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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왕하 5:9~14 2018-05-13
내 생각에는 …  
나아만이라는 사람은 이방인이면서도 엘리사를 통해서 그의 나병을 치료받은 사실 때문에 성경 속에 유명한 인물이고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사건이라 더 의미가 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눅4:27)

동화 같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있었던 사건이라는데 의미가 있고 그의 지위나 권위로 인하여 은혜를 얻지 못할 뻔 했던 믿음은 오늘 같은 입장의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는 사실이다.

이 놀라운 역사의 시작이 사실 그의 집에 잡혀와 종노릇 하는 하는 어린 여종에게서 출발 되었다는 사실(2~3)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더 크다. 엘리사라는 하나님의 능력의 선지자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이를 알게 해준 사람은 그의 방백도 부하도 아닌 그의 집의 어린 여종 하녀였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도 헤아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은혜로 지위나 생활의 넉넉함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더 잘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은혜의 역사를 출발시킨 사람은 포로로 잡혀온 하녀였다. 또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을 듣고 오히려 분노하고 거역할 때 그를 믿음으로 바로 서게 한 사람도 그의 임금이나 동료 장관이 아닌 역시 그의 종이었다는 것도 같은 이해를 하게 된다.

이 사건과 함께 의문스러운 한가지는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 속에 주로 불의 선지자 라고 하는 엘리야나 이 엘리사 같은 능력의 선지자가 있었다는 것조차도 성경 속에 기이한 역사이다. 일반적인 생각에서는 하나님을 더 잘 경외하고 섬기는 남쪽 유다에는 능력의 선지자들이 함께 하였을 것 같은데 성경의 역사는 오히려 그 반대되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도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다고 믿는다.

남쪽 유다에는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소위 말하는 대선지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이 북쪽의 두 선지자와 같은 능력은 갖지 않고 오로지 쓴 소리 아픈 소리로 교훈했던 것을 읽을 수 있다. 심지어는 예레미야 같은 경우는 눈물의 선지자라고까지 할 정도로 어쩌면 육신적으로는 마음에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기까지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로마서 5:20b “…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고백하였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꼭 지위가 높고 세상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라야 진리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간적인 생각이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직종 어떤 위치가 더 유리할 것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을 우리로 하여금 이 말씀은 다시 생각하게 한다.

또 예수님의 이 선지자들을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 속에 많은 선택 받았다고 하는 백성들이 있었지만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눅4:26~27)는 가르침도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묵상해 봐야 할 말씀이다.



Ⅰ.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다.(9~10)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온 여종의 말을 들은 나아만은 선지자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을 찾아 간 것 때문에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셨다는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 왕궁을 찾아 갔던 때처럼 한번의 혼란이 일어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그 사람을 자신에게 보내라는 말을 듣고 엘리사의 집 문에 선 나아만 일행을 첫 번째로 보게 된다.

적어도 당시의 세계 가운데 상당한 힘을 가진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이 찾아 왔음에도 선지자 엘리사는 조금은 푸대접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어쩌면 때로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을 무시하는 것처럼 취급하시기도 하는데 사실은 그것은 순종의 여부를 물으시는 테스트일 수도 있다.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잡혀 고생하는 일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왔던 헬라인이면서 수로보니게 여인이 당한 경우보다는 그래도 낳은 것 같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7~28; 마15:26~27)

자신은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다른 사람을 나아만에게 보내 전하는 말씀이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10)고 전하는데 적어도 이 짧은 메시지에는 명령과 결과가 함께 주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부분이 그렇다.

오늘날도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5~16)는 말씀과 같다. 그렇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순종하면 거기에는 언제나 약속이 있다. 그러한 형식은 거절하면 당연히 은혜를 얻지 못하거나 형벌이 따른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나중에 그가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보면 나아만에게는 별로 합리적이지 못한 말씀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럼에도 순종만 한다면 당시의 상황에서 나아만의 치료는 훨씬 빠를 수 있는 보다 쉬운 명령이었다. 그럼에도 그 말씀이 장애가 되는 것은 항상 사람의 위치나 형편과 판단 때문이다.

한편에서 나아만의 생각으로는 전혀 기적이 나타날 가능성이 없는 말씀이었기 때문에 나아만은 불평하고 거절하려 하는 것을 본다. 별로 깨끗하지 못한 요단강에 일곱 번 씻는다고 평생을 가지고 있던 나병이 나을 것 같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순종만 된다면 이 말씀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하신 약속은 틀림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약속이셨다. 대부분의 하나님의 말씀은 이성적인 우리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말씀에 반응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Ⅱ. 은혜 받는데 장애가 되는 사람의 생각,(11~12)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면서 상황이나 자신의 체면 때문에 바르게 반응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여기서 본다.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가 구원으로 결과되기까지는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자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헤아리고 반응하는 간격에서 각각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런 입장에서 이 사람의 반응을 살피고 오늘 우리의 자세를 점검해야 한다.

첫 번째의 안타까운 반응은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11f)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상황이나 자세에서 들었던 간에 기쁨으로 듣고 순종하는 것이 은혜 받을 자세임에도 평생을 고치지 못할 자신의 나병을 고침 받으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실적인 입장을 생각지 한고 자신이 기대하던 것과 다르고 자신의 지위에 합당한 예우를 하지 않는 것 때문에 분노한다.

이러한 반응은 당연히 다음에도 부정적인 반응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내 생각에는” 어쩌면 하나님의 은혜를 방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누구를 막론하고 받는 말씀보다는 “내 생각에는”이 순종에 앞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요 죄를 범한 인류를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만 못하셔서 우리 생각에 맞지 않는 어떤 명령을 주실 분이 아니니 때문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8~9) 말씀 앞에 챙겨야 할 것은 “내 생각에는”이 아니라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 뿐이다.

