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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5:5~10 2018-04-29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미래의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소망하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었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약속이다. 그럼에도 이 약속을 지속적으로 누려가는 것에도 양극단을 취하는 신앙적 이론을 보게 된다.

독생자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절망과 저주에서 우리를 살게 하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 된 우리를 절대로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실 것임은 성경에서 수없이 약속하고 계시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과 보호는 변함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던져버릴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성경은 경계해 주고 있다.

거기에 대한 장치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본문에서도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당부하시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바로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이라는 어렵지 않은 원리를 가르쳐주고 계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구원을 끝까지 견인하여 가실 것이기 때문에 즉, 이끌어 가실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고 자위하고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그 확실한 사랑을 믿고 오히려 방종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극단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누구도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기 보다는 말씀에 깨어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쉽게 정죄하고 자신은 감사보다는 두려움으로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극단이다.

이 둘 모두 진리에 의해 자유 하는 천국의 삶은 아니다. 오늘 우리는 조심스럽게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을 통하여 이런 두 가지 양극단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서 바른 신앙적 중용(中庸)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Ⅰ.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완벽하다.

영원히 형벌 받고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 된 우리(나)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역사 없이는 수 천 번을 죽었다가 깨난다 할지라도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없고 섬길 수 없고 함께할 수 없는 그야말로 본질적으로 비극적인 운명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힘이나 방법은 우리 스스로에게는 적어도 없다.

하루에도 아침 저녁으로 항상 변화무쌍하고 이랬다저랬다 할 수밖에 없는 흔들리는 인생, 본질적으로 영원을 사모하는 성품을 우리 사람 속에 두신 창조의 섭리(전3:11m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에도 불구하고 영원을 보장할 수 있는 미래도 없는 인생, 본능에 살고 본능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짐승과 같은 절망스러운 인생이 나(우리) 자신이고 온 인류이다.

이런 가련한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주시고 손을 내미시고 부르셨다. 이 역사 속의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도록 자신의 독생자에게 인류의 모든 죄를 지우셔서 가장 비참하고 잔인한 방법인 십자가에 죄의 수치와 저주를 이미 감당하게 하시고 그 형벌을 넘어선 은혜의 자리로 나(우리)를 부르셨다.

사실 사람들 스스로는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조차도 헤아리지 못하고 무지개만 꿈꾸는 어리석음도 죄의 영향력 때문이다. 죄는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고 무지하게 만드는데 이것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지적하고 있다.

“…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4:17b~19)

이런 어리석고 절망스러운 인생을 향해 주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요6:65) 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이 없이 죄인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 조차가 불가능함을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복음에 순종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보호의 약속도 분명하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8~29)

여기에 대한 가장 온전한 약속은 아마도 로마서8:31~39인데 사실 이보다 완벽한 약속이 있을까 싶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1~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3:3) 이렇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약속과 부르심에는 그 언약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이런 내용들만 본다면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의 구원의 안전은 보장되고도 남는다. 언제나 하나님의 분명한 언약에는 문제가 없지만 그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문제이다.



Ⅱ. 사람은 온전하지 못하다.

이렇게 성경이나 하나님의 약속의 분명함과 불변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신앙해도 확신할 수 없다.”는 생각도 대단히 위험하고 경계해야 할 신앙의 모습이다.

결국 확신하지 못하는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믿음의 근거를 두지 못하고 상대적인 사람을 중심 하는 데서; 믿음은 아침과 저녁으로 변하고 구원을 받은 감격으로 살다가 또다시 지옥을 경험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가질 수도 있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자신의 백성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천국과 지옥을 수없이 넘나드는 것을 기뻐하실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가 복음에 순종하여 그리스도를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죄의 도구인 육체에 살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다시 오시거나 우리 각자가 육신을 떠나 완전히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기까지는 유혹과 시험은 어쩔 수 없다. 그런 장치로 우리의 약함이나 범죄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도 주님께서는 마련해 주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우리는 구원을 논할 때 항상 중요하게 다룰 말씀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이 말씀에는 적어도 하나님의 준비하신 은혜와 그것을 우리 각자의 것으로 누리는 우리 사람 측의 받아드림의 방법을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이렇게 두 가지로 도식화할 수 있는데 이것은 결코 바뀌지 않을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①은혜에 의하여, 신앙 속에서 계속 강조할 수 밖에 없는 진리와 영생에 대한 출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②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 무조건적 은혜를 각자의 것으로 누리는 수단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즉, 믿음을 도구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가지의 노파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은 ‘믿음’을 말할 때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즉, 역사하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는 야고보의 경계처럼 성경은 우리의 믿음은 그냥 머릿속에만 갖고 있는 관념적인 죽은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바울이 증거하는 역사하는 믿음 즉,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신앙의 세 기둥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1:3) 중에서 역사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사람 측에서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은혜에 의하여”만 강조하게 되어 신앙의 사람의 본분을 잃어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불변하기 때문에 사람의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선물로 주어진 은혜만 강조함으로써 사람의 믿음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구원을 확신하기 쉽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무조건적인 은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의 성장이나 진보를 비례적으로 생각하는 극단적인 판단은 모자라고 부족하고 초라한 믿음을 보면서 절망하고 남들의 성장하지 못하는 믿음도 역시 판단하기 쉽고 구원의 확신을 때마다 잃어버리는 안타까움이다.

