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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창 6:1~4 2018-05-06
자기들이 좋아하는,  
많은 오해의 소지와 건전치 못한 사람들이 악용하는 말씀이 되기도 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성경과 역사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어려움이 없는 말씀이면서 이 역사의 마지막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귀중한 경계가 되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마7:13; 눅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하신 것처럼 영원을 위해서 힘쓰는 일들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후회가 없고 반드시 감사로 결과하게 될 것이다.

특히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당부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거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는 말씀들을 볼 때 자신의 뜻이나 영광을 구하는 것들에 대한 경계를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역사의 시초부터 하나님께 창조를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의 의지와 뜻이 앞서므로 복이 아니라 진노를 이루고 형벌을 당하는 과정들을 보면서 같은 입장에 있는 우리 자신들의 경계를 삼아야 한다. 우리는 OT성경을 읽으면서 그 수만은 거역과 형벌을 보게 되는데 이것을 왜 성경 속에 꼭 기록해뒀을까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교훈은 바울이 잘 가르쳐 주고 있다.

OT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당한 일들을 말한 다음에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10:6, 11)고 경계를 주고 있다.

오늘 이런 경계를 같이 듣고 있는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삶을 살면서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교훈을 읽고 들으면서도 같은 과정을 밟는다면 더욱 어리석은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Ⅰ. 반드시 번성이 좋은 것 만은 아니다.(1~2)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은 세상의 만물을 종류대로 만드시면서 특히 창조의 다섯째 날에 그의 피조물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창1:22) 축복하시고 여섯째 날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28)고 복을 주셨다.

그럼에도 오늘 읽은 말씀의 시작이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라는 모습이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복이 이루어지는 것 같음에도 그 진행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농사를 하면서도 쉽게 보는 것은 잘 되라고 심은 곡식은 정성을 드려도 잘 자라지 않지만 그것들 사이의 잡초들은 돌보지 않는데도 참 잘도 자란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1) 이것은 어쩌면 자연적인 현상이고 당연한 현상인 것 같은데 앞의 말씀들과 또 연이어지는 내용들과 더불어 보면 별로 그렇게 환영하고 축복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 “사람[אָדָם]”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에게서 난 사람들임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담이 범죄 후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낳은 가인의 후예들로 전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제사하지 않는 패역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4:16~24에 나타나는 가인이 에녹을 낳았고 에녹은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므드사엘은 라멕을 다시 라멕은 두 아내를 통하여 야발, 유발 형제를 낳고 또 두발가인을 낳아 적어도 일곱에서 여덟 대의 자식들을 낳으면서 나름대로 그들의 역사를 이루어 간다.

그럼에도 이들에게서 하나님의 이름이나 제사나 법은 찾아 볼 수 없고 오늘 본문에 나타난 번성의 이야기 후에 이들의 이름은 이 인류역사 속에서 영원히 잊혀진 이름이 되고 만다.

성경에 나타나는 또 다른 사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사람들보다 불신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는 오히려 더 빨리 왕성하고 이름을 내는 것들을 보게 된다. 잘 아는 예를 보면 이스마엘과 이삭의 나이차이는 14살 정도이지만 이삭이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을 낳은 창25:19~26의 이야기 바로 앞의 16절에 보는 대로 육신의 형인 이스마엘은 벌써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열두 지도자들이었더라”는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오늘 본문에 연이어 지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2f) 라는 말씀에서 뒤의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들이라고 확인을 하였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판단이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게 하는 관건이다.

앞에 가인이 에녹에서 두발가인을 낳은 후 하나님은 이렇게 창조주를 잃어버린 계보 대신에 아담에게 전혀 다른 후손들을 주시는데 창4:25~26의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셋[שֵׁת, compensation, 보상, 대신]’을 주셨고 그가 다시 아들을 낳고 ‘에노스[אֵנוֹשׁ, man]’고 이름을 짓게 되는데 역시 ‘사람’이란 뜻이고 이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기록을 확인해볼 수 있다.

그런 다음 5장에 넘어와 계보를 기록하게 되면서 독특한 것은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1~3) 라는 기록이다.

여기 마지막 3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꼭 같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족보인데 앞에서 거론한 4:16~24의 이름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하나님께는 더 이상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존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비극은 그들이 하나님께 잊혀진 존재가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잃어질 수 밖에 없는 육신의 사람들의 후손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라는 새로운 계보에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므로 잊혀질 이름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약속을 누리는 자들이 되게 하셨다.

다시 오늘의 주제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2f) 라는 기록은 이들이 다시 하나님 없는 가인의 딸들에게 매혹되었다는 의미이다.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였음에도 여전히 육신의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우선으로 찾게 되는 모습은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두려워해야 할 경계의 모습이다.

어쩌면 속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오로지 보이는 겉사람만을 꾸미는데 치중하게 되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세상적으로만 애쓰는 사람들의 겉모습이 더 아름답게 꾸며질 수도 있다. 에베소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 속에서도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3:16) 라고 기도함을 본다.

이렇게 믿음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는 역시 같은 바울의 경계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2f) 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부러워하고 욕심 내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는 당연히 “…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2b)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오늘도 이러한 모습은 적어도 믿음의 사람들과 가정들에서 경계해야 할 신앙의 모습이다. 모든 것에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순간적으로는 보이는 모습은 얼마든지 거짓으로라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밀 수도 있다.