첫 번째의 나아만의 생각은 ①“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였다.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인 자신에게 모든 사람은 머리를 조아렸는데 유독 엘리사만은 우리 말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명령을 하는 것을 예전에는 경험한 적이 없었던 나아만의 불만이었다. 한 마디로 ‘기본이 안되어 있다.’는 불평이었다.

②“…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이미 하나님의 치료의 방법을 자신이 다 만들어 놓고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을 기도하면서도 그 응답을 하나님께 구하기보다는 스스로 다 만들어 놓고 그것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질병을 치료하는 것조차도 안수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수는 구약성경에서는 대부분 사람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하는 경우에 가장 많이 사용한 예를 본다. 적어도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쓰인 안수는 모두 그런 예이다.

③“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12) 엘리사는 가장 가까운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10m) 하였는데 오히려 멋 곳의 수질이 좋은 강들을 상상하고 있다.

영상에서 가끔 보는 것이지만 요단강은 그다지 크지도 않고 물은 조금은 탁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나아만은 자신의 판단과 생각은 깨끗한 물이 오히려 치료에 효과가 클 것이라고 짐작하여 선지자의 명령에 불만을 토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그리스도의교회 사이트에 올려진 사진을 보면 물이 흔하지 않은 아프리카에서 전도자가 걸음더미 옆의 시커먼 오물에서 침례를 행하는 사진을 본다. 사진에 보는 것처럼 그 물은 오히려 자신의 몸을 더럽힐 수 있고 오염시킬 수도 있는 물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④ “…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12bb) 하나님의 말씀에 “노하여 물러가며”(11ff) 자신의 생각하는 대로 판단하는 나아만은 여전지 울분과 분노로 상황을 이끌어 간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시작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판단으로 헤아리지 않고 순종하려는 자세였다면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10m)는 말씀보다 쉬운 일이 없었을 것임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판단으로 먼저 대항하고 있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어리석은 사람은 없기를 바란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Ⅲ. 말씀 순종의 가치,(13~14)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은혜 받을만한 자리에서 불신으로 돌아가려는 이 어리석은 나아만을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으신다. 비천한 하녀의 권면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역사는 역시 종을 통해서 부족한 믿음을 채우심을 본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13ff) 나아만과 함께 선지자를 찾아온 종들이 상당히 여럿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이들이 자신들의 비천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행히 그 주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단순함을 보게 된다. 어떤 사람이든지 형편이 어렵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다지 쉽지 않음을 보는데 주님께서도 세례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5b; 눅7:22b) 말씀하셨다.

“…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13m) 여기 ‘내 아버지여!’라는 호칭은 “나의 주인님!”이라는 표현과 다르지 않다. 다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라는 권면이다.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이 단순히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오히려 믿음이 가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어떤 어려운 일을 시켜야 그것이 효과가 있을 것 같은 사람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순종하기에 힘겨울 정도의 명령은 주시지 않으신다. 그런 이유에서 구원은 거저 주시는 것이고 선물이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수고와 공로로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벌써 은혜일 수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미 다 이루어 놓으신 구원에 대해서도 너무 단순해서 이상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그럼에도 이것이 안된 것을 보면 나아만도 역시 그랬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해야 되는 것으로 어림짐작하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과 세상의 일반 종교의 틀에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우리의 어떤 공로나 댓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13b) 이 말씀은 어쩌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는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비슷하게 들린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22:16)

사실 요단강 물이 다른 강들에 비해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능력은 하나님 말씀에만 있고 그 능력은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거나 들려도 순종하는 자에게만 나타난다.

또 이 어리석은 나아만의 순종치 못함이 종들의 권면을 받아들임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이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으로 권면하는 이 이종배도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사실 이 나아만의 종들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누구를 통한 권면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케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오늘도 저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 이 말씀이 무게가 있다. 분명히 옆의 종들의 권면이 있었지만 최종적인 순종으로 채워져야 할 명령은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이 되어야 은혜의 역사는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14b) 엘리사는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10)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였고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도 이 말씀이 순종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드디어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는 ‘왜, 일곱 번일까?’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 역시 숫자나 횟수보다 순종으로 채워져야 할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다. 분명히 여섯 번 담근 후에도 나병은 치유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곱 번을 순종하고라야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졌을 것으로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네 번을 담근 다음에 ‘왜 절반 이상을 채웠는데도 아무 이적이 없을까!’ 의심할 수도 있다. 더 심하면 ‘이것은 해봐야 승산이 없을 거야!’라고 포기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분명 안타까운 비극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100%의 순종을 요구하고 있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이나 치유는 맛볼 수 없다.

또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는 항상 약속 그 이상의 것이다.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하신 약속은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는 결과를 보게 된다. 항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순종으로 채워만 진다면”이라는 단서와 함께 모두 이렇다.

오늘도 하나님의 치유의 약속은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영원한 나병과 같은 죄에서의 해방을 이 나아만 같이 치유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시고 약속하신 복음에 순종하면 어린아이처럼 깨끗해 질 수 있다.

거기에다 내 이성이나 감정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 생각으로” 저울질하고 헤아리면 순종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세상의 주어진 높은 지위나 좋은 형편들은 나아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분노하고 거역하게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주님의 언약이 100% 채워지고 순종만 된다면 우리 사람의 이성이나 생각, 감정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누리게 될 것이다.