4)시는 표현처럼 언제나 부족함이 없도록 굶주려 죽거나 목말라 죽은 사람은 없었다.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람들은 이런 이해타산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었다. “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도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산업이 되게 하리라”(신1:39)

그럼에도 그들의 불평은 끝이 없었다. 세계 어느 민족도 먹어보지 못한 하도 신기해서 ‘이것이 무엇이냐!’ 감탄으로 이름이 된 신비한 만나를 40년간 먹었으면서도 “…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는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물과 음식 즉,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인한 불평이 쉽다. 우리가 어릴 때 보릿고개 만 생각해도 배고프지 않고 배에 기름이 찰 정도로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감사를 모르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조상들에 대한 배은망덕이다.

결국 감사를 잃은 불평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짓게 됨을 보는 것이다. 이래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는 말씀이나, 세상적으로 비교하는 상대적(相對的)인 삶이 아니라 절대적(絶對的)인 삶을 위하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당부하시는 것이다.



Ⅱ. 형벌과 회개,(6~7)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은혜를 베풀어도 베풀어도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찬양이 아니라 원망과 불평뿐이었다. 이런 안타까운 백성들을 복된 땅에 합당하게 훈련하시려고 하나님은 사실 광야 40년을 살게 하셨다. 그럼에도 감사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때로는 쓴 맛을 보게 하셨고 그렇게 하여 이집트에서 나온 60만 명의 20세 이상 된 백성은 이 광야 40년에 다 죽고 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형벌로 여겼기 때문에 역시 되돌아 가는 것은 이 광야에서도 형벌뿐이었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6f) 불뱀은 당시에 광야에서 흔히 살고 있는 독사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잘 알고 있었던 것 같고 등이 구리 빛이라는 데서 혹은 맹 독성 때문에 또는 물리면 열이 불처럼 올라서 죽기 때문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한 것은 분명하지는 않다.

다만 이 하나님의 형벌로 인하여 정확한 수는 아니지만 “…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6b)는 상황설명은 그들의 원망의 결과가 비참한 것이었음을 우리 모두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사실 원망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그것이 누구를 대상하는 것이었든지 언제나 결과는 좋지 않다.

그런 이유에서 바울은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10)는 경계를 주고 있다. 믿음의 실천을 당부하는 야고보도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5:9)는 같은 당부를 주고 있다.

백성들은 많은 사람을 잃고서야 자신들이 왜 형벌 받고 있는가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7m) 누구든지 징계의 원인을 빨리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회개는 빠를수록 좋다. 문제는 징계의 채찍을 맞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모세는 언제나 문제 앞에 엎드리는 기도의 사람으로 그의 사역에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백성들 사이에서 땅 위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표현되는 모세(민12:3)는 즉각적으로 한나님께 긍휼을 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모세의 기도에 빠르게 응답해 주셨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뱀에 물린 사람들을 치료하시는 대신에 그들의 믿음을 통해서만 치료받게 하시는 응답을 주신다. 성경기록시대에도 하나님은 어떤 일들에 항상 기적으로만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도록 하셨음을 본다. 오늘의 시대에도 그의 백성들에게 구하고 찾고 두르리라(마7:7~8)고 명령하시는 이유이다.



Ⅲ. 순종이 곧 살게 한다.(8~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하나님께서 모세의 중보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으로 주신 것은 사람들의 이성적(理性的)으로 생각할 때는 참으로 유치하고 어리석은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8f) 사람들은 당장에 열이 올라 퉁퉁 부어서 죽어가는데 그 죽이는 독이 가득한 불뱀을 만드는 것조차 그 광야에서 쉽지 않았을 것이다.

놋으로 뱀을 만들기 위해서는 놋쇠를 길게 벼려서 조각을 하든지 아니면 놋을 녹여 놋뱀 모양의 틀을 만들어 부어 찍어 내든지 금방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것을 아니었을 것이고 당장에 사람이 죽어 나뒹굴어 지는 상황에서 더욱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게 보이는 그것에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b) 어쩌면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신 이유일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다만 차이가 있다면 “보면 살리라”가 아닌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라는 좀더 구체적으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사람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어리석기 그지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사람들이 주는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라는데 무게가 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이 약속은 어리석은 것 같지만 결과가 기록이 되고 있다. “…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이것은 동화에 나오는 우화(寓話)가 아니라 역사 속에 기록된 사실인 documentary라는 데 확신이 있다.

놋뱀을 만들어 높이 달아 놓고 “…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b) 할 때 ‘뱀에 물렸는데 해독제를 구해서 바르거나 먹거나 주사를 맞아야지 장대 끝에 놋으로 만든 뱀을 본다고 살겠어!’라고 의심하고 모세의 명령을 거절한 사람들은 그냥 그대로 죽었듯이;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여기에 빗대어진 것은 너무나 비슷한 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 때문에 1세기 때 지혜의 도시라고 하는 고린도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는다. 고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18) 이 시대의 사람들도 ‘2천년도 넘은 수 만리 먼 곳에 유대인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산 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야!’라고 놋뱀을 믿음으로 쳐다보지 않았던 사람들과 꼭 같이 될 수 있다.

온 인류는 사실 사탄이라는 뱀에 물려 죄의 독에 중독되어 사망으로 가고 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계12:9) 하였고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계20:2) 라는 기록 속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한 치료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약속이 이종배의 말이라도 믿을 필요는 없다. 그러니 이 약속이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데서 불뱀을 물린 자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b)하신 것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라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경계되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것이라도 그 도구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불뱀은 가나안 땅에까지 가져와 유다 역사 말기 히스기야 왕의 시대까지 숭배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런 경계를 갖게 한다.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18:4b)

사람들은 죄의 속성으로 사소한 것들에게서 길로 음식으로 속상해 한다. 그러나 불평대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복이 된다.

형벌은 언제나 범죄로 인해서 오고 그럴 때 회개는 빠를수록 좋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이 사람의 생각에는 어리석을지라도 순종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살게 한다.

“…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b)는 오늘의 메시지는 그대로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는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