이런 이유에서 베드로나 바울의 여성에 대한 아름다움의 당부는 나타나는 겉으로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3~4; 딤전2:9 “…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그러므로 “…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2b)는 자세는 하나님과 역사와 영원한 가치를 잃어버린 순간을 사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 보다는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 이런 가치 속에 선택하는 것들이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오늘의 결혼문화도 가정들이 깨어지는 이유들도 근본적인 문제는 순간적이면서 즉흥적인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데서 특히 신앙에 문제를 일으키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망치고 있다. 언제나 인생의 중대사에 있어서 믿음의 사람이라면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형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고려 되어야만 한다. 적어도 순간의 쾌락이 아니라 영원을 염두 해 두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야만 할 것이다.



Ⅱ.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없는 것이었다.(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찾게 된 사람들이 또 다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는 또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되어 자신의 영광을 더럽힐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오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안타까운 선언을 하시게 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3f) 결국 사람을 천하에서 멸하실 결정을 우회적(迂廻的)으로 선언하시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다면 죽을 수 없는 신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미 창조시에 에덴에서부터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1: 27)라는 기록이나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는 모습들은 사실 겉모양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서의 형상을 일컫는 표현이었다.

이렇게 사람은 겉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있는 것이어야 참 영광이 있고 영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지만 한번 죄를 범한 사람은 회복시켜도 완전한 회복이 불가능한 죄에 더 가깝고 죄에 익숙한 존재들이라서 신령한 영적인 존재가 되기보다는 육체적인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 더 쉬움을 보는 것이다.

결국 영육이 다 완전한 ‘생령’이 아니라 범죄하여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3m)는 육적인 고기덩어리가 더 쉽게 역할 하는 안타까운 존재가 되었고 900년을 넘기던 그들의 생애는 “…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3b)는 한정된 육신의 삶으로 결정되고 만다.

이제 이러한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구속의 역사를 이룸으로 하나님의 영이 회복된 후에도 나타날 수 있는 경계 때문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6~17)는 교훈을 주고 있다.

이제 믿음의 사람들의 영적이고 영원한 승리의 비결은 주님께서 완성하신 것이지만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는 여부에 따라 각자의 선택과 함께 얼마든지 가능하게 되었다. 사람의 죄를 알고 깨닫게 하려고 주신 율법 속에서는 불가능했지만 바로 앞에 인용한대로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는 약속과 함께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5:25)라는 확신을 주고 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바울의 권면은 바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 모두의 것이다.



Ⅲ. 땅에서는 잠시 영화로울 수 있었다.(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3f) 하신 선언 후에 있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여기의 내용은 땅에 홍수의 형벌을 부를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전달해 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4f) 하였는데 ‘네필[נְפִיל, 벌목꾼, (약한자를 못살게 구는) 사람, 폭군, 거인, 장부]’ 이러한 존재들이 당시의 상황이나 낱말이 의미하는 것으로 볼 때 하늘의 존재 즉, 신령한 존재들은 아닌 것 같고 역시 하나님을 거절한 땅의 존재 흙에 기록될 수 밖에 없는 난폭한 존재들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홍수 후에는 이런 사람들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나중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탐한 후에 보고하는 내용 속에서도 이 ‘네피림’ 언급되지만 이것은 홍수전의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은 아니고 단순히 거인 족 ‘아낙 자손’(민13:28)으로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33f)라는 내용들은 당시 그들의 보고의 내용 속에 조금은 과장된 표현이라 이해된다. 나중 다윗이 상대하여 싸웠던 ‘골리앗’ 정도의 거인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 4절의 내용은 하나의 내용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4f)라는 내용과 그 다음의 내용은 별개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용사[גִּבּוֹר, gibbor]’가 ‘거인’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강한, 용사, 우두머리, 폭군, 빼어난, 전사’ 등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는 낱말로 앞에서 언급한 비록 역사 속에 지워진 인물이 긴 하지만 4:16~24에 언급한 ‘라멕, 야발, 유발, 두발가인’ 같은 유명한 사람들과 같은 존재들일 수도 있다.

문제는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3f)신 하나님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4m) 라고 영적이지 못한 육신이 주도하는 일들이 계속 되었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올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이는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생겨난 사람들이 “…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4b)는 겉보기에는 좋은 결과들을 낳게 되었지만 이런 용사와 명성은 홍수로 인하여 영원히 이 역사 속에서 이름을 남기지 못하는 저주받은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 문제이다.

만약에 그들이 이렇게 영적이지 못해서 당장에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면 오히려 그런 일을 계속할 수 없었을 수도 있었다는 가정아래서 그들의 보이는 형통은 그대로의 형통이 되지 못했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상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날 수 있다. 하나님과 영적인 것을 거스르는 어떤 일들의 형통이 영영히 하나님과 관계없는 영원으로 가게 되는 것이 어쩌면 더 큰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다.

언제나 문제는 임시적이고 순간적인 좋은 것들과 영원한 영광을 바꾸려고 하는 잘못된 용기가 그 때뿐만 아니라 이 마지막 시대에도 있을 수 있다는 안타까운 가능성이다.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는 것들이 단순히 이 세상에서 육신의 복으로 끝나버린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경계이다.

베드로 사도는 그 때의 비극적인 역사를 통해서 오늘 우리를 경계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3:6~7)

그 때 당시의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들이 오늘 우리에게 경계가 되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들”로 바뀔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광을 영원히 입혀 주실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