우리가 애당초 불가능한 존재였음에도 선물로 거저 주신 구원이라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바뀌지 않는 이상 낙심치 말아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나 다른 이들의 자라지 못하는 신앙을 보면서 지레짐작으로 ‘나는 안되’라거나 ‘그래가지고서는 너도 안되’를 단정하는 것들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불가능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왜, 그런 사람에게도 복음을 선물로 주셨을까!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믿음의 출발이 하나님으로부터일 뿐만 아니라 믿음을 지켜가는 과정도 우리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기준이 아니라 불변하시는 하나님께 의뢰해야 하는 것이다.



Ⅲ. 은혜 안에 머무르라!

그럼에도 이런 분명하고 확실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에 응답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변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주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직접 주신 귀한 교훈으로 우리가 영적인 열매를 맺기 위해서 주님 안에 계속 머물러야 할 것을 교훈하는 말씀으로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말씀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영적 열매만을 가르치는 교훈이 아니라 지속적인 구원의 귀중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말씀이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6)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므로 영적인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열매를 지속적으로 맺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구원에 있음도 증거하게 된다.

우리가 무슨 열매를 맺느냐 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상태를 증거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생명에 있다면 당연히 영생의 열매를 맺을 것이지만 어둠에 있다면 당연히 어두움에 관련된 결실을 맺을 것이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 주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두려운 교훈이지만 주님께서는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2)는 말씀도 같이 하심으로써 ‘제거해 버리시고’나 ‘깨끗하게 하시느니라’는 말씀들은 은혜에서 떨어짐을 말씀하시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바울 사도 역시 자신의 민족인 히브리 사람들에게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11:22b) 경고하시고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골1:23f) 함으로서 역시 같은 교훈을 주고 있다.

역시 오늘 본문 9~10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는 당부를 하고 계시다.

본문의 말씀에는 “거하다[μένω, 머물다, 남아있다]”라는 표현이 7, 10절에 두 번씩 그리고 8절에는 결과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지만 5, 6, 9절에 한번씩 모두 7번 사용되고 있다. 또 5~9까지는 모두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먼저이고 10절에서는 그러한 결과로 주님께서도 그러한 사람들 속에 거하실 것임을 약속하시는 구조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 또한 우연의 일치가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 속에 머무를 때 그런 사람 속에 주님께서 거하실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사람들의 의지를 무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지 않으면 버려질 수 있는 경계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순종하는 사람을 자신의 사랑에서 지키실 것을 언약하신 말씀인 로마서 8:31~39 말씀만큼이나 확실한 반대로 말씀하고 계신 부분이 바로 히브리서 즉, 선택된 백성들에 대한 경계로 기록됨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우리가 히브리서의 독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히브리서의 주제는 바로 사람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을 포기할 수 있다는 위험과 가능성을 그러한 어리석음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되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유대교로 되돌아 갈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에게 보내진 이 편지는 그러한 배교를 하지 않도록 설득하기 위해 쓰여진 서신이다.

그러한 경계들을 대략적으로 살핌으로써 선택 받은 민족리라는 자긍심을 가지면서도 그 은혜를 팽개치려는 저들의 어리석음을 경계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 믿음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같은 잘못된 수순을 밟는 사람들에게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를 상고할 수는 없지만 부분부분을 보겠는데 이런 이유에서는 로마서9~11장의 내용과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히2:1~3)

율법을 순종치 않음에 대한 형벌의 보응을 받았다면 보다 비교될 수 없는 완전한 복음에 순종치 않는다면 생명 없이 떠내려가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3:7~8에서는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경고한 다음 12~14에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하였다.

4:1~11에서는 안식의 약속에 대한 경계를 주면서 특히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2)고 안타까워한다.

어쩌면 가장 결정적인 경계의 교훈은 6:4~6의 내용일 것이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10장에서는 먼저 23절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라 경고한 후에 26~27절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는 교훈과 함께 복음 속에 들어오면서 얼마나 큰 시련을 견뎠는가를 지적하고 이 분명한 약속을 두고 뒤로 물러갈 수 없음을 격려한다.

12:25에서는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고 같은 경계를 주고 있다.

이 논란의 해결점을 가진 말씀으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1:5) 어쩌면 가장 확실한 신앙의 논리이다. 창세전부터 마지막으로 나타내시기로 계획하신 구원을 얻는 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서로의 역할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이 베드로 사도의 증언 역시 바울의 구원을 선물로 주신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엡2:8f)라는 증거와 다르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예비된 구원과 거기에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사람 측의 응답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의 보증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구세주이시며 토기장이이시지만 절대로 사람의 역할이나 선택을 무시하고 독선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강제(强制)하시는 분이 아니다.

영원한 구원은 사람 편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고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한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준비되고 이 십자가의 희생의 제사아래 모든 인류를 초청하시고 그 귀한 생명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여 이 언약 속에 지속적으로 머무르는 사람들에게는 세상 끝날까지 보증하고 보호하실 것이다.

그 구원을 누리는 사람들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하는 것처럼 구원에 합당하도록 항상 어떤 말씀에든지 순종하여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지키는 믿음으로 사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